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지금 당신을 유혹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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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지금 당신을 유혹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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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지금 당신을 유혹하는 거야
2022.09.05.
저녁이 되어 귀가한 크리스틴을 아델이 달려와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밝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조금 전 미아가 다녀갔거든.”
“아, 오늘.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조금 심통 난 표정이었다.
요 며칠 아델은 평소와 똑같아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눈엔 우울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이유가 미아를 만나서라는 건가?
“그녀를 만난 게 그렇게 좋아?”
“설마 질투해?”
“하, 그럴 리가.”
“미아가 임신했대.”
“축하할 일이군.”
“그래서 말인데 시내에 가서 선물이랑 이것저것 사려고. 내일 당신 비번이지, 괜찮으면 함께 갈래?”
아델은 살갑게 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물론 미아의 선물을 산다는 건 구실이었고 그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요새 그는 계속 바빠서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너무 늦게 귀가해서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 시내에 나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함께 쇼핑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서 차를 마시고, 공연을 보고, 공원을 걷는 그런 시간을 원했다.
“어쩌지? 내일은 좀 바쁠 것 같은데.”
아델은 실망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타냐랑 가면 되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당신 너무 과로하는 거 아냐?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자신을 걱정하는 아델이 예쁘고 귀여워서 그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염려 마, 아델.”
“그래도 건강을 좀 생각하면서 일해. 그리고 우리도 이제 아이를 가지려면…….”
“아이?”
크리스틴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 아델은 조금 수줍어졌다.
“응, 미아가 임신했다는 얘길 들으니까 좀 부럽더라. 우리에게도 곧 아이가 찾아오겠지?”
“글쎄.”
아델이 살며시 눈을 흘겼다.
“뭐야, 그 심드렁한 대답은?”
크리스틴은 결국 아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아델, 아이가 그렇게 갖고 싶어?”
“그럼 당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왠지 모를 불안으로 아델의 초록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물론, 나도 원해. 하지만 아이를 갖는 건 천천히 생각해보자. 나는 아직 우리 둘만의 시간을 더 갖고 싶어.”
너무나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그 역시 아이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델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그를 설득했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좋지만 셋이면 더 좋지 않을까. 항상 부러웠거든. 마을 행사가 있으면 시끌벅적하게 몰려다니는 가족들이. 서로 싸우고 흉보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똘똘 뭉쳐서 편들어주는 것도. 난 늘 혼자였고, 엄마는 바쁘셨으니까. 당신도 나만큼 외롭지 않았어?”
“아델.”
“그래서 부모님들이 재혼한다고 하셨을 땐 엄청 기뻤어.”
“기뻤다고?”
크리스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난 끔찍했는데.”
“왜?”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과 남매가 되는 거니까.”
“아……, 정말 그러네.”
그제야 아델이 깨달은 듯 중얼거리자 그는 한심해하며 혀를 찼다.
“그럼 그땐 정말 아무 감정 없었단 말이야?”
“당연하지. 당신은 동생이었을 뿐인데.”
“하, 내 첫 키스까지 빼앗아 놓고?”
“인공호흡이었다니까!”
“무슨 소리. 인공호흡을 가장한 흑심…….”
“모함하지 마!”
아델은 누가 들을세라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크리스틴은 그 손을 떼어내며 놀리듯 목소리를 더 높였다.
“아무 감정 없는 동네 누나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동생에게 그렇게 야하게 키스해 놓고…….”
“이 바보! 거짓말쟁이! 거기서!”
크리스틴이 도망치자 아델은 소리를 지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오늘도 혈기왕성하시네요, 두 분은.”
짐머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타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대로 침실까지 직진하시는 건 아니겠죠?”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진작에 졌네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타냐는 깜짝 놀라 짐머를 바라보았다.
“흠흠!”
눈이 마주치자 짐머도 민망했는지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목덜미까지 발그레했다.
***
크리스틴은 머리끝까지 잠기도록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그는 아델과 함께 있는 시간 외에 이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이렇게 물속에 잠겨 있으면 소리와 냄새에 둔감해져서 긴장이 풀리고 온몸이 나른해졌으니.
우리의 아이라…….
물론 누구보다 절실히 원했다.
더구나 지금은 왕성한 번식기였으니까.
아델을 닮은 초록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귀여울까.
자신을 닮은 남자아이면…… 좀 재미는 없겠지만 그것도 나름의 기대가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야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았다. 작은 꼬맹이들이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거리며 입매가 올라갔다.
‘그런데 만일 그 아이가 늑대의 모습으로 태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는 더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으리라.
더불어 아델은 크리스틴과 그 아이를 미워하고 끔찍해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아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생겨서는 안 될…….
“……!”
크리스틴은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촤아악!
“깜짝이야!”
아델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물속에 있느라 그녀가 욕실에 들어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방심하고 늑대로 변하기라도 했더라면…….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욕실 문 앞에 있던 아델은 어이없어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치한 취급하지마. 갈아입을 옷을 갖다 주려고 들어온 거야.”
아델이 콘솔 위에 재빨리 옷을 두고 나가려는데, 크리스틴이 욕조에서 나왔다.
처벅처벅.
물에 젖은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아델은 그 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입욕제의 향기에 섞인 익숙한 체취도 점점 짙어졌다.
“계, 계속 있지, 왜 나와.”
“다 했어.”
“그럼 얼른 옷 입어. 감기들어.”
콘솔 위에 올려둔 그의 옷을 재빨리 집어서 내밀었다. 물론 고개를 잔뜩 옆으로 돌리고 눈을 감은 채로.
“그럴 거야.”
“그럼 난 나갈게.”
그가 옷을 받아들자, 아델은 계속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로 나가려고 했다.
“아델 조심……!”
콩!
결국 문설주에 이마를 찧고 말았다.
“괜찮아?”
“응.”
하지만 꽤 아픈지 아델은 주저앉아 이마를 문질렀다.
크리스틴은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놀려주고 싶은 짓궂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그냥 봐도 되는데.”
아델이 발끈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머, 뭐라니? 누가 보고 싶어서 들어온 줄……!”
그 순간 아델은…… 보고야 말았다.
“이런, 내 얼굴을 보라는 거였는데.”
“꺅, 짐승!”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아델은 그의 알몸을 제대로 본 게 처음이었다.
사랑을 나눌 때 크리스틴은 항상 주변을 어둡게 했다. 침실의 불을 모두 끄거나, 커튼을 쳐서 한낮에도 어둡게 만들었다.
아델은 그게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배려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불만을 얘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궁금했다. 함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의 모든 것이.
‘그런데 이런 엄청난 것이었을 줄이야…….’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버린 그것은 아름답고 우아한 크리스틴과 전혀 별개의 생명체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리는지.
한편,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뭐지, 이 반응은? 그렇게 많은 밤을 보내놓고서 새삼?”
“모, 몰라! 나갈 거야!”
허겁지겁 돌아서던 아델은,
다시 콩!
“악!”
문설주에 부딪히고 말았다.
크리스틴은 이제 웃을 수만은 없어서 얼른 로브를 걸치고 다가갔다.
“좀 봐. 그러다 이마가 남아나질 않겠다.”
하얀 이마 한쪽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가 자상하게 문질러주자 아델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
“히잉, 아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건 원래 자신의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소름 돋을 만큼 굉장히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혀짧은 소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의 앞에서만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자신이 뭘 해도 다 예뻐해 준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역시나 그는 호오, 입으로 불어주더니 팔을 끌어당겼다.
“나가자, 약 발라줄게.”
그 순간 아델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었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처방이 있는데.”
윽, 이런 버터 덩어리 같은 대사라니!
부끄러워서 귀밑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계속 직진하기로 결심했다.
아델은 그의 목덜미에 매달리며 입술 위에 달큼하게 속삭였다.
“나 지금, 당신을 유혹하는 거야.”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 이게 맞는 건지, 이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러나 욕망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아델은 자신과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막상 아이가 생기면 틀림없이 그도 좋아하리라.
이렇게 서로 사랑하니까.
***
다음날 새벽.
“다녀올게. 아델.”
잠결에 속삭이는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아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밖이 아직 푸른 어둠에 잠겨 있는 새벽이었다.
“벌써? 당신 잠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폐하가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크리스틴은 아델의 앞머리를 살며시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내 걱정하지 말고 푹 자.”
그것이 마치 주문인 것처럼 아델은 다시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후.
“아가씨, 계속 주무실 거예요?”
“으응, 타냐 몇 시야?”
“열 시에요.”
“늦잠을 잤네.”
아델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타냐의 뒤로 몇 명의 하녀들이 갈아입을 드레스와 씻을 물을 들고 들어왔다.
“피곤하시면 계속 주무세요.”
“아니야, 오늘 미아의 선물을 사러 가기로 했잖아.”
“그 전에 하녀장님하고 얘기를 좀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녀장하고 얘길?”
“그분 집안이 대대로 산파셨대요. 한동안 산파 일도 했었고요. 아기를 갖는 데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잖아요.”
“그 정도까진 아니야.”
“하긴,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으시니 금방 기쁜 소식이 찾아오겠죠.”
아델의 시중을 들던 다른 하녀들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블 궁의 하인들은 모두 모른 척했지만, 두 사람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옷은 내가 갈아입을 테니까 다들 나가보도록 해.”
아델은 침착하게 말했지만 괜히 민망해졌다.
“네, 그럼.”
“잠깐, 타냐!”
아델은 하녀들과 함께 나가려던 타냐를 불러세웠다.
“뭐,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해서 얘기해주니 하녀장을 만나보긴 할게.”
***
하녀장은 집사인 핸리와 나이가 비슷했다. 그러나 성격은 정반대였다. 핸리가 느긋하고 정중하며 온화하다면, 그녀는…….
“핸리, 그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
한마디로 호쾌하고 호전적이며 호탕했다.
아델 앞에 불려온 그녀는 뭐가 못마땅한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핸리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제가 혼자만 먹으라고 굴을 챙겨줬더니, 그걸 사람들이랑 전부 나눠 먹었지 뭐예요.”
“굴이요? 그 물컹한 어패류?”
“아가씨도 주인님께 꼭 챙겨 먹이세요. 굴이 남자의 정력에 아주 좋답니다.”
굴이라…….
그렇다면 그에게 절대로 먹여선 안 되겠다.
“그런데 핸리에게 굴을 준 이유가, 두 사람 혹시……?”
하녀장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그 영감탱이 낯짝이 허연 게 금방 쓰러질 것 같잖아요. 송장이라도 치르면 누가 제일 고생이겠어요?”
그러더니 목이 타는지 차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호탕한 그녀도 여인은 여인이었나보다.
아델은 조용히 웃으며 빈 찻잔을 다시 채워주고,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예전에 산파 일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럼 혹시 아이를 빨리 가지는 방법도 알고 있나요?”
“아이를 빨리 갖는 방법이요?”
“그게…… 그러니까 아이를 안 낳을 것도 아닌데, 기왕 낳을 거면…… 빨리 낳는 게 더 좋잖아요. 나도 백작님도 이른 나이도 아니고…….”
아델은 민망해서 장황하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듣고 있던 하녀 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두 분이 잘 상의하신 후에 갖는 게 어떨까요?”
“무슨 말이죠?”
“주인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왠지 깊이 가라앉았던 불안감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린 것만 같았다.
“설마 그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