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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조금 있다가 재워줄게 (58/155)


58화. 조금 있다가 재워줄게
2022.08.22.



 


“자, 이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크리스틴은 벗은 셔츠를 소파에 던지며 아델의 처분만 바란다는 듯 웃었다. 조각 같은 상체를 완전히 드러낸 그의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도록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놀라서 인상을 쓰며 다가들다가 결국 화를 냈다.


“못 살아. 지금 이런 상태로 장난칠 때야? 얼른 소파에 앉아!”

“아, 오늘은 소파에서 하고 싶…….”

그러다 아델의 서늘한 눈과 마주친 크리스틴은 쳇, 투덜거리며 보라색 비로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옆에 아델이 약상자를 갖고 앉았다.


“정말 당신 때문에 못 살겠다. 이렇게 다치고도 그런 장난이 나오니?”

셔츠를 벗은 크리스틴의 왼쪽 어깨는 천으로 대충 감겨 있었다. 하지만 계속 피가 흘렀는지 천이 온통 축축하게 피를 머금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니까.”

크리스틴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종탑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까는 그녀와 키스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상처를 숨기는 걸 깜박했다. 케이프를 벗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아델을 눕히려는 순간 그녀가 어깨에 묻은 피를 본 것이다. 케이프에 가려져서 그의 상처를 알아채지 못했던 아델은 금방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얼마다 다친 거냐? 왜 말 안 했느냐 등등…….

뜨겁던 연인은 금방 보호자의 모드가 되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급기야 그를 끌고 종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이 아무리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마블 궁에 도착한 아델은 핸리에게 주치의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런 아델을 크리스틴은 간신히 막았다. 당신이 아니면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면서.


“으, 아프겠다.”

아델은 그의 상처를 싸맨 천을 조심스럽게 풀며 혀를 찼다.

피를 흠뻑 머금은 천은 그녀가 만질 때마다 흥건하게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정말 늑대의 계곡에 떨어진 거야? 거기에 떨어지면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늑대의 계곡은 경사가 가파르고 거친 바위로 가득해서 꽤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황궁 숲에서 쫓겨난 맹수들이 그곳에 무리 지어 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지 뭐.”

“설마 스톤이 그런 건…… 아니지?”

“하, 스톤 따위가 날? 말이 갑자기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크리스틴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사실 스톤이 갑자기 늑대로 변하지 않았다면 절대 당할 리 없었다. 뜻밖에 마주친 자신의 일족을 보고 넋을 놓은 틈에 당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스톤의 출현으로 걱정하는 아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런데 당신의 말은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놈은 중심을 잡았지만 나는 방심하다가 굴러떨어졌지 뭐. 의리 없는 짐승 놈이지.”

“정말이야?”

아델의 초록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조금의 거짓이라도 잡아내겠다는 것처럼.


“그럼. 내가 뭐하러 거짓말하겠어?”

“이렇게 다친 것도 숨겼잖아.”

“이거야 별거 아니었으니까…….”

아델은 다시 한번 그의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깨가 피로 잔뜩 젖은 것에 비해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아 보였다.


“알았어. 그래도 며칠 지켜보다가 안 될 것 같으면 꼭 주치의에게 치료받는 거다?”

상처에 조심스럽게 약을 바른 아델은 꼼꼼하게 감싸고 묶어 주었다.


“아마 며칠이면 다 나을걸.”

늑대 일족인 크리스틴은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사실 처음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였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이면 나을 상처는 아니야.”

아델은 계속 걱정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차가운 계곡에서 굴러떨어지고 이만큼 피를 흘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으니까.

만일 그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건 생각하기도 끔찍해서 울상이 되었다.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엷게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기억나? 목재소 아들놈이랑 싸우고 내 팔이 부러졌을 때.”

어렸을 때 크리스틴은 작고 예쁘장해서 줄곧 사내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었다. 그때도 동네를 주름잡던 덩치 큰 사내아이와 싸움을 하고 팔이 부러져서 나타난 것이다.


“기억나.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무슨 소리야. 내가 더 놀랐다고. 당신이 그놈이랑 싸우겠다고 곡괭이를 들고 목재소로 달려갔잖아. 당신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놈이랑 한바탕할 기세였지.”

아델도 기억이 났는지 쿡쿡거리며 웃었다.


“맞아. 그런데 찾아가 보니 녀석의 상태는 더 심각했지. 목재소 아저씨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진땀 뺐어.”

“맞아. 그랬다고 했어.”

잠시 어렸을 때로 돌아간 듯 두 사람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크리스틴이 물었다.


“그때 정말 놈이랑 싸울 생각이었어?”

아델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랬을걸. 당신이 그렇게 된 걸 보고 이성을 잃었으니까.”

아델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청회색 눈동자가 깊고 고요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이 세상에도 내 편이 있었구나.

그게 이렇게 든든하고 가슴이 가득 찬 기분이구나.

나도 그런 존재가 되어줘야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아델.”

“당신도 내가 누군가에게 당하면 모른 척할 수 없잖아.”

“나랑은 다르잖아.”

“다를 거 없어. 당신에게 내가 소중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내겐 당신이 소중하고 또…… 좋아하니까.”

크리스틴은 인상을 쓰며 앞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나란히 앉은 아델의 뺨을 감쌌다. 신비로운 초록빛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리는 걸 보며 그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그렇게 뜨겁게 고백하면 내가 어떻게 참아.”

“얘기가 또 왜 거기로 튀는 건데?”

당황한 아델이 살며시 그의 손을 치워내려고 했지만,


“당신이 날 먼저 유혹한 거라고.”

그는 오히려 고개를 숙여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내가 언제…….”

아델은 등을 뒤로 젖히며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좋아한다며.”

하지만 크리스틴의 상체가 그만큼 앞으로 더 기울어지며 다시 가까워졌다.


“그게 어떻게 유혹하는 게 돼?”

아델이 억울한 듯 하소연했지만 그는 뻔뻔했다.


“난 유혹당했는걸. 지금 막 가슴이 사납게 뛰고 피가 뜨거워졌으니까.”

“바보. 그렇게 다쳐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소파의 등받이와 바닥을 양손으로 짚은 그는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얼굴이 가까워졌다.


“팔을 다쳤지 다른 데는 멀쩡하거든.”

“이 짐승…….”

“얼굴을 그렇게 붉히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아델의 얼굴을 간질였다.


“붉어지긴 누가…… 벽난로 열기 때문에…….”

점점 뒤로 몸을 기울이던 아델은 급기야 소파 팔걸이에 머리가 닿으며 자연스럽게 누워버렸다.


“핫……!”

낭패스러워서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보며 그는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아델의 손을 감싸 쥐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느껴져?”

 

 
손바닥에 닿는 탄탄한 살갗 아래로 우렁찬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아델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부끄러움과 야릇한 기대감…….


“으응…….”

그것이 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리스틴의 입술이 그대로 내려왔다.

꼼짝없이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아델은 가슴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하지만 금방 달큼한 숨결에 이성이 녹아들고 열이 오른 몸에 스르르 힘이 빠져갔다.

눈치 빠른 크리스틴의 움직임이 좀 더 은밀해졌다. 단단한 무릎을 자연스럽게 아델의 양쪽 허리 아래에 내려 꼼짝없이 가둬버
리고는,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서 어깨로, 쇄골로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헤집고 천천히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크리스……. 당신, 어깨…….”

“쉿! 아픈 건 나중에.”

그의 입술과 손이 집요하고도 쉴 새 없이 아델의 몸을 맛보고 어루만졌다.


“진짜 야해…….”

열기로 달아오른 눈꼬리로 살며시 흘기며 아델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이번엔 먼저 입술을 찾아서 키스했다.

뜨거운 숨결이 얽히고 호흡이 뒤섞이며 아델의 얼굴이 홍조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싱그럽던 초록 눈동자는 점점 몽롱하고 야릇하게 풀어져 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크리스틴이 그녀의 드레스를 거칠게 벗겨버렸다.

***

아델은 침대 위로 풀썩 고꾸라졌다.

아릿한 격통과 나른함이 밀려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도 크리스틴의 커다란 손이 땀으로 진득하게 젖은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느낌이 기분 좋아서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자. 재워줄게.”

흐릿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이라도 재우듯 등을 토닥여 주는 그 다정한 손길도.

아델은 잠이 쏟아지는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 침 흘리고 보면서 자라고?”

“보였어?”

장난삼아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이었나?

사실은 침대 주변에 촛불을 모두 꺼 놓아서 아델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크리스틴은 사랑을 나눌 때면 꼭 주변의 불을 모두 꺼 놓았다. 아델이 부끄러울까 봐 배려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녀로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사랑을 나눌 때 그의 모습이나 표정이 궁금했으니까.


“……꼭 봐야 아나?”

“그럼 지금은 어떤 표정인지도 알겠네?”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끈적해서 아델은 괜히 긴장됐다.


“아니, 이젠 몰라.”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웃음소리.

초옥.

그는 아델의 등에 입을 맞추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그 자리.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도 크리스틴은 계속 그곳을 어루만지고 입을 맞춰주었었다. 그녀가 아플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문신을 새길 때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더 아픈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쓴 채 주먹을 부르르 떨고는 했었다.


“아직도 아파?”

“이젠 안 아파.”

“다행이군.”

아델은 몸을 돌려 크리스틴과 마주 보고 누웠다.


“크리스. 난, 이 문신이 참 좋아. 당신 이름이니까. 당신을 내가 가진 거니까.”

아델은 스톤의 머리글자가 완벽하게 그의 이름으로 지워진 것이 흡족했다. 그러니 그날의 고통 따윈 잊었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델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얼마나 깊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나도 여기다 새길까? 당신 이름. 그러면 나도 당신을 갖는 거니까.”

그는 아델의 손을 잡아 탄탄한 자신의 왼쪽 가슴을 만지게 하며 웃었다. 사랑을 나눌 때면 유독 펄떡이며 살아 날뛰는 심장이 자리한 곳.


“됐어. 그런 거 없어도 난 당신 거야.”

땀이 배어 나온 그의 가슴과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아델은 사르르 눈매를 휘었다.

조금은 흐트러지고, 조금은 무방비한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얼마나 유혹적인지 몰랐다.


“역시 안 되겠다, 아델.”

“뭐가…….”

그러면서도 아델은 긴장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감했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재워줄게.”

끈적한 속삭임이 귀를 간질이자 아델은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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