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늑대가 나타났다!
(53/155)
53. 늑대가 나타났다!
(53/155)
53. 늑대가 나타났다!
2022.08.05.
“거기 숨어서 웃지만 말고 이리 나와보시지요, 후작 나리.”
크리스틴은 문 너머의 스톤에게 말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밀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 마치 누군가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검을 움켜쥔 크리스틴의 손등에 힘줄이 잔뜩 불거졌다.
본능적으로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느꼈으니까.
그러자 문 뒤에서 스톤이 나직하게 물어왔다.
“자네는 가장 두려운 게 뭐지? 바이스 백작.”
“글쎄, 두려움 따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럼 곧 알려주지. 깨닫는 순간 숨통이 끊어지겠지만.”
크리스틴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큭큭 거리다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날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드리지요. 후작 나리.”
“그 패기. 아델이 잠시 홀릴 법도 했군.”
스릉.
검을 세워 드는 크리스틴의 푸른 눈이 얼음장보다 더 싸늘했다.
“안타깝군요, 후작 나리. 그 이름을 들먹이지만 않았으면 단칼에 숨통을 끊어줬을 텐데.”
그러자 문 뒤에서 스톤도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웃어댔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심장을 제일 마지막에 먹어치울 생각이거든.”
크리스틴은 귀를 의심했다.
‘뭐……?’
그와 동시였다.
콰아앙!
초소의 낡은 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크리스틴은 본능적으로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재빨리 몸을 훌쩍 날려 뒤로 물러섰다.
우우우웅!
엄청난 힘이 바람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흩날리고, 펄럭이던 케이프 자락 한쪽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탓!
눈밭 위에 가볍게 착지한 크리스틴의 표정은 창백했다.
우우우웅!
상대가 재차 공격을 해왔지만, 그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대로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눈 시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는 그것은…….
‘갈색 늑대!’
퍼어억!
놈은 다섯 개의 발톱을 휘둘러 그대로 크리스틴을 가격했다.
새하얀 눈밭 위에 붉은 피가 튀고, 그의 몸이 절벽 아래로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
4명의 우승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경기장 안은 갖가지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다.
근위대들의 무예 시범을 시작으로, 각 가문에 속한 기사단이 마상술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에도 가문들 간의 자존심이 걸린 터라 서로 돋보이려는 신경전이 대단했다. 그 중간마다 화려한 차림의 서커스 단원들이 신기한 기예와 배꼽 잡는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황궁 밖에서는 온갖 공예품과 먹거리를 판매하기도 했다. 공연을 보다가 지친 귀족들은 이곳에서 시민들과 뒤섞여 구경하기도 했다.
하루종일 모두에게 흥겨운 축제였다.
단 한 사람, 아델만을 제외하고.
“앗, 저기 보니타 부인이세요!”
억지로 아델을 끌고 공예품을 구경하던 타냐가 소리쳤다.
꼬치구이를 크게 베어 먹던 미아도 두 사람을 보고 얼른 달려왔다.
“아델! 타냐!”
“오랜만이야, 미아.”
아델은 미아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웃었다.
“어머 아델, 그 사이 얼굴이 아주 활짝 폈네. 마블 궁의 물이 좋은 건가, 아님 백작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가.”
미아는 만나자마자 폭풍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 아델이 없어서 입에 거미줄이 생기는 줄 알았단다. 하지만 아델은 평소처럼 쾌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걸 깨달은 미아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백작님이 걱정되어서 그러세요.”
미아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우,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백작님 걱정이라고. 전쟁터에서 살아온 분이 설마 황궁 숲에 갔다가 엉덩방아라도 찧을까 봐?”
“엉덩방아도 아프다고.”
아델은 그것조차 싫었다.
“하긴, 백작님이 엉덩방아라니 상상이 안 되지. 그러니까 머리털 한 올 다치지 않고 황제 폐하의 보물을 들고 돌아오실 거라고.”
“제 말이요.”
타냐까지 맞장구를 쳤지만 아델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스톤이 얼마나 교활한지 몰랐으니까. 게다가 크리스틴도 그를 순순히 내버려 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서 싸움이라도 하게 된다면…….
‘정말 크리스틴이 무사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돌아왔다! 우승자가 돌아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아델은 정신없이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돌아온 것은 크리스틴도 스톤도 아니었다. 4인의 우승자 중 한 명으로 날이 어두워지면 위험할 것 같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황제의 보물은 찾지 못한 채였다.
어느덧 짧은 겨울 해가 서녘 산자락에 걸리고 어스름한 어둠이 깔렸다.
아델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는 걸까?
“저기 또 누가 와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몰렸다.
눈과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숲길에서 누군가 말을 몰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저물어 가는 마지막 태양 빛이 손에 들린 황금색 장신구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폐하의 보물을 찾았나 봐요!”
“누구죠?”
“글쎄요, 어두워서 잘 모르겠어요.”
***
“내 보물이 맞네.”
얀은 최종 우승자가 가져온 보물을 홀의 상단에 끼웠다. 황금색 왕관 모양 안쪽에 거대한 푸른 다이아몬드가 박힌 홀 장식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얀은 완전한 모양을 갖춘 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로써 짐은 이번 대회의 최종 우승자는 스톤 오스월드 후작임을 선언하오!”
“와아아!”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꽃가루가 흩날리고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제의 절정에 모두 흥겨워했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린 경기장 주변을 화려한 등불이 밝혔다. 이제 곧 벌어질 불꽃놀이를 기대하며 낮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아델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스톤이 보물을 찾아서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는데 크리스틴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건…… 그가 잘못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
결국 인파를 뚫고 황제의 앞에 나갔다.
“폐하, 바이스 백작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속히 근위대들에게 수색을…….”
아델을 바라보는 얀의 시선이 무척 차가웠다.
“바이스 백작뿐 아니라 아직 다른 참가자도 돌아오지 않았소. 최종 우승자는 가려졌지만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직 경기가 끝난 게 아니오. 그러니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시오.”
“폐하……!”
하지만 얀은 아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근위대들이 그녀의 양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순순히 돌아가지 않으면 완력으로라도 끌어낼 기세였다. 하기야 그들은 크리스틴의 부하였지만,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아델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잠시만 폐하, 아델 양에게 용무가 있으니 물리지 말아주십시오.”
스톤이 아델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교활한 눈빛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응시했다. 지금 크리스틴의 행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었으니까.
“바이스 백작을 보았죠? 어떻게 된 거죠?”
다급하게 묻는 그녀에게 스톤은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몸을 홱 돌려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폐하.”
“말하게. 오스월드 후작.”
경기 시작 전에 얀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다. 보물을 찾아오는 사람에겐 한가지 청을 들어주겠노라고. 스톤은 그 자격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뱀처럼 사악한 그의 눈빛이 다시 아델에게 달라붙었다.
“아델 양을 사면하여 주십시오.”
“사면이라니? 지은 죄가 있어야 사면을 할 것 아닌가?”
얀이 의아해하며 묻자, 스톤은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8년 전에 제 아버님이신 전대 오스월드 후작을 독살한 것은 아델 양이 맞습니다.”
그 말에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델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스톤이 저렇게 대담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크리스틴이 그녀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리라.
설마 숲에서 그를 어떻게 한 건가?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바이스 백작이니까.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단장, 전쟁의 영웅이며 용맹한 기사…….
그리고
나의 연인…….
‘그러니까 절대 그럴 리 없어.’
애써 부정하면서도 아델은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
스톤은 준비해 온 대본을 읽듯이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델 양은 저를 계속 흠모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아버님의 병수발을 들다 보니 한창나이인 그녀가 제게 마음을 두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그녀는 저의 새어머니. 그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밤늦게 제 침실로 들어와 유혹하려 했습니다. 저는 몹시 화를 냈죠. 그리고 결국 다음 날…… 아버님을 독살했습니다. 병든 아버님만 사라지면 저와 잘 될 거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탄식으로 변해갔다. 그녀에 대한 끔찍한 소문이 사실이었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아델은 깊고 검은 늪 속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증거가 있나?”
“예, 아버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의심이 되어 방을 뒤져보니 다량의 독초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전대 후작을 독살한 증거가 없다고 했지?”
얀의 추궁에 스톤은 비통하게 대답했다.
“아버님은…… 병세가 악화되어 얼마 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한창 젊은 나이의 그녀가 그 일로 교수형을 당한다면 괴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좀 더 알아듣게 설득하지 못했던 제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고요. 그러나 지금쯤이면 그녀도 스스로 죄를 뉘우쳤을 것이라 믿습니다.”
다들 슬퍼하는 스톤의 표정에 감쪽같이 속아 혀를 찼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선수였다.
“아델 양이 이제 새사람을 만났으니 그 일은 정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기에 참여한 이유도 폐하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가 이제 마음의 짐을 벗고 새 출발을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사람들은 스톤의 인품이 대단하다며 칭찬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그토록 자비를 베풀다니.
한술 더 떠서 그는 아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델 양, 그대의 마음을 받아주진 못했지만 오스월드 가는 기꺼이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이오. 그러니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손 내밀어도 좋소.”
그는 한없이 자애롭고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그것이 아델은 더 소름 끼쳐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이해하오. 사람들 앞에 죄가 드러났으니 부끄럽겠지. 하지만 이 정도는 죗값으로 치른다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어서 폐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도록 하오.”
마치 잘 짜여진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기분.
그 덫이 아델의 팔다리를 묶고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스톤, 네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아델은 핏발이 서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스톤이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어쩌지? 놈은 이제 없는데.”
악마 같은 속삭임.
“……!”
아델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쳐다보자, 그는 아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잘린 크리스틴의 케이프 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