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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선 넘은 벌칙은 하트 (66/155)


66화. 선 넘은 벌칙은 하트
2022.09.19.



 
시간이 꽤 지났을 때였다.


“……손 정도는 잡도록 허락해 줄 수 있어.”

아델은 도도하게 말했다.

차라리 손이라도 잡고 자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언제 늑대로 돌변할지 모를 남자를 옆에 방치해 두고 있는 건 너무 불안했으니까.

이건 절대로 옆구리가 허전해서라거나 남남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아쉬워서는 아니었다.

절대로!

하지만 그는 반듯하게 누운 채 아무 대답도 없었다.


‘벌써 잠들었나?’

“크리스 자? 안 자면 안고 자는 건 괜찮다고…….”

들썩.

그가 뒤척이며 이불이 흔들렸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하긴 당신이라고 잠이 올 리 없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델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됐어. 선 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놀랍게도 그의 대답은 단호박이었다.

왜지? 나 왜 상처받은 기분이지?


“그런 마음가짐이면 안심이네. 사실 시험해 본 거였어.”

“그런 거 같아서.”

“그럼 잔다.”

“음.”

그가 뒤척이며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하지만 아델은 점점 더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진짜 이대로 자는 건가?’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엔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팔베개는 해줄 수 있어.”

아델은 잠시 망설이다가 잠에서 깬 것처럼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팔베개……?”

“싫으면 됐고.”

“아니야. 사실, 이 베개가 좀 불편하더라고.”

너무나 속 보이는 핑계.

하지만 그는 놀리지 않고 왼팔을 내밀었고, 아델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팔을 베었다.


“편해?”

“좀.”

“그럼 이제 그만 자.”

아델은 뜨끔했다. 그녀가 계속 잠들지 못한 채 그를 힐끔거렸던 걸 들킨 것 같아서.

물론 기분 탓일 거다. 이렇게 어두운데 보일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렇게 그의 팔을 베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잘자. 당신도.”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아델은 깜짝 놀랐다.

제일 처음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크리스틴의 드넓은 가슴팍이었으니까.

어느새 그에게 착 달라붙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를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초록 리본은 아델의 뒤로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먼저 선을 넘었을 리 없어!’

 

 
어젯밤 그토록 도도하게 거절해놓고 이렇게 먼저 선을 넘어버리다니.

아델은 그에게서 살그머니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틀었다. 순간 그가 팔에 힘을 주어 더 꽉 끌어안았다.


“윽!”

탄탄한 가슴에 그대로 얼굴이 푹 묻혀버렸다. 익숙한 촉감과 체취가 물씬 풍기자 아델은 가슴이 심하게 쿵쿵거려서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의 심장박동이라면 잠든 그를 두드려서 깨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 수가 없군. 그만 꼼지락거려.”

헉!


“숨 막혀서 그래.”

얼른 변명하는 아델을 크리스틴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간 맞아? 어떻게 자다가 깬 얼굴도 이토록 완벽할 수 있지?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게 반짝였고, 은빛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나른한 눈빛은 홀릴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아침부터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그건 내가 할 소리라고!

약간 잠겨서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정말 완벽했다.

하지만 아델은 새침하게 나무랐다.


“팔에 힘 좀 빼줄래? 숨을 쉬려면 고개를 들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쳐다볼 수밖에 없거든.”

“그렇겠군. 그럼 계속 봐.”

“뭐?”

“벌칙이야. 당신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건 또 언제 알아차렸데?

똑똑.

그때 두 사람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 돌려보내…….

그런 의미를 담아서 아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씩 웃었다.


“우리가 화해했다는 걸 알려줘야 고용인들도 덜 불안하지 않겠어?”

“그 뜻엔 동의하지만 이 방식엔 동의할 수 없어.”

“난 이 방식이 마음에 드는데.”

야비하게 눈웃음을 친 그는 문밖을 향해 명령했다.


“들어와.”

“안 된다니까!”

벌컥!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타냐와 하녀들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동안에도 크리스틴은 아델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놔 줘!

아델이 입 모양으로 소리쳤지만, 그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그냥 자는 척해, 아델.”

“싫어. 내가 왜…….”

“안 그러면 키스해 버릴 거니까.”

“……!”

아델은 항의하는 뜻으로 인상을 썼지만, 도저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동안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크리스틴이 가늘게 웃었다.


“해?”

“나쁜!”

하는 수 없이 아델은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오던 하녀들은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보고 재빨리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인기척이 들리기에 둘 다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델은 크리스틴의 품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는 조각 같은 몸을 반이나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백작님.”

얼굴을 붉히며 공손히 인사하는 하녀들에게 크리스틴은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가져온 건 거기 두고 가. 아델은 내가 직접 씻길 테니.”

“……!”

품속의 아델은 꿈틀거렸지만, 하녀들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탁!

문이 닫히자 아델은 크리스틴의 팔뚝을 꽉 깨물어버렸다.


“윽!”

겨우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광활한 가슴팍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 나쁜! 그렇게 말하면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글쎄,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그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기가 막힌 아델은 결국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들어 그를 마구 내리쳤다.

***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아델 양.”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다들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야릇하게 웃고는 했다.

그들이 말한 좋은 아침에 내포된 의미심장한 뜻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아델은 구체적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마블 궁의 안주인답게 그들의 인사에 우아한 미소로 대답할 뿐.

좋은 아침은 개뿔.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결국 식당 앞에서 만난 타냐에게 아델은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어젯밤은 정말 아니었어.”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백작님이 워낙 절륜하시니…….”

“아니라고!”

“에이, 아니면 좀 어때요? 두 분 화해하신 건 맞잖아요. 그렇죠?”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억울해했다.


“그래도 하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냉랭하게 굴었는데 고작 하루 만에 잠자리라니. 남자에 환장한 여자처럼 볼 거 아니야!”

“아뇨. 백작님을 정말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거예요.”

타냐가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다른 남자에게 안기신 게 아니잖아요. 정말 사랑하니까 아가씨는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백작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신 거죠. 그러니까 화해하신 거고요. 전 아가씨가 이해심 깊고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아델은 할 말이 없어졌다.


“타냐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나보다 어리면서 말하는 게 꼭 언니 같잖아.”

타냐가 생글 웃었다.


“이해하세요. 제가 워낙 애늙은이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항상 내 옆에 있어 줘. 알았지?”

“물론이죠.”

“그리고 한가지는 분명히 말 해두는데, 어제는 정말 아니었다고!”

“네, 네.”

하지만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던 아델은 다시 한번 신음을 질렀다.


“어서 오십시오, 아델 양.”

핸리의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양옆에 하인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기다란 식탁 위에는 하트 모양으로 꽃을 늘어놓고 그 안에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음식은 온통 하트모양으로 데코레이션 해 놓았다. 하트모양으로 깎아놓은 당근과 하트모양 딸기, 하트모양 젤리, 하다못해 구운 닭가슴살까지 하트모양이었다.


“핸리, 이게 다 뭐죠?”

“두 분의 화해를 축하드리는 스페셜 조찬입니다.”

“과했군.”

언제 다가왔는지 크리스틴도 난감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신음했다.


“두 분의 사랑과 행복을 기원하는 저희의 작은 마음입니다.”

핸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꽤 근엄하고 진지했다.

그러자 다들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마치 다시는 부부싸움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 같은 애절한 눈빛이었다.


“알겠어요, 핸리. 둘만 있게 다들 나가줄래요?”

아델의 말에 핸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럼 저희는 멀리 가 있겠으니, 즐거운 시간을…….”

“그렇게 멀리 안 있어도 돼요!”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고 보면 핸리가 제일 능구렁이인지도 몰랐다.

***

식사를 마친 후 크리스틴은 본궁으로 출근했고, 아델은 오랜만에 디저트를 만들었다.

내일 미아에게 선물을 주러 갈 때 함께 가져갈 생각이었다. 마크의 아들 제이드와 폴린에게 줄 곰돌이 쿠키도 만들었다.

황후궁의 시종이 찾아온 것은 막 오븐에서 잘 익은 쿠키를 꺼낼 때였다.


“황후 폐하께서 모임에 초대하셨습니다.”

오전 내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던 기분에 일순 찬물이 끼얹어졌다.


“언제죠?”

“지금 준비하고 나가시면 딱 맞을 겁니다.”

“초대가 아니라 끌고 오라고 하셨나 보네요.”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마음 같아선 황후의 초대고 뭐고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게다가 황후가 자신을 초대한 이유를 알만했으니까.

분명 스톤과 에이프릴의 혼인 얘기를 하며 기를 죽이려 들리라.

하지만 이곳은 황궁 안이었고, 크리스틴을 봐서라도 황후와 맞설 수는 없었다.

그저 악마와 손잡은 그들을 동정할 수밖에.

황후의 알현실.

아델이 들어서자 깔깔대던 웃음이 멈추고 다들 그녀를 돌아보았다.

넓은 알현실 안에는 칼라임 대부분의 귀부인이 모여 있었다. 전대 황후였던 이자벨까지 보였다.

제일 앞에 황후와 에이프릴이 앉았고, 두 사람의 양옆으로 탁자와 의자가 마주 보도록 길게 놓여 있었다.


“늦었군요, 아델 양. 그 먼 마블 궁에서 오느라 고생했어요.”

황후의 비아냥에 아델은 당황했다.

부름을 받자마자 바로 왔는데 지척에서 지각한 게으름뱅이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망신 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지만 황후의 체면을 생각해서 반발할 수는 없었다.


“송구합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를 받고 선물을 준비하느라 늦었습니다, 폐하.”

아델은 오전 내내 만든 디저트 상자를 황후의 시녀에게 건넸다. 간단한 차모임인 줄 알고 가져왔는데, 이런 분위기인 줄 알았으면 가져오지 말 것을.


“다음부턴 그런 건 가져오지 않아도 된답니다. 정기 모임에선 황궁의 격식에 맞는 행동을 해주길 바랍니다, 아델 양.”

아델의 디저트는 순식간에 황궁의 격식을 떨어트리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여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수군거렸다.


“폐하도 너무하시네요. 촌구석에 숨어 살던 사람이 정기 모임의 격식이 뭔지나 알겠어요?”

“그러게요. 대놓고 무안을 주시네.”

다들 편드는 척하며 아델을 깎아내렸다.

그러나 아델은 알현실 한복판에 선 채로 그 소리 들을 그대로 듣고 있어야만 했다.

줄 맞춰서 놓인 자리 어디에도 그녀가 앉을 빈 의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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