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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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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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해
2022.08.08.
케이프 자락을 움켜쥔 아델의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거짓말…… 이지?”
“불쌍한 아델.”
“아니야…….”
아델은 그렇게 말해달라는 것처럼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스톤은 야릇하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해.”
털썩.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어서 아델의 무릎이 꺾였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아델을 보며 스톤은 다시 얀에게 다가가 간청했다.
“폐하, 이렇게 참회하는 그녀를 부디 용서하여주십시오.”
얀은 언 바닥에 무릎 꿇고 우는 아델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약속이니 후작의 청을 들어주겠네. 하나, 모두 똑똑히 들으시오. 이 시간 이후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죄를 용서하여주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아델, 그대는 특히 명심하고 평생토록 오스월드 가에 참회하며 살도록 하라.”
고개를 떨어뜨린 아델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답하라, 아델!”
얀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채근했다.
그러자 아델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뭐라?”
얀이 노기에 찬 얼굴로 노려보았다.
아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스톤을 향해 비척비척 다가갔다.
“전부 거짓말. 스톤, 네놈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거짓말! 거짓말! 아아악! 크리스, 크리스를 어떻게 한 거야! 크리스를 돌려줘!”
아델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스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재빨리 달려온 근위대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델은 성난 짐승처럼 몸부림치며 스톤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 악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아아악! 네놈을 죽여버릴 거야! 죽일 거야!”
스톤은 그런 아델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얀과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폐하, 사실 아델 양의 명예를 위해 이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쩔 수가 없군요.”
“말해보게.”
“8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제 침실로 찾아온 그녀는 등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지요. 제 말의 엉덩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스톤이라는 이름의 머리글자였습니다. 그러더니 지금처럼 제 여자가 되겠다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녀의 집착은 도를 넘어 마치 광증에 걸린 사람 같았지요. 그리고 결국 다음 날 아버님을 그렇게…….”
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신은 노예나 매춘부들의 전유물이었다. 누군가의 소유를 상징하는 것. 그러니 귀족가의 여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나?”
“의심이 가신다면 그녀의 등을 확인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아델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등에 있는 문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아델은 이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스톤이 만들어놓은 덫이 얼마나 견고한지 저항조차 무의미해질 정도였으니까.
그는 이대로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갈가리 찢어놓을 생각인 것이다. 다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도록.
그때였다.
“아! 저기 누가, 누가 오는 것 같아요!”
누군가 황궁 숲의 입구를 가리켰다.
숲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은 두 마리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태운 건 한 마리뿐이었다. 나머지 말은 안장이 비어 있었다.
“윽!”
순간 근위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아델이 자신을 붙잡은 근위대의 손을 깨문 것이다. 그들이 놓친 틈에 그녀는 정신없이 숲을 향해 달려갔다.
“……!”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서서히 형체가 분명해지며 드러난 사람은…… 크리스틴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을 태우고 갔던 말은 빈 안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얀의 물음에 크리스틴의 말을 끌고 온 남자가 보고했다. 그는 경기에 참가한 4인의 우승자 중 나머지 한 명이었다.
“늑대의 계곡에서 백작의 말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부르고 찾아봐도 백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뜻밖의 대답에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전쟁의 영웅이던 바이스 백작이 황궁 숲에서 실종됐다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염려들 마시오, 백작은 곧 무사히 돌아올 테니. 그러니 모든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오.”
얀은 분위기를 정리하며 좌중을 안도시켰다. 그러자 술렁이던 사람들 대부분은 공감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이스 백작이었으니까.
“자네의 짓인가?”
한편 얀은 스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물었다.
“내일 아침 늑대의 골짜기에 가시면 놈의 뼛조각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스톤의 대답에 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주위를 의식하며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설마…… 백작을?”
“놈이 늑대의 계곡 아래 처박히는 걸 분명히 봤습니다.”
“그럴 리가……! 죽인다고 까진 안 했잖나?”
얀의 책망에 스톤은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내 편이 될 수 없다면 몹시 위험한 자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처리하는 게 좋습니다, 폐하.”
이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두 사람은 손을 잡은 것이다. 그 증거로 얀은 스톤에게 보물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었고 한가지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아델을 사면해달라는 청일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크리스틴까지 죽여버리다니.
아니, 그를 정말 죽일 수 있었다는 건가?
그때 스톤이 목소리를 한층 낮춰 악마처럼 속삭여왔다.
“백작의 막대한 재산이 탐나지 않으십니까?”
얀은 몹시 불편해졌다. 푸르게 반들거리는 스톤의 눈동자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사실 오랜 전쟁으로 국고는 바닥나기 직전이었고, 황실의 재정도 최악이었다. 크리스틴이 소유한 은행에서 겨우 국채를 써서 유지하는 중이었다.
이럴 때 그의 재산이 몹시 탐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저 여자를 광증으로 몰아 오스월드가가 후견인이라도 될 생각인가?”
스톤은 조용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얀은 재빨리 계산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이 정말 죽었다면 그의 재산 대부분은 아델이 상속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면 오스월드가를 후견인으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막대한 재산을 오스월드가와 자신이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델이야 치료를 구실로 어딘가에 처박아 버리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입니다, 폐하.”
하지만 얀은 크리스틴의 시신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다. 늑대 일족인 그가 결코 쉽게 당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약속대로 저는 귀족회의 여론을 폐하 쪽으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원로 귀족회만 장악하시면 폐하를 위협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순간 얀은 계산을 끝냈다.
귀족회만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크리스틴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점점 뜻대로 다루기 힘들어지는 그에게 묘한 압박까지 느끼던 중이었으니.
전쟁은 끝났고, 이제 필요한 건 귀족회의 힘이었다. 이럴 땐 정치 명문가인 스톤과 손잡는 쪽이 더 유리했다.
크리스틴을 없애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래서 그 막대한 재산까지 손에 넣는다면…….
“좋네, 자네를 믿어보지.”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
얀은 아델에게 다가갔다.
“아델, 경기 직전 그대는 바이스 백작에게 차를 건넨 적이 있는가?”
크리스틴의 말을 끌어안고 혼이 나가 있던 아델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당연한 걸 왜 묻는 걸까?
추운 날씨였으니 경기에 임하기 직전 선수들은 당연히 따뜻한 차를 마셨다. 아델 역시 크리스틴에게 먹이기 위해 차와 과자를 가져왔었고.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얀은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명했다.
“당장 아델 그릴스를 체포하라!”
스릉. 스릉.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위대들이 아델을 둥글게 에워싸며 칼을 겨눴다.
얀이 덧붙여 말했다.
“바이스 백작의 살해 용의자다.”
아델은 귀를 의심했다.
“살해……라니요? ……제가…… 그를요?”
“백작은 그대가 준 차를 마시고 경기에 임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서서히 독이 퍼져서 정신을 잃고 계곡 아래로 추락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어이없는 사고를 당했을 리 없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이야 쉽겠지.”
아델은 이 상황이 도저히 현실 같지 않았다.
역시 이건 꿈이 분명해.
아주 지독한 악몽.
“사악한 악녀!”
누군가 아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녀다! 화형에 처해라!”
“당장 백작을 살려내!”
가뜩이나 크리스틴의 약혼녀로 아델을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일 기세였다.
***
“끔찍하네요, 저런 여자가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였다니.”
“그러게요. 그분을 죽이고 그 엄청난 재산을 다 가로챌 생각이었겠죠?”
“아유, 소름 돋아라! 이게 저 여자의 실체였겠죠?”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세이라는 부채 끝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웃었다.
역시 오라버니!
‘이렇게 단숨에 아델을 끝장내 버리다니.’
“더 좋은 카드를 내밀어도 황제가 정말 진노할까?”
“황제와 무슨 얘기가 오간 거야?”
역시 스톤은 황제와 손을 잡은 게 분명했다.
황제까지 한 편이라면 아델 하나쯤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비로소 세이라는 답답하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물론 크리스틴이 잘못된 건 크게 아쉬웠지만.
‘아델 넌 역시 지하실 마님이 제일 잘 어울렸어.’
***
“큭!”
한동안 넋 놓고 있던 아델의 입가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자신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자가 벗겨져 머리는 잔뜩 헝클어지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웃는 그 모습은 기괴하고 음산하기까지 했다. 마녀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실망이에요, 폐하.”
아델은 근위대들의 칼에 둘러싸인 채로 얀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통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는 분노도 두려움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이 자리에서 죽으면 그만이니까.’
스톤 저자의 뜻대로 되느니 차라리 그게 더 통쾌할 것이다.
그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 근위대의 칼에 목을 그어 버릴까?
‘네놈은 결코 날 가질 수 없어!’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면서.
아니지.
‘악령이 되어 네놈과 오스월드가를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그 정도 저주는 퍼붓고 죽어야겠지.
‘그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그런 생각을 하자 아델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얀은 그런 아델을 보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아델은 대답 대신 어깨에 두른 케이프를 풀어버리고,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근위대의 칼날이 둥그렇게 둘러싼 한 가운데에서 마치 아무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녀가 정말 미친 거라며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다. 혹자들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짓인가! 당장 멈춰라!”
당황한 얀이 소리쳤다.
동시에 아델의 화려한 드레스가 흙바닥 아래로 툭 떨어졌다.
“스톤 저자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지요.”
얇은 슈미즈 위에 코르셋 차림이 된 그녀는 제 어깨에서 옷자락을 확 잡아챘다.
어둠 속에서 희고 매끈한 등이 드러나자 다들 웅성거렸다.
그녀의 등 한가운데는 정말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틴?”
얀은 그녀의 등에 새겨진 문신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곧게 뻗은 척추뼈를 중심으로 양쪽 어깨뼈를 따라 새겨진 철자는 분명히 ‘CRISTINE’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치 날개처럼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