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내 목적은 승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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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내 목적은 승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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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내 목적은 승리가 아니야
2022.08.01.
아델은 제 어깨에 기댄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게 좋은지 얌전히 머리를 들이대고 있는 크리스틴은 정말 덩치만 커다란 아이, 아니 순한 대형견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함께 사랑을 나누는 시간도 좋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서로를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이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흠흠! 흠흠!”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크리스. 핸리인가 봐.”
아델이 멈칫하며 밀어내자, 크리스틴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못마땅한 것이다.
“무슨 일이지?”
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리라고 해.”
“그것이…… 기다린 지가 꽤 오래되어서…… 흠흠, 저도 가능하면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이라…….”
“대체 누가 이 시간에!”
“앨리라고 하면 아실 거랍니다.”
그 순간 크리스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온 것처럼.
“알았다. 곧 응접실로 가지.”
“앨리라니?”
앨리라면 여자의 이름이었다. 이 저녁 시간에 여자가 찾아왔다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크리스틴의 환해진 표정을 보니 아델은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아아, 앨리는 떠돌이 집시야. 전쟁 중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는데 상의할 게 좀 있어서 수소문했거든.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닿았나 보군.”
“그래, 중요한 손님인 건 알겠는데 무슨 용무로 만나는지 알려주면 안 돼?”
아델의 목소리가 조금 예민해졌다.
“뭐야,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무슨.”
아델은 대범한 척 웃었다.
그런 아델이 귀여워서 그가 살며시 코를 잡아 흔들었다.
“실은 당신 문제로 불렀어.”
“내 문제?”
“일단 만나봐. 틀림없이 당신도 좋아할 거니까.”
***
오늘은 나흘간 열리는 황실 승마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4개의 조로 나누어 치러진 대회에서 4명의 우승자가 나왔다. 그 4명이 오늘 최종 결승전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중 한 명은 당연하게도 크리스틴이었고, 나머지 3명은 스톤을 포함해 모두 귀족 원로회 가문 출신이었다.
“역시 바이스 백작이네요. 백작이 출전해서 폐하의 면을 세웠어요.”
“하지만 오스월드 후작이 우승할걸요. 지금까지 성적이 제일 좋으니까요.”
“백작이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죠.”
관람하는 사람들조차 황제파와 귀족 원로회 파로 나뉘어 크리스틴과 스톤을 응원했다.
얼마 전 내린 폭설로 황궁 안팎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다시없을 빅 매치를 보기 위해 귀족들은 물론이고 시민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황궁 승마장과 주변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황제 얀이 승마장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피를 두른 그는 머리에 황금색 관을 쓰고 손에는 기다란 홀을 들었다. 평소 간소한 복장을 즐기는 황제였지만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이토록 위엄 있는 차림을 하곤 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사람들의 예를 받은 후 얀은 출전하기 위해 모인 네 명의 기수들을 둘러보았다.
승마대회의 최종 결승전은 항상 황제가 경기 방식을 정하고는 했다. 그저 빨리 달리거나 마상술이 뛰어나다고 우승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내 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치열했던 경기를 통해 그대들의 역량을 보며 짐은 무척 흡족하였소. 이제 최종 결승전만 남겨 놓은 상황. 마지막은 해가 지기 전까지 짐의 보물을 찾아오는 자가 이 대회의 최종 승자 될 것이오!”
황제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황제의 보물이라니.
“짐은 이 황궁의 숲 어딘가에 소중한 보물을 감추어 놓았소. 그걸 찾아오는 자는 올해 승마대회의 영광을 차지할 뿐 아니라, 한가지 청을 들어줄 것이오. 물론 짐의 능력 밖의 청을 해오면 곤란하겠지만. 그럼 모두에게 행운을!”
황제가 가볍게 웃으며 단상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폐하의 보물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스톤이 물었다.
금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재킷을 입은 그는 이번 대회에서 크리스틴과는 다른 매력으로 여심을 사로잡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차갑고 아름다운 분위기라면 그는 좀 더 어둡고 거친 매력을 풍겼던 것이다. 게다가 아델의 차지가 되어버린 크리스틴보다는 가능성이 있는 스톤에게 여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지금 짐의 모습을 유심히 봤다면 아마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황제에게 모였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기다란 홀의 제일 상단 장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대 황제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던 보물.
“하지만 이 경기는 바이스 백작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황궁의 모든 경비와 이 대회의 경비 책임자가 백작이니 말입니다.”
그러자 얀은 서늘하고 위압적인 표정으로 스톤을 주시했다.
“오스월드 후작. 나는 누구보다 이 대회가 공평하게 치러지길 바라는 사람이네. 경이 우려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황제의 권위를 걸고 맹세하면 되겠나?”
순간 스톤의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는 한쪽 발을 뒤로 물리며 정중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이내 진행자가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그럼 기수들은 위치로 서주십시오!”
***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아델은 맞잡은 손을 꼭 움켜쥐며 빌었다.
어제까지는 크리스틴과 스톤이 맞붙는 경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경기는 다들 예상하듯이 크리스틴과 스톤의 싸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장내가 아닌 장외경기.
교활한 스톤이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 무렵 기수들이 말을 몰고 차례로 아델의 앞을 지나갔다. 일반 시민들과 달리 귀족들은 승마장 둘레의 지정된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델은 황후 모녀, 세이라 등과 함께 기수들이 제일 잘 보이는 단상 옆자리였다.
순간 아델의 앞을 지나가던 스톤이 말을 멈췄다. 이번 대회에서 한껏 인기가 올라간 그의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된 것은 당연한 일.
그는 깃털이 나풀거리는 모자를 들어 올리며 아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의 레이디에게 우승을 다짐하듯이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 미소에 아델은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았다.
‘저 웃음의 의미가 대체 뭘까?’
사람들이 둘을 번갈아 보며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들 사이로 크리스틴이 말을 몰아 달려오더니, 달리는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펜스를 훌쩍 넘어온 그는 아델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와아!”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들려오자 아델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지금은 쇼타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크리스틴과 최고의 연인이라는 걸 각인시켜줘야 했다.
아델은 그의 뺨을 감싸고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민망하고 낯이 뜨거웠지만 일그러진 스톤의 표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묘한 쾌감을 느꼈다.
“보여주기치곤 너무 뜨거운 거 아닌가?”
입맞춤이 끝나자 아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그가 속삭였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승리는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무사히 돌아와.”
“내 목적은 승리가 아니야.”
“그럼?”
그는 대답 없이 눈을 찡긋하고는 훌쩍 펜스를 넘어 돌아갔다. 두 사람의 강렬한 애정행각에 스톤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보지 못한 게 아델은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귀부인들이 아니었다.
“정말 부럽네요, 아델 양이.”
“그러게요. 아델 양은 기분이 좀 묘하겠어요. 한때는 오스월드가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바이스 가를 응원하고 있으니.”
아델의 주변에 있던 귀부인들은 마치 그녀가 스톤의 여자였다가 크리스틴에게 변심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황후까지 한마디 보탰다.
“다들 부러워만 말고 좀 배우도록 하세요. 타고난 건지, 갈고 닦은 건지는 모르지만.”
아델은 그들의 비아냥 따윈 못 알아들은 척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우시겠다면 얼마든지 가르쳐드릴 용의가 있답니다. 물론 타고 난 부분이 더 크긴 하지만.”
그녀의 도발적인 대답에 여인들은 괜히 헛기침하며 세이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황후의 옆에 앉은 세이라는 부채를 흔들며 그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 보다 앞장서서 아델을 공격했을 그녀였건만.
‘아델, 네가 아무리 그래 봐야 오라버니가 널 놔줄 거 같아?’
세이라는 지금 경기에 출전하기 직전 스톤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이스 백작이 어떤 놈이든 상관없어.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설마 그를? 안 돼. 그는 황제의 오른팔이야. 함부로 건드렸다간 폐하의 진노를 살 거야.”
“글쎄, 더 좋은 카드를 내밀어도 황제가 정말 진노할까?”
“황제와 무슨 얘기가 있었던 거야?”
“그건 비밀.”
뿌우우우!
이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들려왔다.
네 명의 기수들은 앞다투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제일 먼저 앞서간 것은 스톤이었다. 그 뒤를 크리스틴이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나머지 두 명은 다른 길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스톤은 늑대의 골짜기로 향하고 있었다. 예전에 황궁이 지어지기 전에 늑대들이 자주 출몰한 지역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올 것 같았다.
늑대의 골짜기를 오르는 길은 단 하나. 그리고 절벽이 많았다.
아무리 기마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자칫하면 말과 함께 절벽에서 미끄러질 수 있었다. 얼마 전 내린 폭설로 사방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웠으니까.
그리고 오늘 스톤이 그렇게 될 것이다.
저 언덕을 오르면 경비대의 초소로 쓰던 낡은 움막이 있었다. 황제가 보물을 숨겨놓기에 적당한 장소였기에 스톤은 분명 말에서 내려 그곳부터 뒤져볼 것이다.
그를 없앨 장소로 아주 적합했다.
놈이 그동안 아델에게 해온 짓을 생각하면 단칼에 해치우는 건 너무 자비로운 처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뒤따라올 귀족회 놈들이 눈치라도 채면 골치 아플 테니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좋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좀 더 속도를 높여 바싹 따라붙었다.
예상대로 경비대의 초소 앞에 도착한 스톤은 말에서 내려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틴도 거리를 두고 말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초소 앞에 도착한 그는 한 손은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서 스톤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황제의 보물을 찾는다면 지금쯤 부산스럽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기분 나쁜 체취가 분명하게 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큭!”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가 터져 나온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
‘설마 뒤따라 올 걸 예상했나?’
스톤은 교활하고 머리가 좋은 자였다. 어쩌면 저 안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그러자 크리스틴의 입매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재미있게 됐군.’
하긴, 너무 쉽게 처리해버리면 허무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