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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스톤의 도발 (60/155)


60화. 스톤의 도발
2022.08.29.



 
벌컥!

짐머가 급하게 식당 문을 열고 뛰어들어 왔다.

그는 아델에게 간단히 묵례하고 얼른 크리스틴에게 보고했다. 그녀가 들으면 안 될 내용인지 귓속말로 나직하게 속삭였는데, 보고를 듣던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미안. 먼저 좀 일어날게.”

그는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짐머가 재빨리 벽에 걸린 겉옷과 레이피어를 챙겼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봐.”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아델은 묻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하는 일의 특성상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기밀들이 많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 절대 밖에 나오지 마.”

식당 문까지 따라와 배웅하는 아델에게 크리스틴이 엄숙하게 말했다.


“알았지.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그는 재차 당부했다.


“여기서?”

“음. 내가 사람을 보낼 때까지 여기서.”

그렇게 신신당부를 한 후 크리스틴은 내달리듯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를 짐머와 몇 명의 근위대들이 분주하게 쫓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델은 불안한 기분으로 창가를 서성였다. 그러다 호숫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은 제복의 근위대들이 빙 둘러서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가?’

잠시 후 타냐와 몇 명의 하녀들이 식탁을 정리하러 들어왔다.


“타냐.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글쎄요. 호숫가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거 같아요.”

“물에 빠진 시체인가…….”

아델이 다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는데 하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짐승에게 당한 시체라던데요.”

굳어진 표정으로 아델이 돌아보았다.


“자세히 좀 말해줄래?”

하녀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짐승에게 마구 찢겨 죽은 시체라고 들었어요. 얼마 전에 죽은 경비병과 비슷한…….”

그러자 다른 하녀도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도 조금 전 들었어요. 은빛 늑대에게 죽었다던 그 시체랑 똑같았다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은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



“이십 보 이내 아무도 접근 못 하도록 금지해.”

“예, 대장님!”

“시신은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빨리 수습해서 검시관에게 넘기고.”

“예, 대장님!”

“그리고 다섯 명씩 조를 짜서 주변을…….”

사건 현장을 수습하며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리던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젠장……!”

저 멀리서 아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핸리와 타냐가 쫓아왔지만 그녀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근위대들이 재빨리 그녀를 막아섰다.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아델은 그들과 몸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비켜주세요! 제발!”

“대장님의 명령입니다!”

그들이 양팔을 잡고 끌어내려 하자 아델은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제발, 제발 확인할 게 있어요! 부탁해요!”

이 추운 날씨에 외투도 입지 않은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뛰어오다가 넘어졌는지 나풀거리는 시폰 레이스는 찢어져 있었고, 파랗게 얼어 있는 팔뚝엔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흘렀다.


“모두 물러나.”

크리스틴의 명령에 근위대들은 일제히 아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크리스, 사실이야? 저 시체, 은빛 늑대가 그런 거야?”

아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그에게 다가들었다.


“아니. 그냥 들짐승의 짓이야.”

크리스틴은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하지만 아델은 그의 손길을 밀어내며 들것에 실리는 시신에 다가가려고만 했다.


“보게 해줘. 내가 보면 알아.”

그는 벽처럼 아델의 앞을 막아섰다.


“돌아가, 아델. 은빛 늑대 같은 건 없어.”

감정을 감추는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하지만 아델 역시 결연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보겠다고! 보면 알아. 놈의 짓인지 아닌지. 엄마의 그 끔찍한 모습을 꿈속에서 수도 없이 봤어. 그러니까 내가 보면…….”

그때였다. 시신을 덮은 아마포가 바람에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잔혹하게 찢긴 시신이 그대로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

그 순간 아델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숨을 쉬지 못했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 사람처럼 휘청휘청 걸어갔다.


“뭐 해, 빨리 덮어!”

눈치 빠른 짐머가 소리치자 근위대들은 피가 묻은 아마포를 얼른 주워다 덮었다.

하지만 이미 아델은 그 처참한 광경이 선명히 뇌리에 박혀 버렸다.


“아델 오지 마라, 거기 있어!”


“세상에! 어떤 짐승이 이런 짓을…….”

새하얀 눈밭 위를 온통 검붉게 물들인 피…….

 


“어, 엄…… 마……? 엄마…….”

들것에 실려 가는 시신을 정신없이 쫓아가며 아델은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아델, 정신 차려!”

크리스틴이 팔을 잡아챘지만, 그 손을 뿌리치며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봐, 크리스. 엄마가 저기 있어. 엄마야……. 엄마한테 가야 해…… 엄마! 엄마!”

그녀는 목이 쉬도록 쉴 새 없이 엄마를 불러댔다.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엄마가 세상에 전부였던 아이처럼.

다시 십 년 전 그 비극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제발, 아델! 제발!”

크리스틴은 아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놔! 놓으라고! 엄마! 엄마! 아아악! 놔아!”

아델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발버둥 쳤다. 엄마에게 가지 못하게 막는 게 화가 나서 미친 듯이 그를 때리고 할퀴고 발로 찼다. 하지만 그의 팔뚝과 가슴은 단단하게 그녀를 가둔 채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야, 아델. 아니라고!”

크리스틴 역시 아델만큼이나 절박했다. 10년 전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지금 그녀를 놓치면 영영 놓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델의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게 정말 내가 아닌 걸까?’

‘내가 은빛 늑대라는 걸 알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의 엄마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늑대 일족인 나를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까?’

이토록 끔찍한 짐승인 저를…….

결국, 그의 품속에서 아델은 혼절했다.

크리스틴은 재빨리 아델을 안고 마블 궁으로 내달렸다. 발버둥 치는 바람에 그녀의 얇은 드레스가 찢어지고, 넘어져 생긴 상처에서 묻은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젖은 얼굴에 엉망으로 달라붙어서 참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췄다.

불온하고 역겨운 피 냄새…….


 

***



“짐머.”

“예, 단장님.”

“아델을 부탁한다.”

“염려 마십시오.”

짐머에게 아델을 맡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만치 호숫가의 끝에서 스톤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모피가 달린 재킷을 걸치고 실크 해트를 쓰고 단장을 손에 든 그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건 현장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이 사건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뿌드득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이건 분명히 놈의 짓이었다.

얼마 전 황궁에서 죽은 경비병도, 어쩌면 아델의 어머니를 죽인 것까지…….


“와우, 아침부터 끔찍한 일이 있었나 보군.”

스톤은 해맑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침부터 여긴 무슨 일입니까, 후작.”

“어제의 오해를 풀고자 찾았는데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몰랐는데 기자들까지 대동하셨다?”

스톤과 함께 온 사람들은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승냥이 떼처럼 시신과 사건 현장으로 달려들었다. 물론 모두 근위대들에게 잡혀버리고 말았지만.


“우리의 화해현장을 취재하라고 불렀소만.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은빛 늑대의 인기가 더 좋은가 보군.”

“은빛 늑대라니 무슨 말입니까?”

크리스틴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하지만 스톤은 다 안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팔을 쿡 찌르며 웃었다.


“시치미 뗄 생각 말게. 이미 소문이 파다한걸. 은빛 늑대가 황궁 안을 활보하고 다닌다고.”

스톤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만했다.

놈은 그를 도발할 작정인 것이다. 어제 크리스틴이 늑대들을 거느린 걸 보고 그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그가 은빛 늑대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 이렇게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마블 궁 앞에 이토록 끔찍한 시체를 보란 듯 전시해 놓고, 이 모든 일을 은빛 늑대의 짓으로 몰아갈 생각인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한 크리스틴이 본색을 드러내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니 인내심을 발휘해 평정심을 찾아야 했다. 만일 스톤에게 정체를 들킨다면 아델에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으니.


“내 생각엔 모두 후작이 데려온 저 기자 나부랭이들이 만들어낸 얘기 같군요.”

스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오. 사람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으니.”

크리스틴의 입매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겐 황실의 위엄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근위대를 향해 절도 있게 돌아섰다.


“후작과 기자들 모두 체포하라!”

나직하지만 분명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 대장님!”

근위대들이 일사불란하게 스톤과 기자들을 에워쌌다.


“이게 무슨 짓인가! 바이스 백작, 감히 나를!”

근위대의 포승줄에 묶이며 스톤이 소리쳤다.

그에게 다가온 크리스틴이 근엄하게 선언했다.


“저는 황실을 지키는 근위대장으로서 유언비어로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양해 바랍니다, 후작.”

“네놈! 황제 폐하께 네놈의 전횡을 전부 고할 것이다! 네놈이 감히 누굴!”

“끌고 가라!”

“예, 대장님!”

***

그러나…….


“오스월드 후작과 기자들을 풀어주게.”

경비병의 변사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찾은 크리스틴에게 얀이 말했다.

물론 황제의 명령이라도 그는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후작과 기자들은 유언비어로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민심을 어지럽혔습니다. 조사해서 합당한 조치 후에 풀어줄 것입니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사인하던 얀의 손이 멈칫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정을 고스란히 담아 인상을 썼다.


“제정신인가? 오스월드 후작은 귀족회의 일원이야.”

“귀족회의 일원이라도 일은 원칙에 따라 처리합니다, 폐하.”

탁, 소리가 나도록 펜을 내려놓은 얀은 가늘게 웃었다.


“정말 후작의 말이 유언비어가 맞나?”

“제가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얀은 두 손을 깍지끼며 의미심장하게 응시했다.


“시신을 봤네. 자네의 솜씨랑 비슷하더군. 아주 참혹했지.”

“저는 사람을 손대지는 않습니다. 물론 주군의 명령이 있을 때와 전쟁 상황에서는 예외였지만.”

“나를 정말 주군으로 생각하긴 하나?”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늑대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 주인이 딴마음을 품는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요.”

뜨끔해진 얀은 다시 펜을 잡으며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군.”

쾅!

크리스틴은 책상을 짚으며 얀의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이해 안 가십니까? 스톤과 손잡으려면 내 손은 깨끗이 놓으라는 뜻인데?”

“……!”

“몰랐을 것 같습니까? 내 약혼녀를 두고 둘이 무슨 계산을 했는지.”

그는 웃고 있었지만 얀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천천히 숨을 고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날 일로 스톤이 자네를 의심하는 것 같네. 사람이 늑대 무리를 거느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물론 나는 자네의 정체를 숨기려 노력하겠네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는…….”

크리스틴의 정체를 알릴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괜찮겠습니까? 제 정체가 알려지면 전대 황제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알려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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