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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전대 황후 이자벨 (67/155)


67화. 전대 황후 이자벨
2022.09.23.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죠?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델의 사정을 모르는 것처럼 황후가 물었다.


“의자가 모자란 것 같습니다, 폐하.”

그러자 세이라가 얼른 나섰다.


“어머, 어쩌죠. 황후궁의 탁자와 의자는 이게 전부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황후는 진지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델 양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사람이 있나요?”

물론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이라는 황후의 앞으로 나오더니 조심스럽고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인 줄 알지만 여기 모인 귀부인들 누구도 아델 양보다 지위가 낮지 않습니다. 그녀는 백작의 약혼녀일 뿐 백작 부인이 아니니까요.”

다른 귀부인들도 기다렸다는 듯 동조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아델 양은 아직 그릴스 백작의 서녀일 뿐이죠. 백작가의 서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것은 모욕적인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다시 오스월드가의 전대 후작 부인이 된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요.”

그 말에 여인들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황후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다들 아델을 세워놓고 신나서 조롱해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바이스 백작이었고, 그의 아내가 될 아델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스톤이 부마가 된다면 바이스 백작의 위세도 예전만 못할 것이다.

게다가 교황청에서 스톤의 이의 신청을 받아들인다면 아델은 바이스 백작에게도 버림받게 될 것.

다시 천덕꾸러기 전대 후작 부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인들은 아델을 부러워했던 것만큼이나 그녀의 몰락을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아델은 담담했다.

이미 이런 분위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내성이 생겨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황후와 에이프릴을 동정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악마와 손잡으려 한다는 것을.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에이프릴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까웠다.

부모의 욕심이 그녀를 점점 더 불행 속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아서.

딸칵!

그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의 주인이 이자벨이라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조용히 차를 마셨지만 다들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황후궁의 주인이었으며, 황후와 황녀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귀부인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에이프릴이 혼인하면 폐하께서 많이 서운하겠어요.”

이자벨은 에이프릴의 혼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서운하긴요.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후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짝으로 스톤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미 한 번 결혼한 전력도 있었고, 혐의없음으로 무마되긴 했지만 부친을 죽인 패륜아라는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냐옹.

그때 작고 까만 새끼 고양이가 나타나 에이프릴에게 다가왔다.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응시하는 눈빛이 꼭 안아달라는 것만 같았다.


“까미!”

환하게 웃으며 황녀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시녀가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오스월드 후작께서 기다리십니다.”

에이프릴은 얼른 애교 섞인 눈빛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알았다. 그만 나가보렴.”

황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알현실을 뛰어나갔다. 찰랑거리며 굽이치는 금빛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데이트를 나가는 여인의 설렘이 느껴져서 그런 모양이다.

적어도 이 결혼이 그녀의 뜻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건 아닌가 보다.


“후작이 순진한 에이프릴의 마음을 꽉 잡았나 보군요.”

이자벨의 비아냥거림에 세이라가 얼른 스톤의 편을 들었다.


“황녀님의 고양이도 오라버니가 구해주었답니다.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명예가 실추되긴 했지만, 진실은 곧 밝혀지겠지요. 사실 오라버니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랍니다.”

아델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자벨이 그런 아델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었다.


“어떻게 인정이 많으면 부친을 독살한 패륜아라는 소문이 나는지 모르겠군. 그런 자와 혼인시키려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고.”

“이자벨 님!”

결국 황후가 소리쳤다. 워낙 기세등등한 황후였기에 그녀가 이렇게 소리치면 대부분의 귀부인은 움츠러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자벨은 평온한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후작을 이용해서 귀족회를 움직일 생각이라면 포기하세요. 귀족회의 수장은 내 아버지고, 귀족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황후와는 또 다른 위엄이 있었다.

로드웰 가문 특유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어딘가 상대방을 압도했다.

하지만 황후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글쎄요, 얼마 전 로드웰 공작이 쓰러지셨다면서요?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일은 그만 손에서 놓으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아버지는 물러나지 않으실 거랍니다. 이건 모시던 주군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죠.”

“또 그 소리 지겹군요! 전대 황제께선 전쟁 중에도 사냥을 나가셨다가 늑대에게 물려 돌아가셨어요. 그게 세상 사람들이 아는 진실이죠!”

두 사람이 서로 노려보는 것만으로 알현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귀부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

창밖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워 보이는 오후였다.

아델은 이런 날 이런 곳에 불려와 벌 받듯이 서 있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쯤이면 할 만큼 했으니 나가봐야겠다. 더 미움받을 일도 없을 듯하니.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 은빛 늑대였지요.”

순간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은빛 늑대!

이런 자리에서 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자벨의 입에서 나올 다음 얘기에 귀를 곤두세웠다.


“그 당시 발렌시아 대공과 은빛 늑대가 같이 있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이 많았죠. 그리고 최근 황궁 경비병의 변사사건도 은빛 늑대의 짓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런데 모두 덮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죠? 과연 황제께서 은빛 늑대와 무관한 걸까요?”

그 말을 끝으로 이자벨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모임이 끝난 모양이니 그럼 저도 그만.”

그 뒤를 아델이 재빨리 따라갔다. 시녀에게 건넨 쿠키 상자를 도로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잠시만요, 선황후 폐하!”

아델은 황궁 정원을 빠져나가는 이자벨을 쫓아 뛰어갔다.

자신을 멈춰 세운 것이 아델이란 걸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무슨 일이죠?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께서.”

“조금 전 은빛 늑대에 관한 말씀을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그게 왜 궁금한가요?”

“제 어머니도…… 은빛 늑대에게 당하셨거든요.”

뜻밖의 말에 이자벨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야릇한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듣던 대로 머리가 좋네요, 아델 양.”

“예? 그게 무슨?”

“황제가 오스월드가와 손을 잡았으니 바이스 백작의 입지가 약해졌을 테고,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우리 가문과 손잡겠다는 거 아닌가요?”

아델은 기가 막혔다.


“선황후 폐하시라면 어머니의 죽음을 팔아서 환심을 사시겠어요?”

아델의 초록 눈동자가 노여움으로 가득 해졌다.

그녀의 진심을 읽은 이자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델 양의 말은 믿죠. 하지만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에게는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네요.”

“왜죠?”

 

***



“뭐 해?”

레터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아델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크리스, 벌써 퇴근했어?”

뒷짐을 진 채 내려다보던 그는 아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초옥.


“음, 다녀왔어.”

“일찍 왔네?”

“내 약혼녀가 보고 싶어서 좀 빨리 왔지. 그런데 뭐하던 중이야?”

“편지 쓰던 중.”

“설마 러브레터?”

“응, 러브레터.”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으자 아델은 편지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영락없는 어린애의 필체였다.


“제이드가 편지를 보냈더라고.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아, 나와 결투했던 그 꼬맹이.”

“결투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이긴 남자였지.”

“그런 줄 알면서도 러브레터를 주고받았다?”

“그러게. 안 들켰어야 했는데.”

딱!

크리스틴이 아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인상을 썼다.


“그런데 한 줄도 못 썼잖아?”

아델의 앞에 놓인 편지지는 비어 있었다.

사실 그가 응접실에 들어서며 몇 번을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그녀는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꽤 심각한 편지라도 쓰는 줄 알았는데 상대가 제이드였다니.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쓰려니 쉽지가 않네.”

“그렇겠군.”

“배고프지? 옷 갈아입고 식사하자.”

“그보다 모처럼 일찍 왔는데 공연이나 보러 갈까? 식사도 밖에서 하고.”

책상 앞에서 일어서던 아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실 요즘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한 데다가 싸우기까지 하느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 필요했다.


“뭐 당신이 정 부탁한다면.”

그녀가 새침하게 대답하자, 그는 정중하게 한쪽 팔을 접고 허리를 굽혔다.


“데이트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허락하죠, 백작님.”

“아래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하고 내려와.”

그는 아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자 상기된 얼굴로 웃던 아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사실 조금 전까지 이자벨과 나눈 얘기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에게는 그 일을 말하고 싶지 않네요.”


“왜죠?”


“황제가 내 남편을 살해했다면 그 일을 실행한 건 누구였을까요?”


“백작이 그랬다는 건가요?”


“내 남편이 죽은 후 백작은 황제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죠.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죠.”


“아뇨, 백작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니 황제 폐하의 신임을 얻은 거예요.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


“그렇다면 백작에게 물어봐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은빛 늑대에 관한 기사를 막으려고 드는지.”

 
이자벨은 크리스틴이 은빛 늑대를 이용해 전대 황제를 죽였다고 믿는 것이다. 그 대가로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지나친 억측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델의 마음속에서는 어느새 의심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를 싫어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승마대회 때 그 많은 늑대를 자유자재로 부렸던 일들.

그때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전쟁터에서 늑대들을 훈련 시켜 본 경험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그가 정말 은빛 늑대를 훈련 시켜서 전대 황제를 죽였을까?’

그렇다면 왜 내게는 은빛 늑대의 존재를 감추려고 했을까?

놈이 엄마를 죽인 것은 그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의 일이라서 상관없을 텐데.


“은빛 늑대에게도 사람들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해보면 그 말을 할 때 그는 은빛 늑대를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와 은빛 늑대가 정말 관계가 있는 걸까?

설마 엄마의 죽음도?

아니, 그럴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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