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가 반격할 차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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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제가 반격할 차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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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제가 반격할 차례군요?
2022.08.12.
“스톤 저자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지요.”
얇은 슈미즈 위에 코르셋 차림이 된 그녀는 제 어깨에서 옷자락을 확 잡아챘다.
어둠 속에서 희고 매끈한 등이 드러나자 다들 웅성거렸다.
그녀의 등 한가운데는 정말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틴?”
얀은 그녀의 등에 새겨진 문신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곧게 뻗은 척추뼈를 중심으로 양쪽 어깨뼈를 따라 새겨진 철자는 분명히 ‘CRISTINE’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치 날개처럼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
***
얼마 전 크리스틴을 찾아온 앨리라는 여자는 불그레한 얼굴의 집시 노파였다.
이 집시 노파는 문신을 새기는 솜씨가 귀신같아서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단다.
이곳에서 문신을 새기는 것은 대개 노예나 매춘부들이었지만, 전쟁터에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같다고 한다.
싸울 각오를 다지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 형제의 이름을 몸에 새기거나, 전사하게 되면 제 시신을 어떻게 수습해달라는 문구를 새기기도 했으니까. 병사들에겐 그만큼 절박하고 비장한 표현이었다.
크리스틴은 그래서 앨리를 수소문한 것이다. 그녀라면 지우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아델의 문신을 들여다보던 앨리는 고개를 저었다.
“워낙 깊이 새겨져서 지우기 어렵겠습니다.”
“그럼 다른 거로 바꾸는 건 가능할까요?”
아델의 물음에 앨리가 의아해했다.
“바꾸다니요?”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더니 아델의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넣었다.
ST라는 철자 양옆으로 세 개씩 철자를 덧붙이니 ‘CRISTINE’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척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야?”
아델은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이야. 지금 당장.”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본 후에…….”
“크리스, 난 하루라도 빨리 이걸 없애고 싶어. 이제 이건 놈이 아닌 네 이름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번엔 내 의지로 하는 일이야.”
“정말 고집불통 같으니!”
크리스틴이 혀를 차자 아델은 결연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지금 전쟁터의 병사만큼이나 절박해.”
결국 크리스틴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지?”
얀의 물음에 아델은 경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가늘게 웃었다.
“이래도 스톤, 저자가 지어낸 말을 믿으십니까?”
스톤이 큰소리치던 증거가 거짓으로 드러나자, 그가 했던 말도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이었으니 아무리 황제라도 스톤의 편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아델은 담담한 표정으로 슈미즈를 끌어올려 입고 근위대 사이를 뚫고 걸어갔다.
당황한 얀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근위대도 더이상 막지 않고 길을 터주었다.
“아가씨!”
울면서 보고만 있던 타냐가 얼른 아델의 드레스와 케이프를 주워서 따라갔다.
아델은 그런 상황 따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얇은 슈미즈 차림 그대로 바쁘게 황궁 숲을 향해 걸어갈 뿐.
“그를…… 찾아야 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크리스틴이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왠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이 추운 날씨에 그러다 얼어 죽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멀리서 늑대들의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황궁 숲 안쪽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스스스……!
마른 풀과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무언가 무리 지어 일제히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정체는…….
“늑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폐하를 보호하라!”
근위대들은 칼을 뽑아 들고 얀을 호위하며 에워쌌다.
곧이어 수십 마리의 늑대 무리가 숲 안쪽에서 새까맣게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것은 그 늑대 무리의 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였을까? 마치 그가 늑대들을 거느린 것처럼 보였다.
숲을 향해 걸어가던 아델은 그 남자와 마주치자 우뚝 멈춰 섰다.
“크리스……?”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초록빛 눈동자가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한편 얇은 슈미즈 차림의 그녀를 본 크리스틴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접혔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케이프를 벗어 아델을 감싸주었다.
그동안에도 아델은 믿기지 않아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크리스…… 정말 당신이야……?”
“응.”
“하아……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어디 다친 데 없고?”
“응.”
“정말 다행이야…….”
아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울음을 삼켰다. 그녀의 어깨가 흐느끼듯 파르르 떨렸다. 그런 아델을 보듬어 안으며 그가 아이를 달래듯 조용히 속삭였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잠시 물러나 줄 수 있지?”
“으응…….”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고마워.”
하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크리스틴은 얀과 스톤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부드럽고 자상하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한껏 탁하게 가라앉은 청회색 눈동자는 마치 굶주린 맹수 같았다. 그대로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처럼 거칠고 사나운 기세였다. 그를 호위하듯 따르는 수십 마리의 늑대들로 인해 그 위압감이 더해졌다.
“제 약혼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폐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얀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오해 말게. 자네가 잘못된 줄 알고 몇 가지 묻던 중이었네. 아델 양이 좀 흥분을 했던 것 같군.”
얀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놈이 얼마나 끔찍하고 엄청난 상대였는지를!
“그렇습니까? 제 눈엔 여러 사람이 그녀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던데. 게다가 후작과도 꽤 친밀해 보이시고요.”
얀은 겁이 나서 뼛속까지 떨리는 것 같았다.
혹시 스톤과 손잡은 걸 눈치챘을까?
하지만 한껏 황제의 위엄을 갖춘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한 일. 후작은 대회의 우승자가 아닌가?”
크리스틴은 비아냥거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자라……. 하긴 협잡도 승부의 방법이긴 하지요.”
“뭐라, 협잡?”
얀의 노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크리스틴은 그대로 스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늑대들이 주춤하며 물러난 것이다.
‘역시!’
크리스틴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늑대들은 늑대의 일족에게 본능적으로 복종했다. 그러니 스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역시 늑대의 일족이라는 뜻.
물론 크리스틴과 스톤의 서열이 확실해진다면 늑대들은 우위를 차지하는 쪽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늑대의 계곡에 출현했던 갈색 늑대는 스톤이 확실해졌다. 갑작스러운 일족의 출현에 당황했던 크리스틴은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그대로 공격을 받아 계곡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떨어지는 순간 몸을 날려 충격을 최소화했지만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삐잇!”
스톤의 정체를 확인한 크리스틴은 입술에 손가락을 넣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늑대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황궁 숲으로 돌아가 버렸다. 야생의 맹수들이 마치 훈련받은 군견들 같았다.
한편, 그 모습을 본 스톤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평범한 사람이 야생의 늑대들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설마 놈도……?’
스톤의 눈에도 의혹이 가득 들어찼다.
분명 크리스틴을 늑대의 계곡 아래로 집어 던졌다. 스톤의 부름에 모여든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쓰러져 있던 놈에게 달려드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제아무리 전쟁터의 영웅이라도 사람이라면 살아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놈은 멀쩡한 데다가 그 늑대들을 부하처럼 부리고 있지 않은가?
크리스틴이 늑대의 일족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놈이 정말 늑대의 일족이라면……?’
그때 스톤 앞에 멈춰서며 크리스틴이 말했다.
“오늘 승부는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후작 나리.”
“천만에.”
“그럼, 이번엔 제가 반격할 차례군요?”
“뭐?”
크리스틴은 다시 얀을 향해 돌아섰다.
“폐하, 스톤 오스월드를 부친의 살해범으로 고발합니다.”
뜻밖의 말에 얀은 다시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일은 예민한 사안이라 매우 신중해야 하네. 증거가 있나?”
크리스틴은 짐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경기 내내 사라져서 보이지 않던 짐머가 어느새 뒤로 다가왔다. 깊이 후드를 눌러 쓰고 있는 두 사람과 함께였다.
“증인이 있습니다.”
크리스틴의 말에 후드를 쓴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천천히 후드를 벗고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 명은 젊은 여자였고, 또 한 명은 황궁 어의 마빈이었다.
젊은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바네사. 전대 후작님께서 돌아가시던 날까지 오스월드가의 하녀로 일했습니다.”
***
“폐하, 바이스 백작은 약혼녀를 위해 거짓으로 증인들을 매수한 것입니다! 저 얄팍한 수작에 속지 마십시오!”
당황한 스톤은 소리치며 바네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꺅!”
놀란 바네사가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지르자, 어느새 그 앞을 크리스틴이 막아섰다.
“조금 전 후작의 지루한 연극을 보았으니, 이번엔 이쪽에서 준비한 얘기도 참고 들어주시지요. 생각보다 재미있을 겁니다, 후작 나리.”
그 비아냥거리는 표정에 스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리스틴과 스톤.
그들은 금방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처럼 어깨를 마주하고 노려보았다.
얀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러다 자칫 둘이 맞붙기라도 하는 날에는 꽤 골치 아파질 것이다.
“둘 다 뒤로 세 발씩 물러서게.”
얀은 아직 크리스틴의 손을 놓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늘 일로 더 확실해진 것은 언젠가 반드시 놈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목을 물어뜯고도 남으리라.
“바네사는 계속 말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네사는 스톤을 노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그를 확실하게 가리켰다.
“전대 후작님을 살해한 것은 스톤 오스월드가 맞습니다!”
얘기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흥미를 갖고 웅성거렸다.
바네사는 스톤의 독오른 눈빛이 두려워서 곁에 있는 크리스틴을 재차 확인했다. 그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걸 보자 다시 용기를 냈다.
“오스월드가 사람들은 어린 새어머니였던 아델 양을 지하실에 가두고 하녀처럼 부려먹었습니다. 하녀들조차 그녀를 지하실 마님이라고 불렀지요. 특히 스톤은 그녀를 가혹하게 부려먹고는 했습니다. 후작님께선 병환이 깊으시니 이 사실을 알지 못했죠.”
뜻밖의 얘기에 수많은 사람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날도 스톤은 밤늦은 시간에 아델 양을 침실로 불렀지요. 그날은 어떻게 아셨는지 후작님께서 제게 스톤의 침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아델 양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중이었지요.”
바네사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얘기했다. 스톤이 거짓으로 아델을 모함했으니 이쪽도 진실만으로 그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크리스틴도 허락한 일이고.
“격노한 후작님께선 스톤에게 유산을 한 푼도 물려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날 아델 양이 후작님께 드리는 차에 독을 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대로 후작님께 차를 드렸고요. 이 모든 일을 지켜봤던 저는 조사관에게 사실을 이야기했지요. 하지만 그들은 한패였고, 저를 납치해서 매음굴에 팔아버렸습니다. 폐하, 스톤 저자는 아비를 죽인 패륜아며, 교활한 악마입니다!”
감정이 격해진 바네사는 스톤을 노려보며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