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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약혼자가 능력자라서 피곤해 (56/155)


56화. 약혼자가 능력자라서 피곤해
2022.08.15.



 


“폐하, 스톤 저자는 아비를 죽인 패륜아며, 교활한 악마입니다!”

바네사의 증언은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아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진 후부터 스톤은 신뢰를 잃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여론은 아델 쪽으로 기울었다.


“하긴, 오스월드가처럼 콧대 높은 귀족들이 어린 새어머니를 어떻게 대했을지 뻔하죠.”

“내 말이요. 그리고 어떤 바보가 독을 탄 차를 제 손으로 직접 건네겠어요?”

“아델 양은 정말 억울한 누명을 썼던 거네요.”

사람들은 서서히 아델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증언은 다 끝난 건가?”

얀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 한 사람의 증언이 더 남았습니다.”

크리스틴의 말에 얀은 마빈을 응시했다.


“저자는 황궁의 어의가 아닌가?”

마빈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며 스톤과 크리스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어떤 죽을죄를 지었나?”

얀은 저도 모르게 스톤을 한번 노려보았다. 크리스틴의 대항마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이건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역시 놈의 상대로는 역부족인가?

계속 손을 잡고 가야 하나?

그가 다시 복잡하게 계산을 하는 동안 마빈은 자신의 죄를 고했다.


“사실 저는 노름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월드가에서 그 빚을 해결해주겠다며 접근해왔습니다.”

“감히 황궁의 어의를 매수하려 했다는 것인가? 그 대가로 무얼 원했지?”

얀의 호통에 마빈은 흐느끼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제가 아델 양의 주치의라는 걸 알고, 그녀에게 해가 되는 약을 처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오나 저는 생명을 다루는 자! 그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고민 끝에 이렇게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으흑!”

한편, 관중석에서 이 상황을 구경하던 세이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부채를 움켜쥔 손은 눈에 띌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저 배신자 놈을!’

크리스틴은 보란 듯 황제에게 말했다.


“오스월드가가 어의의 빚보증을 서주었다는 건 이미 사채 업자들에게 확인했습니다. 만일 아델을 해치려고 매수한 게 아니라면, 그들이 왜 어의의 빚보증을 서주었겠습니까?”

다급해진 세이라는 결국 관중석에서 뛰어나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새어머니였던 아델 양을 잘 봐달라고 부탁한 대가였습니다, 폐하.”

“풉!”

크리스틴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세이라를 향해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개도 안 믿을 소리 집어치우시지.”

“백작은 말을 가려 하라!”

황제가 나무랐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이었으니까. 그리고 다들 오스월드가 보다 아델을 믿는 눈치였다.

이대로라면 오스월드가를 위해서라도 이 일은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좋았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쓰던 얀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전대 오스월드 후작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잘잘못을 가릴 수 없네.”

“폐하, 확실한 증인이 있습니다!”

크리스틴이 반발하며 소리치자 얀은 고개를 저었다.


“증인만으론 죄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네. 증거 부족으로 아델 양을 처형하지 못했던 것처럼, 스톤 역시 확실한 증거를 찾기 전엔 처형할 수가 없네. 이 사건은 조사관을 파견하여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하지. 그 후 재판으로 잘잘못을 가리도록 할 것이고.”

잠시 말을 멈췄던 얀은 꿇어 앉아있는 마빈을 바라보았다.


“또한, 마빈 경은 오늘부로 황궁 어의 직을 박탈한다. 하니, 이 일은 여기서 접고 다들 나머지 예정된 일정을 진행하도록 하라!”

선언하듯 말을 마친 그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황후와 에이프릴, 그리고 황자가 따랐다.

***



“역시 오스월드가를 상대하긴 쉽지 않군요.”

짐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카드를 내민 만큼 조금은 승산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힘없는 마빈만 처벌을 받았을 뿐이었다.

짐머가 다 힘이 빠지는데 크리스틴은 오죽할까?

그러나 크리스틴의 반응은 예상외로 담담했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짐머의 경험상 그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일 때가 제일 무서웠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 아델의 억울함을 풀었으면 됐다.”

그런 속셈이었던 건가?


“예, 그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 아델을 희대의 악녀 취급하던 사람들이 이제 오스월드가를 입에 올리며 혀를 찼다.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도 연민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크리스틴이 원한 것도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저 그럼…… 약속대로 제 가족들은 이제 그만…….”

그때 마빈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증언하기 전까지 그의 가족들은 크리스틴이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명목상의 보호일 뿐, 인질이었지만.


“가족들은 모두 내 영지로 보냈네.”

“예에? 아니 그렇게 독단적으로 그런 결정을 하시면…….”

“싫다면 다시 불러와도 되고.”

마빈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크리스틴이 빚을 모두 갚아주었으니 사채 업자들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오스월드가에 단단히 찍힌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자들이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사실은 두려웠다.


“아닙니다! 혹시 저도 백작님의 영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원한다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용서해주시고, 제 가족까지 챙겨주시다니.”

“그러나 두 번의 용서는 없네.”

경고하듯 크리스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아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아니 놈의 거짓말에 속아서 며칠 동안 그녀를 멀리하느라 죽을 고생 한 걸 생각하면……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예, 백작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네사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언젠가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거래였을 뿐이다. 아델에 대해 증언을 해준 거로 충분해.”

저만치 다가오는 아델을 돌아보며 바네사가 엷게 웃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어요. 저렇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처음이라. 저도 언젠가는 저런 표정으로 살 수 있겠죠?”

“그러길 기원하지.”

“저도 두 분의 행복을 기원할게요.”

두 사람은 짐머의 안내를 받아 물러났다.

***



“크리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델이 다가왔다. 드레스와 겉옷을 다시 챙겨 입은 그녀는 크리스틴이 걸쳐주었던 케이프를 그에게 도로 입혀 주었다.


“난 괜찮은데.”

“안 돼. 추워.”

그러면서 꼼꼼하게 앞을 여며주기까지 했다. 이럴 땐 연인이 아니라 꼭 보호자 같았다. 크리스틴으로선 이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그녀의 보호를 받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으니까.


“미안해. 당신이 오스월드가에서 겪은 끔찍한 일을 어쩔 수 없이 공개했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텐데.”

“내 억울함을 풀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

“천만에. 날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날 구원해줘서…….”

그를 올려다보던 초록빛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지더니, 아델은 그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악녀라는 소문 따위 신경 안 쓴다고, 괜찮다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마다 수없이 상처받고 아팠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늘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포장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결백이 밝혀지고 나니 그동안의 서러움이 왈칵 밀려왔다. 수많은 감정이 눈물과 함께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말없이 긴 팔로 보듬어 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이 어떤 위로보다 더 위로가 되었다.


“다행이다. 진짜.”

크리스틴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렇게 기대어 울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서.

그 눈물을 위로해주고, 더이상 아파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래, 그동안 이걸 원했었나 보다.

이렇게 네가 온전히 나의 것이기를.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아델은 크리스틴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다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잔뜩 울어서 젖은 눈을 하고선 장난스럽게 콧등을 찡그렸다. 아마도 조금 민망했던 모양이다.


“무슨 말이지?”

“악녀라는 이미지를 벗은 건 좋은데, 덕분에 나쁜 짓은 못 하게 생겼으니까.”

“뭐?”

“악녀라고 손가락질받을 땐 이미지에 신경을 안 써도 되니까 좋았는데. 좀 아쉽게 됐네.”

“하, 점점.”

어이없어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이 능청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약혼자가 너무 능력자인 것도 좀 피곤한 것 같아.”

“맞아. 약혼자가 능력자면 참 피곤한 일이지.”

나직하고 은밀한 그의 목소리에 아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야릇한 표정이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짐승 같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잘 알았다.

꿀꺽.


“무, 무섭게 눈이 왜 그렇게 게슴츠레해져?”

아델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는 그만큼 더 바싹 다가들더니 팔을 뻗어 아델의 허리를 휘감았다.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그의 품 안에 갇혀버렸다.


“당신의 약혼자가 얼마나 능력자인지 보여주려고.”

야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아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겁이 나서였는지, 어떤 기대감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렸다.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사양할게. 당신 오늘 엄청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는 게 어때?”

“당신하고 한 침대에 있는 게 쉬는 거지. 나의 능력도 보여주고.”

“미쳤어.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소릴……!”

아델이 민망해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상관없어.”

그는 오히려 아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녀를 안은 채로 경기장을 지나 관중석의 인파를 뚫고 걸어갔다.

구름처럼 몰려있던 사람들이 그의 기세에 얼른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휘파람을 불며 응원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부러워하며 야유했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은 혀를 차며 수군거렸지만.

하지만 다들 이 젊은 연인들을 부러워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델은 부끄러워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그가 안전한 요새 같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라면 그 무엇도 자신을 헤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들 앞에 스톤이 다가온 것이다.

아델은 얼른 크리스틴의 품에서 내려와 스톤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일은 몰라도 스톤과의 일은 그에게만 맡기고 싶지 않았다. 물론 크리스틴이 든든하게 곁에 있어 주었기에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그런데 지금 스톤의 용건은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승부는 즐거웠소, 백작.”

그는 크리스틴에게 정중히 말했다. 파란 눈동자가 금속처럼 날카로웠다.


“그리 생각하셨다면 다행이군요.”

크리스틴도 칼날처럼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운 눈으로 응수했다.


“앞으로의 싸움도 몹시 기대가 되오.”

크리스틴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쳤다.


“그냥 곱게 물러나시지요, 후작님. 저는 괜한 허세로 덤비는 상대를 잘근잘근 짓밟아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스톤도 고개를 치켜들며 크게 웃었다.


“나는 살아서 펄떡이는 사냥감을 아주 좋아한다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찾아서 지금 피가 아주 뜨겁게 끓어오르거든. 그런 의미에서 백작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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