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은빛 늑대를 미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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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은빛 늑대를 미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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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은빛 늑대를 미워하지 마
2022.08.19.
크리스틴과 스톤은 사이좋게 웃었지만, 그사이에 끼어 있는 아델은 양쪽에서 뿜어내는 살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칼을 맞대고 서로 찌를 순간을 살피는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먼저 그 칼을 거둔 것은 스톤이었다. 아니, 그 칼날을 아델에게 겨눴다고 해야 옳았다.
“뭐, 당분간 잘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아델은 섬뜩해서 소름이 끼쳤다. 오래전 오스월드가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사냥이 취미였던 스톤은 야생의 짐승들을 잡아다 다리에 긴 줄을 매단 채 풀어놓고는 했었다. 그러면 짐승들은 전력을 다해 달아났다.
하지만 그가 줄을 당기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그때마다 짐승들은 달아나기 위해 다리에 피가 나도록 저항했다. 그러다 탈진하고 체념하며 얌전해지면 그는 다시 짐승들을 가둬둔 케이지의 문을 열고 풀어주었다.
그리고 줄을 당기길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아델 난 말이지, 희망으로 반짝이던 놈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꺼멓게 죽어가는 그 참담한 표정이 정말 좋아. 소름 끼치도록 희열을 느껴.”
지금 스톤의 표정이 그 말을 할 때와 똑같았다.
아델은 활짝 열린 케이지 속에 갇힌 사냥감이 된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의 발목에 어떤 줄이라도 채워둔 것 같은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절대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그러게. 오늘은 진짜 제대로 한 방 먹었군. 당분간 두 사람 덕에 정말 즐겁겠어.”
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웃더니, 아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참, 이걸 알려준다는 걸 깜빡했어. 네 어머니를 해친 그 은빛 늑대는 말이지, 아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몰라.”
은빛 늑대라고?
아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리스틴을 힐끗 쳐다보며 그는 더 작게 귓가에 속삭였다.
“궁금하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나의 아델.”
순간 아델은 놈의 술수에 넘어갈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꺼져. 스톤 오스월드!”
“그럼 오늘은 착하게 꺼져 드리지. 다음을 기약하며.”
정중하게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한 그는 빙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델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저자의 교활함에 또 말려들 뻔했어. 은빛 늑대라니…….”
“정말 은빛 늑대를 만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무거웠지만, 스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느라 아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떡하긴. 잡으면 죽여야지. 사람들에게 너무 위험하잖아.”
“은빛 늑대에게도 사람들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
크리스틴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긴 늑대에겐 사냥이 생존이었을지 모르지…….”
그러다 아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이유 따위 생각 안 할래. 엄마를 그렇게 만든 놈은 누가 뭐래도 용서할 수 없어.”
“은빛 늑대가 그랬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왠지 은빛 늑대를 편드는 것처럼 보여.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늑대들은 어떻게 된 거야?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이던데.”
조금 전 크리스틴이 늑대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게 떠올랐다.
수많은 늑대 속에서 위화감 없이 어울리던 그가 한순간 늑대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게다가 야생의 그 짐승들은 그의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명령에 순종했다.
“그건…… 전쟁터에서 늑대들을 훈련 시켜 본 경험이 있어서 그랬어.”
크리스틴은 얼른 둘러댔다.
“그게 가능하다고?”
“병사들이 부족할 땐 짐승들도 훌륭한 전력이 되니까.”
아델은 수긍이 안 됐지만, 크리스틴이 하는 말이었으니 믿기로 했다.
“그러니까 늑대들을 너무 미워하지마, 아델.”
그가 아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애교스럽게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은빛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이자 아델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듯 어루만졌다. 그게 좋았는지 그는 얌전히 있었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덩치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아델도 좋았다.
“늑대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야. 은빛 늑대만 미울 뿐이지.”
“역시…… 그렇겠지?”
“응?”
“그만 가자.”
아델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더니, 그는 어느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뭐지, 왠지 차가워진 것 같은데?’
그의 뒤를 쫓아가며 아델이 물었다.
“설마 화났어?”
“아니.”
“근데 왜 그렇게 걸음이 빨라?”
“마음이 급하니까.”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퍼엉!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까만 밤하늘 높이 불꽃이 쏘아져 올라왔다.
기다리던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에 나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언제 차가웠냐는 듯 그는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델은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새침한 얼굴이 되었다.
“그건 안 봐도 괜찮은데요.”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늘은 좀 색다른 장소로 가볼까 하는데.”
“색다른 장소라니?”
“황궁 서고의 종탑. 거긴 조용하고, 불꽃놀이도 잘 보일 테니 내 능력을 보여주기엔 최적의 장소지.”
황궁 서고의 종탑은 황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어서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미쳤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아델이 화들짝 놀라자, 오히려 크리스틴은 그녀의 하얀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정색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지?”
“어?”
“난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에 높은 장소에 올라가서 보자는 얘기였는데.”
아델은 그에게 놀아났다는 기분에 발끈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준다며?”
“당연하지. 거긴 아무나 못 드나드는 곳이야. 나 정도 유능한 근위대장이 아니면 통과가 안 되지.”
“아, 그러세요? 불꽃놀이 외에 다른 목적은 없으시다? 나만 쓰레기다?”
크리스틴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글쎄, 내 약혼녀가 원한다면 다른 목적을 가져볼 수도.”
“어머, 뭐래?”
“그보다 빨리 안 가면 불꽃놀이가 끝날 것 같은데?”
크리스틴이 손을 내밀자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기면서도 그 손을 잡았다.
“뛰어, 아델!”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며 그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델도 지지 않겠다는 듯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쫓아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로지 크리스틴과 자신,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서늘함은 그저 착각이었겠지?
스톤이 얘기한 은빛 늑대도 그저 미끼에 불과했겠지?
아델은 지금 다른 생각 따윈 잊기로 했다.
이 행복을 만끽하기에도 모자랐으니까.
***
“이제 그만 놔줘, 크리스.”
“조금만 더 참아.”
“바보야, 내가 아니라 당신이 힘들까 봐 그래.”
“하나도 안 힘들어.”
“진짜 고집불통은 당신인 거 알아?”
아델은 크리스틴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주며 나무랐다.
그녀의 뛰는 속도가 답답했는지 그는 결국 아델을 안은 채 종탑까지 달려온 것이다. 게다가 나선형으로 수없이 이어진 계단을 쉬지도 않고 뛰어 올라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아델은 안겨 있는 것만으로 아찔한 현기증이 났다. 날개 달린 말을 타면 이런 기분일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가 전쟁터에서 살았다고 해도 이건 도저히 사람이 낼 수 있는 속도와 체력이 아니었다. 하긴, 어려서부터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민첩하고 힘이 세긴 했었지.
“자, 여기가 좋겠다.”
그가 아델을 내려준 곳은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이 있는 계단참이었다.
종탑의 중간쯤 높이였는데도 나선형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크리스틴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퍼엉!
하늘 높이 쏘아 올라간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며 화려하게 피어났다.
엄청난 크기의 불꽃이 눈앞으로 달려드는 아찔함에 아델은 함성과 비명을 동시에 질렀다.
“아앗! 아…… 와!”
옆에서 크리스틴이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 쿡쿡거렸다.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자꾸 그러지 마. 더 귀여운 척하고 싶어지니까.”
“내 앞에선 얼마든지.”
그가 아델을 감싸듯 뒤에서 끌어안았다. 등에 닿는 그의 가슴이 굳건한 성벽처럼 단단해서 아델은 마음이 놓였다.
“정말 예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불꽃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좋아?”
“사실 불꽃놀이를 처음 보거든.”
해마다 승마경기의 마지막은 불꽃놀이로 끝났다. 칼라임의 시민들 절반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황궁 주변으로 모여들고는 했다.
매번 미아와 타냐가 함께 구경하러 가자며 권했지만 아델은 거절했다. 집 밖을 나오기가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를 악녀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응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이제 크리스틴이 함께였다.
안전한 요새 같고 든든한 성벽 같은 남자.
“진짜 행복하다…….”
퍼엉! 퍼엉!
커다란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며 아델의 얼굴을 비추었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인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눈부신 불꽃이 명멸했다.
살다 보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기억의 책장 속에 고이 넣어두고 싶은, 힘들거나 지쳤을 때 펼쳐 보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하는 그런 순간들.
어쩌면 그건 삶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크리스틴에겐 그 모든 행복한 순간 속에 아델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퍼어어엉!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큰 불꽃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불씨 하나하나가 또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며 수백 개의 꽃이 찬란하게 피어났다.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아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불꽃놀이는 모두 끝나버렸다.
화려한 놀이가 끝난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서늘한 바람 소리와, 더 짙어진 어둠이 밤하늘을 채웠다.
크리스틴도 미련 없이 창문을 닫았다.
하지만 아델은 여전히 창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 끝났어, 아델.”
아델이 붉어진 눈시울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
놀라서 묻는 그에게 그녀는 민망해서 웃었다.
“모르겠어. 축제의 끝은 참 쓸쓸한 것 같아.”
“그러게. 하지만 우리의 축제는 아직 안 끝났는데.”
아델의 초록빛 눈동자 속에서 그는 교활한 짐승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격정이 몰려와서 아델은 발끝을 들어 올리고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두 입술이 익숙하게 서로를 찾아 들었다.
아델은 마음속으로 빌고 또 밀었다.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짧은 축제 같은 것이 아니기를.
하루하루가 화려한 축제처럼 행복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
“으읏, 살살…… 좀 벗겨…….”
“엄살 부리지 말고 그것도 마저 벗어.”
“와, 야한 여자. 어떻게 그런 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잘도 하지?”
“어머 그래? 빨리 안 벗으면 벗겨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
그러면서 아델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가들자, 크리스틴은 지레 겁먹은 척하며 움찔 물러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원한다면 벗어주지.”
그러고는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단추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탄탄한 가슴과 잘 짜인 복근이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아델은 조금 민망해져서 들고 있던 크리스틴의 겉옷을 괜히 터는 시늉을 했다. 볼 때마다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완벽한 몸이었다.
“자, 이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크리스틴은 벗은 셔츠를 소파에 던지며 아델의 처분만 바란다는 듯 웃었다. 조각 같은 상체를 완전히 드러낸 그의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도록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놀라서 인상을 쓰며 다가들다가 결국 화를 냈다.
“못 살아. 지금 이런 상태로 장난칠 때야? 얼른 소파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