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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참느라 죽을 것 같았거든 (49/155)


49화. 참느라 죽을 것 같았거든
2022.07.22.



“……!”

아델은 거울 속에 자신 외에 또 다른 사람이 비치고 있는 걸 깨달았다.

누군지 짐작했지만 차마 고개를 돌려 확인할 수가 없었다.


“금방 나갈게. 밖에서 기다려줄래?”

파티션 위에 걸쳐둔 로브를 걸치며 담담한 척 그렇게 말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팔짱을 끼고 욕실 문 앞에 기대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이건 실례야, 크리스.”

황급히 로브의 허리끈을 묶으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잊었어?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그는 조금 웃으며 다가왔는데 평소보다 느슨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못 본 건가?


“아무리 그래도 사적인 생활은 존중해 주…… 아!”

순간 크리스틴이 팔을 뻗어 아델의 허리를 끌어당긴 것이다. 강한 힘에 의해 아델은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에게서 엷은 술 냄새가 풍겼다.


“술…… 마셨어?”

“조금.”

“뭐야,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굴더니.”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겨주었다. 짐머랑 딱 달라붙어서 그렇게 무시하고 가버리더니. 생각하니 조금 울컥해졌다.


“그러게.”

하지만 술에 취해서 씩 웃는 그를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자.”

아델은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크리스틴의 청회색 눈동자가 아델을 응시했다. 살짝 풀어진 동공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비밀스러워 보였다. 아델은 홀린 것처럼 그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이 잘까?”

순간 들려온 뜻밖의 말.

아델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야……. 아직 약속한 날짜가 남았잖아.”

“당신을 안지 않겠다고 했지, 같이 안 자겠다고는 안 했는데.”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놔줘.”

아델은 크리스틴의 품에서 놓여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는 마치 올가미처럼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힘으로 옥죄어 왔다.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지.”

“크리스 제발…….”

“왜, 내가 스톤이 아니라서 싫어?”

아델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했다. 취해서 느른하던 표정 따윈 금방 사라졌다.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그가 아델의 몸을 벽으로 홱 돌려세웠다. 동시에 그녀의 로브를 어깨에서 사납게 끌어 내렸다.


“……!”

그 바람에 아델의 머리에 감겨 있던 수건이 풀어지고, 넘실대는 머리카락이 등 위로 흘러내렸다.


“무, 무슨 짓이야 크리스…….”

벽에 뺨을 맞대고 선 채 아델이 울먹였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말 따윈 들리지 않는 듯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을 모아쥐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희고 곧게 뻗은 등 한복판, 척추뼈 위에 자리한 검은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거였나? 스톤의 표식이라는 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아델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등을 훑어왔다. 그 손가락은 마치 스톤의 머리글자를 덧그리기라도 하듯이 움직였다.

문신이 새겨지던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아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스톤도 그랬었다. 자신의 표식을 남길 자리를 미리 표시라도 해두듯이.

그래, 이것이 악마와 손잡은 대가.

아델은 입술을 꼭 깨물며 관절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떨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크리스틴은 등에서 손을 떼고 반쯤 벗겨진 로브를 다시 입혀 주었다.


“그래. 이게 그가 내 몸에 남긴 표식이야.”

아델은 로브의 앞섶을 추스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되고 나니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사실 마음 한 곳에선 그에게 들키기를 바라왔던 건지도 몰랐다. 차마 제 입으로 먼저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그 새끼의 여자였던 건가?”

아델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불꽃이 튀었다.


“아니, 절대로 아니야!”

그녀의 매서운 고함에 크리스틴은 하, 나직하게 숨을 토해내더니 곧 낄낄대며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욕실 안에 홀로 메아리쳤다.

아델은 기분 나쁘다는 듯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나란 놈, 참 한심해서.”

뜻밖의 대답에 아델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당신이 그 새끼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그 새끼의 여자였는지가 더 궁금하다니.”

아델은 쓰게 웃었다.


“이해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

욕실에서 나온 아델은 벽난로 앞의 콘솔로 갔다. 두 개의 와인 잔을 채워서 하나를 크리스틴에게 건넸다.

술은 오늘 같은 날에 마시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자와 거래의 대가였어.”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아델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거래의 대가?”

“아무리 내가 후작 부인이 됐어도 난 그저 지하실 마님이었으니까. 엄마를 죽인 귀족들을 찾고, 그자들을 죽이는 게 쉽지는 않았지. 그러다 눈치 빠른 스톤에게 들켜버렸어.”

“놈이 협박한 건가?”

“그의 도움을 좀 받았어. 그 대가로 내 몸에 표식을 남기고 싶다고 했고.”

그것이 악마와의 계약.

하지만 아델은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에는 그만큼 절박했다. 앞으로의 일 따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복수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표식만?”

크리스틴이 뭘 의심하는지 알만했다.


“그래 표식만.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아델 역시 스톤의 그 제의를 들었을 때 의심했었다. 만일 그가 억지로 안겠다고 해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다행히 스톤은 약속을 지켰다. 오스월드 전대 후작이 살아 있었으니 차마 어찌할 수는 없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아델을 서서히 망가뜨리고 짓밟으며 쾌락을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래, 그자라면 그게 더 어울렸다.


“이 표식이 있는 한 영원히 날 벗어나지 못해. 네 영혼까지 내 거라는 증거니까.”

 
아델은 그날 제 등에 문신을 새기며 지껄이던 스톤의 목소리를 애써 떨쳐내며 웃었다.


“후우, 들켜버리니까 차라리 후련하다.”

그리고 목이 마른 사람처럼 연거푸 와인을 들이켰다.


“나와 잠자리를 피했던 건 그래서였어? 그 표식을 들킬까 봐?”

“그래, 이게 스톤이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되면…….”

“스톤과 당신 사이를 의심할까 봐?”

아델은 크리스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지금처럼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믿어. 당신이 아니라면 아닌 거니까. 그런데 왜?”

그의 눈동자는 서늘했지만 아델을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아델은 숨기려 했던 게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 표식을 보면 스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을 거야. 우리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그자가 끼어드는 게 싫었어. 크리스, 당신은 정말 그 일을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크리스틴은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하긴, 지금도 기분이 엿 같기는 해. 나는 처음 보는 당신 몸에 그놈의 표식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놈에 대한 분노일 뿐이야. 이대로 살려두지 않아!”

이를 가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이럴까 봐 말 안 한 이유도 있어. 당신이 스톤에게 무모하게 달려들기라도 할까 봐.”

“날 못 믿는 거야?”

발끈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교활해.”

“누가 더 교활한지는 모르는 거지.”

그러면서 크리스틴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순간 아델은 그가 정말로 스톤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보다 부탁이 있어. 크리스.”

“뭐지?”

대답 대신 그녀는 뒤돌아서더니 로브의 허리끈을 풀었다.

실크로 만든 옷자락은 차르르 굴곡을 타고 흘러내려 아델의 발아래 떨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이 그녀의 새하얀 몸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크리스틴은 홀린 듯 시선을 고정한 채 콘솔 위에 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목울대가 울컥 흔들렸다.

아찔한 기분이 드는 건 취기 탓인 걸까?


 

***

아델은 지금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얇은 슈미즈 하나만 입고 있었다.

슈미즈 사이로 아스라이 비치는 여체는 르뷔에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의 조각상을 닮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그녀를 보기 위해 매일 수많은 사내가 줄을 서서 기다린다던가?

크리스틴은 지금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흠결 하나 없는 살결과 곧고 가지런하게 뻗은 뼈대, 색정적이면서도 우아한 곡선. 보는 것만으로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홀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미간을 모으며 나직한 욕설을 지껄였다.


“빌어먹을……!”

아델이 머리카락을 모아 앞으로 넘기자 눈부신 살결 위로 끔찍한 표식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이 완벽한 작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예의 없고, 난폭한 낙인이었다.


“당신의 칼로 이 표식을 도려내 줘.”

“제정신이야?”

“피부를 벗겨내기 전엔 이걸 없앨 수가 없대. 하지만 당신은 칼을 잘 쓰니까…….”

간절한 목소리.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녀를 이렇게까지 만든 스톤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래서 헬밸리의 의사를 찾아간 건가?”

“……!”

놀랐는지 아델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이 그린힐에서 나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아델.”

“그렇구나…… 잊고 있었어. 당신이 누군지.”

“또 뭐가 있는 거지?”

“뭐가…… 있다니?”

크리스틴은 아델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을 보게 돌려세웠다.


“제발 더 이상 당신을 오해하게 만들지마, 아델. 난 항상 당신 편이고, 당신을 도울 거니까.”

그의 목소리는 단호한 명령 같기도 했고, 간절한 애원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는 더이상 그녀의 보호가 필요하던 어린 소년이 아니라는 것.

누구보다 강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영웅. 이제는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든든한 내 편, 내 남자…….


“그러게. 당신은 항상 내 편이었는데. 그걸 자꾸 잊어버려. 아마, 계속 혼자 해결해왔던 게 버릇이 됐나 봐.”

그 순간 무언가가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 뭐지? 나 울려고 했던 거 아닌데.”

아델이 어이없어하며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닦아내는데,


“울어도 돼. 내 앞에서니까.”

그녀의 손을 붙잡은 크리스틴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핥았다.


“……!”

놀란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입맛을 다시며 혀끝에 맴도는 맛을 음미했다.


“당신 눈물은 이런 맛이구나.”

“뭐, 뭐 하는 거야…….”

아델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행동으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지만, 이런 걸 할 줄은…….


“그래도 당신 입술이 더 맛있어.”

게다가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나른하게 눈꼬리를 휘며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아델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 등의 표식을 없애…….”

아델이 뒤로 물러나며 화제를 돌리려 하자, 크리스틴은 그만큼 더 다가왔다.


“완벽하게 없애줄 테니까 걱정 마.”

“진짜?”

“물론.”

그동안에도 크리스틴의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짙어진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뚫을 것만 같았다.

와인 몇 잔에 벌써 취한 건가?

강렬하고도 집요한 시선에 아델은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에도 열이 오르며 귓불이 홧홧해져 왔다. 지금쯤 빨갛게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에게 턱을 잡혀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아델의 턱 끝을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고요하고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파도처럼 넘실대며 순식간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델은 그 파도 속에 빨려드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럼 이제 보름 동안의 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 거지?”

“어?”

무슨 소리지?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건 핑계였을 테니까. 그렇지?”

헉, 지금 설마 첫날밤 얘기?


“그, 그건…….”

“참느라 진짜 죽을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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