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젯밤 내 옆에서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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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어젯밤 내 옆에서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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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어젯밤 내 옆에서 잤어?
2022.09.02.
“괜찮겠습니까? 제 정체가 알려지면 전대 황제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알려질 텐데.”
전대 황제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 것.
그건 크리스틴과 얀 사이에 무언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다들 늑대의 공격을 받아 죽은 줄만 알고 있지요. 그런데 황좌를 노린 동생의 계략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군요. 특히 이자벨 부인이나, 로드웰 공작은…….”
이자벨 부인은 전대 황제의 아내였고, 로드웰 공작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만일 전대 황제가 살아 있다면 가장 높은 곳에서 권세를 누렸을 자들.
크리스틴의 위협에 얀은 긴장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으니까.
“내 형님을 해친 건 자네였지, 내가 아닐세. 게다가 늑대 일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누가 자네의 말을 믿겠나?”
“그리고 교황청에서 움직이겠지요.”
교황청이 언급되자 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늑대 일족이 존재한다는 게 알려지면 교황청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존재를 알면서 숨긴 얀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귀족회가 그를 공격해 올 것이고.
최악의 경우 폐위될지도 모를 일.
“그래,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잘 해보자는 거네. 우린 한배를 타고 있으니.”
얀은 다시 나긋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개 같은 너구리 자식!
크리스틴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얀은 당분간 크리스틴과 스톤의 손을 모두 잡고 싶은 것이다. 사이 나쁜 두 사람이 서로 견제하며 싸우면 그 사이에서 그는 안전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걸 잡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리라.
“경비병을 죽인 건 스톤 오스월드입니다.”
얀이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응시한 채로 크리스틴이 말했다.
“아니, 그건 분명 짐승의 짓…….”
“해답은 폐하께서 찾으십시오. 그럼.”
그는 결국 얀의 손을 잡지 않고 물러났다.
***
바쁜 일을 서둘러 마무리한 크리스틴이 마블 궁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하루종일 아델의 상태가 걱정되어 잠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하지만 궁 안에 들어서는 순간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아델은 오븐 앞에서 정신이 없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느라 통통한 두 볼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는 부엌문 앞에 기대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델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힌 채 분주했지만, 그에겐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고소한 버터와 달큼한 꿀 냄새가 영혼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크리스!”
쿠키가 가득 담긴 오픈 팬을 옮기던 아델이 그를 발견하고 말갛게 웃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 안심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불안해졌다.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던 그녀는 아직도 10년 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날의 끔찍한 공포와 분노가 그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웃는 얼굴이 가짜처럼 보였다.
이 행복한 장면조차 그저 연출된 것 같았다.
‘사실 네 속은 지금쯤 만신창이가 되어 있겠지?’
하지만 도저히 그녀의 아픔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이대로 은빛 늑대에 관한 일 따윈 잊어주기를, 영원히 묻혀 버리기를 바랐다.
“몸은 좀 괜찮아?”
아델은 귀엽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아,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말았어. 사과의 의미로 애플파이와 애플 쿠키를 굽는 중이야.”
“맛있어 보여.”
“다행이다!”
과장되게 기뻐하던 아델이 멈칫했다.
“그런데 설마 아까 날 막느라고 다친 어깨가 더 안 좋아진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황궁 어의가 보더니 며칠은 왼쪽 어깨를 쓰지 말라더군.”
“정말 그 정도야?”
아델은 그를 바라보며 시무룩해졌다.
“정말 그 정도야. 그러니까 아아…….”
조리대 위에 걸터앉으며 그가 입을 벌렸다.
“어?”
“그 쿠키 먹여 달라고. 아아…….”
“저기요, 다친 어깨는 왼쪽인데요. 오른팔은 멀쩡한 거 같은데?”
“왼팔 대신 오른팔을 많이 썼더니 거기까지 아파서.”
“와, 말도 안 돼. 사기야.”
“뭐해, 빨리. 아아…….”
그가 재촉하듯 다시 입을 크게 벌렸다.
아델은 황당해하면서도 쿠키를 입안에 넣어주었다.
“기왕이면 마실 것도.”
“그럼 우유가 좋겠다. 그런데 젖병이 없어서 어쩌지.”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아델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먹여달라는 거 보니까 젖병도 필요할 거 같아서.”
“하!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놀리는 거지?”
“글쎄, 과자를 먹여달라고 떼쓰는 덩치 큰 어린이?”
“아델!”
크리스틴은 과장되게 인상을 쓰며 아델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재빨리 조리대 건너편으로 도망쳤다.
“어깨를 다쳤다더니 멀쩡하기만 하네.”
“참는 거지. 인내심이 많거든.”
그는 다시 조리대를 훌쩍 뛰어넘어 아델을 쫓았다. 그러자 아델도 쪼르르 조리대 아래로 빠져나갔다.
“어머, 그런데 침실에선 왜 그렇게 인내심이 없으실까?”
“미안하지만 부엌에서도 인내심이 없을 거 같은데?”
“꺅!”
아델과 크리스틴은 장난스럽게 쫓고 쫓기며 부엌을 누볐다.
그 바람에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과가 와르르 굴러떨어지고, 자루에 들어 있던 견과와 밀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꿀을 담은 병도 엎어지며 바닥을 끈적하게 적셨다.
부엌이 엉망이 될수록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악……!”
그러다 도망치던 아델의 발이 쭈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아델은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몸을 움츠렸다.
풀썩!
눈을 떠보니 크리스틴의 단단한 품속이었다. 아델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 그가 대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델은 그의 품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며 감탄했다.
“와 진짜 빨라. 어깨도 아프다면서…….”
조금 전 분명히 둘 사이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넘어지는 자신을 어떻게 감싸 안을 수 있었는지 몰랐다.
“위급할 땐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거든.”
우쭐한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은 쿡쿡거렸다.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는데요, 백작님.”
“당신이 조금이라도 다치면 그게 위급상황이지.”
아델은 크리스틴의 위에서 잘생긴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만 곁에 있으면 정말 아무 걱정도 없겠다.”
“이제 알았어?”
자신보다 자신의 아픔을 더 아파해줄 사람.
아무것도 아닌 그녀가 그의 곁에만 있으면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크리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응?”
아델의 깊고 짙은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어떤 예감이 크리스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젯밤 계속 내 옆에서 잤어?”
“그건 왜?”
“자다가 깼는데 당신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런데 그게 꿈이었는지 헷갈리네.”
크리스틴은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급히 처리할 일이 생각나서 잠깐 집무실에 갔었어. 아마 그때였나보다.”
“그랬구나.”
그건 역시 꿈이 아니었던 건가?
그럼 은빛 늑대는?
오늘 경비병이 그렇게 되고 나니 어젯밤 본 것이 현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
‘은빛 늑대가 어떻게 침실에 들어오겠어.’
아델은 은빛 늑대에 관한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미안. 앞으로는 말없이 침실에서 나가지 않을게.”
“아니야, 그보다 아까 죽은 경비병은 어떻게…….”
아델의 말을 자르듯 그가 대답했다.
“그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황궁 경비를 강화했으니 다시 또 그런 끔찍한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계속 신경 쓰이면 보니타 부인을 불러줄까?”
“미아를?”
“그래.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미아가 마블 궁에 와 보고 싶어 했거든.”
“조만간 마차를 보내서 데려오라고 할게.”
“고마워, 크리스.”
“천만에. 그럼 씻고 옷 좀 갈아입을게.”
아델을 대신해 바닥을 뒹군 그는 꿀과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옷과 머리를 털어주며 아델은 놀리듯 웃었다.
“그러게. 인간 파이가 따로 없네. 난 부엌 좀 치워야겠다.”
탁!
그러나 크리스틴이 나가고 부엌문이 닫히자 아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왠지 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얘기가 나올까 봐 얼른 미아의 얘기로 화제를 돌려버린 것이다.
예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그랬다. 오늘 사건도 은빛 늑대의 짓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그녀의 예감으론 놈의 짓이 확실했는데도.
‘내가 쓸데없이 과민한 걸까? 아니면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것도 날 위해서겠지.
너를 믿어야겠지?
***
며칠 후.
“꺅, 아델!”
마블 궁에 들어서자마자 미아는 돌고래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어서 와 미아.”
“정말 네 덕분에 내가 평생 못 누릴 호사를 누린다. 황궁의 티 타임 초대라니.”
오늘을 잔뜩 기대했는지 미아는 평소보다 화장이 더 짙었다. 그리고 주렁주렁 장신구를 매단 것으로 모자라 화려한 깃털이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황궁의 티 타임은 무슨. 그냥 같이 차나 마시자고 부른 건데.”
“아델, 그렇게 말하니까 너 되게 있어 보이는 거 알아? 이런 건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구는 게 마치 평생 황궁에서 산 사람 같아.”
“내가?”
“응,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다. 콧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고생 할까 봐 걱정했거든.”
아델은 자신을 걱정해준 미아가 고마워서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너랑 있을 때가 더 즐거웠어.”
“백작님이랑 있을 때보다 더?”
“응, 그건 아니야.”
미아가 입을 쭉 내밀었다.
“치, 대답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서운하게.”
계속되는 미아의 쾌활한 수다를 들으며 아델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오늘은 타냐도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다. 예전에 셋이 함께 수다를 떨 때처럼.
화려하게 차려진 티 테이블을 보자 미아는 다시 한번 돌고래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마블 궁이었지만 오늘은 응접실 장식과 플레이팅에 훨씬 더 신경을 썼다. 티 테이블에 올려진 디저트도 새벽부터 아델이 직접 만들었다.
하지만 미아는 평소 좋아하던 홍차 대신 신선한 과일 주스를 마시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나, 임신했거든.”
“꺅, 미아! 정말 축하해!”
“꺅! 정말 축하드려요!”
이번엔 아델과 타냐가 돌고래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은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뻤다. 그동안 미아가 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는지 잘 알았으니까.
“얼마 전에 알았어. 사실 두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지 뭐야.”
“가만, 그럼 나는 뭘 해줘야 하지? 원하는 거 말해봐, 미아. 먹고 싶은 거 있어?”
“다른 건 됐고. 우리 아이의 대모가 되어줘.”
“대모라니, 내가……?”
“응, 우리 아이도 너처럼 씩씩하고 굳건하게 컸으면 좋겠어.”
“미아……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훨씬 더 좋은 분을 알아볼게.”
“싫어, 네가 해줘. 남편도 허락했어.”
“잊었어? 난 칼라임의 악녀였다고.”
“사실 난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악녀 소릴 들으면서도 넌 항상 당당하고 용감했으니까.”
타냐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도 경기장에서 당당히 등을 보여주셨을 땐 정말 소름 돋았어요! 스톤의 그 벌레 씹은 표정이라니!”
두 사람의 계속된 칭찬에 아델도 계속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모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아이는 내게도 최고로 소중한 존재가 될 거야. 약속해.”
그러자 미아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들었지? 아가, 네가 딸이면 대모님처럼 예쁘게 태어나고, 아들이면 대모님의 약혼자처럼 멋진 남자로 태어나렴.”
아델도 그녀의 배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야. 더 근사하고 멋진 사람으로 태어나렴. 우리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아델의 축복이 마음에 드는지 미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축복을 해주었다.
“아델, 너도 곧 두 사람을 닮은 예쁜 아기를 가질 거야. 나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만나면 진짜 좋겠다.”
“그러게.”
아델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크리스틴과 자신을 닮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