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내 침실로 와서 자 (64/155)


64화. 내 침실로 와서 자
2022.09.12.



 


“그 일은 미안해. 나중에 다 설명할게.”

하지만 그것만으론 당연히 아델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크리스, 나는 당신과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했어.”

“나 역시 그래.”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낳고, 당신과 함께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 나도 당신도 외로웠으니까. 그래서 나랑 같은 생각인 줄만 알았다고.”

“물론이야, 아델.”

아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아니었잖아. 매일 밤 무슨 생각으로 나를 안았던 거야? 그저 달콤한 시간이면 충분했던 거야?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이려고…….”

“미안해, 아델. 네가 그토록 아이를 원하는지 몰랐어.”

크리스틴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눈치를 보며 주눅 든 얼굴로 변명하게 될 날이 올 줄은.


“크리스, 이건 아이를 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가치관과 믿음에 관한 문제야.”

“미안해. 당신의 믿음을 저버려서.”

대체 몇 번째 미안하다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아델의 화를 잠재우려면 그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 같았다.

물론 적절한 단어 선정이 아니었던 것 같았지만.


“미안하다고만 하지 마. 난 당신 생각이 듣고 싶은 거야.”

아델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고요하고도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 눈과 마주치자 크리스틴은 심장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아델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크리스, 우린 오다가다 만나서 잠자리를 한 게 아니야. 당연히 가정을 꾸릴 생각으로 사랑을 나눈 거 아니었어?”

“물론이지.”

“그런데 왜 그랬어?”

“잘못했어.”

이번엔 단어를 조금 바꿔보았다. 하지만 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뭘 잘못했는데? 말해봐.”

그는 머릿속이 암담해져 버렸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부부싸움이란 건가?

아니 이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기세에 눌려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만일 전투였다면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뭐든 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이렇게라도 하면 넘어가 주지 않을까…… 라는 건 너무 어수룩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델의 눈이 더 매섭게 치켜 올라가더니 비탄에 젖어 한숨을 쉬었다.


“됐어. 당신이랑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쾅!

결국, 찬 바람이 불도록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하아!”

그제야 크리스틴은 긴장이 풀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얼른 다가오던 짐머가 멈칫했다.


“이게 괜찮아 보이나?”

어느새 크리스틴의 눈 밑에 퀭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음 같아선 신나게 놀려주고 싶은 짐머였지만 지금 그랬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10년은 더 늙으신 것 같습니다.”

“젠장…… 머리가 하얗게 센 것 같아.”

“다행히 티는 안 나시네요.”

 

***

침실로 돌아온 아델을 타냐가 위로했다.


“속상하시겠지만 무슨 사정이 있으셨을 거예요. 백작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잖아요.”

“알아. 그래서 더 그래.”

“예?”

“그가 자꾸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서. 나를 아낀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믿지 못하는 거 같아서 서운하기도 하고.”

그가 비번인 걸 숨겼다는 얘기는 타냐에게 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이 말해주기 전까지 아는체하지도 않기로 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면서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기를 갖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처음엔 화가 났고, 지금은 두려웠다.

이럴 때마다 엄마를 잃던 날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달려와서 위로해주고 함께 슬퍼해 줄 거라고 믿었던 그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때의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어렸을 때의 일이니 이해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보다.

그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

똑똑.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아델은 노크 소리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이 시간에 침실에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들어가도 돼?”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아델은 문을 등지고 돌아누운 채 잠든 척했다.


“들어간다?”

자는 척했으니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델은 그저 미동조차 하지 않을 뿐이었다.

저벅저벅.

그가 침대 옆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는지 매트리스가 조금 기울어졌다.


“아델…….”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꺼내기 힘든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당신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 충분히 화낼 만도 했다고 생각해. 내가 잘못한 것도 맞고 당신에게 미안한 것도 맞아. 하지만…… 나는 당분간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어둠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단호했다.

그녀가 화를 내거나 애원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잠시 고요하고 적막한 시간이 흘렀다.


“왜……?”

아델은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게 두려워.”

놀란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소리야? 난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은 건데.”

크리스틴이 가늘게 웃었다.


“날 닮은 아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술을 마셨는지 그에게서 엷게 술 냄새가 풍겼다. 취중 진담이라고 푸른 눈빛 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 난 당신을 모르겠어! 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 얘길 해줘야 알지.”

아델은 답답해서 채근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바라보기만 했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왠지 슬퍼 보였다.


“크리스…….”

아델은 애원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님. 제발…….”

그는 여전히 침묵한 채로 아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여전히 따뜻하고 다정한 손.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내가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한다는 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델은 저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한다는 그 말이 가슴으로 너무나 깊게 들어왔으니까. 진심인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더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알아. 그러니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그거. 응?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아델은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을 감싸며 울먹였다.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아델의 손을 내려놓은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분간 당신 침실엔 들어오지 않을게. 그러니까 편하게 자, 아델.”

침실을 나가는 그를 보며 아델은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편하게 자라고 했지만, 왠지 버려진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아델이 식당에 내려오자 크리스틴은 이미 식사 중이었다.


“좋은 아침.”

전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모두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델이 아무리 활기찬 표정을 지어도 퉁퉁 부은 두 눈을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잠이 안 와서 책을 읽었는데 너무 슬퍼서 밤새 울었지 뭐야.”

아델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타냐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기야 모시는 주인의 눈치만 살피는 하인들이었다. 이미 크리스틴과 아델의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먼저 일어나지. 천천히 식사하고 와.”

결국 크리스틴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앉아.”

나직하지만 매서운 목소리.

아델은 나이프로 고기를 썰며 생긋 웃어 보였다.


“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그 정돈 해줄 수 있잖아, 그렇지?”

나이프를 쥔 그녀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걸 보며 크리스틴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핸리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소화가 잘되는 허브티가 좋겠군.”

“예, 가져다드리지요.”

핸리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하인들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식당을 나갔다. 괜히 옆에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식당 안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폭풍 직전의 고요였다.


“왜, 나랑 같이 있으면 소화가 안 되나 보지?”

아델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우아하고 평온하게 식사를 했다.


“당신이 소화가 안 될까 봐.”

“어머, 내가 왜?”

전혀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녀는 구운 버섯을 입안에 넣고 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물론 고무 쪼가리를 씹는 기분이었지만.

크리스틴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델은 다시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정말 체할 거 같으니까.”

“그럼 돌아서 있을까?”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는 크리스틴을 보니 왠지 더 화가 났다. 자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순한 양처럼 굴었다고.


“됐어. 당신은 그나마 얼굴이 봐줄 만하니까.”

크리스틴은 피식 웃었다.


“웃지 마. 보기 싫어!”

“당신은 화를 내도 예뻐, 아델.”

이 너구리!

아델이 그를 째려보는데 핸리가 허브티를 가져왔다.


“아델 양에게 주게.”

“예, 주인님.”

핸리는 이미 이 허브티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장미 찻잔에 담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둘 사이의 냉전을 지켜보며 긴장한 것과 달리 그는 조금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아델은 냅킨 천으로 입가를 닦았다.


“밤에는 내 침실로 와서 자.”

그러고는 최대한 담담하게 허브티를 마셨다.


“그래도 돼……?”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손끝 하나 대지 말고 잠만 자라는 거야. 그래야 당신이 더 불편할 테니까. 먼저 일어날게.”

도도하게 식당을 나가는 그녀를 보며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잠만 자라고?’

아델은 그를 확실히 벌주는 방법이 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에겐 끔찍한 고문이 될 테니까.

그는 타냐를 손짓해 불렀다.


“예, 백작님.”

금화가 두둑하게 든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아델의 눈에 얼음찜질을 해주도록. 눈이 가라앉으면 함께 시내에 다녀오는 게 좋겠군.”

한마디로 바람을 쐬면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라는 얘기였다.

눈치 빠른 타냐는 금방 알아듣고 웃었다.


“예, 염려 마세요.”

 

***



“와앗! 역시 칼라임의 번화가네요!”

타냐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진열장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칼라임 시내에 몇 번 나오긴 했지만, 그때는 빈털터리라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고급 상점이 몰려있는 번화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두둑한 주머니 덕에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감이 생겼다.

아델은 미아에게 줄 선물로 예쁜 찻잔 세트와 황금 오르골을 골랐다. 그리고 고급 의상실로 들어가 타냐에게 겨울 외투와 가방을 사주었다. 타냐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자 자신의 모자도 하나 샀다.

아침의 우울하던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타냐는 마음이 놓였다.

신나게 쇼핑을 한 두 사람은 눈에 띄는 예쁜 디저트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


“크리스랑 같이 왔었던 곳이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델이 중얼거렸다.


“정말요?”

타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핑크홀릭’이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사실 소녀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이곳에 크리스틴이 있는 그림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저 자리에 앉았었는데.”

아델이 가리킨 자리는 이 핑크홀릭의 메인 좌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기에 백작님이랑 같이 계셨다고요?”

“응, 왜?”

그곳을 유심히 보던 아델 역시 웃고 말았다.

지금 보니 온통 공주풍으로 꾸며진 소녀들의 놀이방이었다. 그런 곳에서 레이스 인형을 뒤집어썼던 그를 떠올리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웃음 끝에 알싸하게 코끝이 매워졌다.


“왜 그러세요?”

울컥하는 아델을 보며 타냐가 물었다.


“그가 내게 참 많이 맞춰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서.”

“아가씨도 백작님에게 맞추려고 애쓰시잖아요.”

“모르겠어. 내가 그에게 잘해준 건 하나도 안 떠올라. 항상 그가 날 배려하고 맞춰줬던 거 같아.”

타냐는 조용히 웃었다.

이래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건가?

둘이 화해하는 것도 시간 문제 같았다.

얼른 돌아가서 하인들에게 알려줘야겠다. 다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때였다.


“……아델 양?”

몇 명의 귀부인들이 아는 척을 해왔다.

그녀들 사이에는 세이라가 도도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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