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선 넘지 마 (65/155)


65화. 선 넘지 마
2022.09.16.



 


“역시 아델 양은 유행이 빠르다니까요. 요즘 핫한 곳이라기에 우린 처음 와봤거든요.”

“그러게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네요.”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들은 세이라를 피해 슬금슬금 아델에게 붙었다.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힘이 있는 쪽에 달라붙는 습성이 있었다. 자력이 강한 쪽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그들의 생존방식이니 아델은 결코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 절대로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저렇게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세이라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일 초라도 고역이었다.


“그럼 즐겁게 담소 나누다 가세요.”

인사를 한 후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오라버니가 곧 결혼하는 거 알아?”

아델은 멈칫하며 세이라를 보았다.

승마 대회 때 망신당한 일로 독이 오른 스톤이 무슨 흉계라도 꾸밀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결혼이라니.


“축하할 일이네.”

이건 진심이었다.

단, 스톤이 아닌 자신에게.

그러자 한스 부인이 입이 근질대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럼요, 곧 부마가 되실 건데.”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귀부인들도 처음 듣는 소식인 모양이다.


“바이스 백작이 어떤 과부에게 홀려서 차버린 기회를 오라버니가 잡은 거지. 아델 양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역시 그렇게 된 건가?

전대 오스월드 후작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은 게 되었다. 증인으로 나섰던 바네사는 매춘부에 알콜 중독자라는 이유로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사람들은 스톤이 범인일 거라며 수군거렸지만 결국 혐의없음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이제보니 스톤과 황녀의 결혼을 위해 황제가 손을 쓴 것이다.

그건 크리스틴이 아닌 스톤과 손을 잡기로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귀부인들은 슬금슬금 세이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델은 담담한 표정으로 웃었다.


“잘됐네. 후작님이 결혼하면, 세이라 너도 곧 결혼해야지. 유치한 여왕 놀이만 하다가 늙어 죽을 생각은 아니지?”

아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세이라를 무시하듯 지나쳐서 걸어갔다.

순간 세이라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비장의 숨겨둔 무기라도 꺼내려는 듯.


“참, 그 소식은 들었어? 오라버니가 교황청에 정식으로 이의 신청을 한 거.”

“……!”

아델의 걸음이 멈칫했다.

또각또각.

그녀에게 바싹 다가온 세이라는 연극배우처럼 과장 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여운 아델 양. 당신 결혼은 물론, 약혼도 무효가 되면 어쩌지?”

창백해진 아델의 얼굴에 세이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제 귀부인들은 세이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아델은 잠에서 깼다.

어젯밤 크리스틴과 다투고 잠을 설쳤더니 피곤했나 보다. 침대에 누웠다가 깜빡 졸았다.

아니, 깜빡이 아니라 오랜 시간 깊이 잠들었나 보다. 노을이 지던 창밖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몇 시나 됐을까?


‘크리스는 들어왔나?’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벽난로 앞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든 그를 보았다. 긴 다리를 탁자에 올려놓고 깍지 낀 두 손은 배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그가 자신의 남루한 저택을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에도 그는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는데.

그때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마음이 놓이고 든든했는지 몰랐다.

10년 만의 만남이었는데도 엊그제 헤어졌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그게 참 이상했다. 잃어버렸던 일부를 찾은 것처럼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완벽해진 기분이었으니까.

마치 오랫동안 그를 찾아 헤맨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델은 그가 잠든 소파 아래에 주저앉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크리스틴이 빙그레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소파에서 자려고 했는데…… 침대에서 잘까?”

“그게 좋겠어. 대신 내 몸에 손끝 하나 대면 안 돼.”

“그냥 소파가 낫겠군.”

“불편하잖아.”

“당신 냄새를 맡으면서 손끝 하나 못 대는 것보다야.”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겼다.


“진짜 상상도 못 했어. 그 예쁘던 꼬맹이가 이런 짐승으로 자랐을 줄은.”

그는 매력적인 짐승처럼 눈을 빛냈다.


“짐승이니까 욕망에 충실한 걸 이해해줘.”

“욕망에만 충실하고 종족 번식은 싫어하는 짐승도 있을까?”

다시 아이 얘기를 꺼낼까 봐 크리스틴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눈치챈 아델이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긴장 풀어. 아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

“아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알아. 당신이 왜 그랬는지.”

“……!”

크리스틴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자신의 정체를 짐작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낮에 들었어. 스톤이 교황청에 이의 신청을 했다는 거.”

“아아, 그거.”

생각만으로도 골치 아프다는 듯 크리스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칼라임의 고위 귀족들은 교황청의 승인이 있어야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이혼이나 재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형식적인 절차일 뿐 대부분 황제의 승인을 얻으면 끝나는 사안이었다. 아델의 경우 황제가 오스월드가에서 제명한 것으로 재혼을 승인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황제의 결정에 불복하고 교황청에 이의 신청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땐 교황청에서 직접 심의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누구도 황제의 결정에 불복하며 눈 밖에 나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스톤이 아델의 재혼을 반발하며 교황청을 끌어들인 것이다. 겉으로는 그녀의 새 출발을 응원한다더니 뒤로는 그런 구린 짓을 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최종 승인을 내리기 전까지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겠지?”

“무슨 소리. 이미 당신은 내 아내인걸.”

아델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바이스 백작 부인이 될 수는 없잖아. 그때까지 난 아델 양이고, 우리가 낳은 아이도 혼외자가 될 거고.”

세이라의 말을 듣고 나서 크리스틴이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델은 아직 정식 백작 부인이 될 수 없었고, 그녀가 낳은 아이도 적자로 서류에 오를 수 없었으니까.

물론 크리스틴은 전혀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그래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아델은 크리스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길고 아름다운 손이었지만 전쟁터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마디가 굵고 힘줄이 불거진 강인한 손.


“…….”

“말해주지 그랬어? 그런 것도 모르고 난 화만 냈잖아.”

아델은 요 며칠 아이의 일로 서운해하고 오해한 게 미안해졌다.

그의 속사정도 모르고 자기 생각만 한 것 같아서.


“염려 마, 아델. 만일 교황청에서 스톤의 이의를 받아들인다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거니까.”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엄청난 말을 하면서 크리스틴은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칼라임 제국은 물론 이 대륙의 모든 나라는 교황청의 눈치를 보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일개 백작이 교황청과 전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아델은 그렇게 말해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하필 왜 나 같은 걸 좋아해서…….”

“무슨 소리야, 그게?”

황녀와 혼인을 거절했으니 황제와 그의 관계가 소원해질 거라는 건 아델도 짐작했다.

그런데 에이프릴과 스톤이 결혼한다면 크리스틴의 입지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자칫하다간 황제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르는 일.


‘황녀님하고 결혼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이를 못 갖는 일도,

폐하에게 미움받을 일도…….

그러나 차마 그 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까지 감수할 생각으로 자신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후회하는 건 그의 마음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은 이렇게라도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으니까.


“사랑해, 크리스.”

“뜬금없는 고백 타임인가?”

“그냥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아무리 당신을 서운해하고, 화를 내고, 오해한다고 해도 그 사실만은 변함없다는 거…… 알아줬으면 해서.”

잠시 아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았다.


“이건 신종 고문이 분명하군.”

“뭐?”

“손끝 하나 대지 말라면서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과 잠자리는 별개의 문제니까.”

“난 아닌데.”

아델의 응시하는 눈동자가 어느새 이글이글 타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크리스틴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크리스, 난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당신의 뜻에 적극 동참할 거야. 손끝 하나 대지 말라는 건 그 의지의 표명이고.”

“동참하겠다는 뜻은 고맙지만,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아니, 나도 적극적으로 당신을 도와야지.”

아델은 점점 가까워지는 크리스틴에게서 재빨리 빠져나와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머리에 두른 초록색 리본을 풀어 침대 한가운데에 세로로 길게 늘어놓았다.


“당분간 이 선은 넘지 않도록 해.”

크리스틴은 팔짱을 낀 채 리본을 노려보았다. 마치 눈에서 불을 쏘아 리본을 태워버릴 기세였다.

***



“그럼 먼저 잘게.”

아델은 보란 듯 드레스를 벗고 슈미즈 차림이 되었다. 얇은 실크 자락 사이로 그녀의 뽀얀 속살이 아스라이 비쳐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과실 같았다. 한입 깨물면 금방 달큼한 과즙이 흘러 갈증을 적시는.


“아델.”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제 보니 당신은 희대의 악녀가 맞아.”

“무슨 소리야. 난 그저 잘 준비를 하는 것뿐인데.”

아델은 화사하게 웃더니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넘기며 하얀 목을 드러냈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유독 약하다는 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잘자, 크리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무방비하게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욕구불만으로 쌓인 게 많았던 크리스틴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처럼.


“아델,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당신 진짜…… 후회할 거야.”

아델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잘 느껴졌으니까.


“그래도 난 당신 사랑해, 크리스.”

그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에게 미안하고,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 하필 나 같은 걸 좋아해서.

하지만 아이의 문제를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한 것은 잘못이었다.

게다가 하녀장이 아는 침실의 일을 자신은 까맣게 모르게 만들다니.

이건 그 일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

툭!

그때 옷자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눈을 뜨자 크리스틴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느새 상체를 벗은 채 창가를 등지고 서 있었다.

달빛이 흐르는 그의 몸이 신비로웠다. 넓은 어깨와 날렵한 근육이 붙은 단단한 가슴과 잘 짜여진 복근이 빛을 따라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어냈다.

아델은 저 몸을 만질 때의 촉감을 잘 알았다.

청동처럼 매끈하고 탄탄한 살갗과 그토록 뜨겁고 강인하게 꿈틀거리던 근육들…….

홀린 듯 바라보는데, 그는 바지까지 벗으려고 허리의 훅을 풀었다.


“자, 잠깐! 그건 왜……?”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잖아. 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야 꿀잠을 자거든.”

“그래도 바지는…… 입어.”

“염려 마. 선 넘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안 돼!”

크리스틴이 씩 웃었다.


“왜 못 참겠어? 거봐. 후회한다고 했지?”

아델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침실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을!


“후회는 무슨. 됐어! 마음대로 해.”

다행히(?) 크리스틴은 바지를 벗지 않은 채 그녀의 옆자리에 누웠다.

묵직하게 기울어진 매트리스의 무게로 인해 그의 존재감이 확 와닿았다.

살갗 하나 닿지 않았지만, 아델은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몰랐다.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왜 또 이리 말똥말똥 해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건지…….

긴장한 건가?

아님, 나도 욕구불만?

게다가 어설프게 자고 일어나는 바람에 쉽게 잠들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았다.

그럼 오늘 밤 내내 이렇게 고문당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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