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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심야 데이트 (68/155)


68화. 심야 데이트
2022.09.26.



 
크리스틴과 아델은 시내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마차를 타고 극장으로 향했다.

요즘 가장 인기가 좋은 오페라 공연이라서 극장 앞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이거 표 구하기 힘들다던데 어떻게 구했어?”

얼마 전 미아와 타냐도 보고 싶다고 했던 공연이었다.


“내가 후원했거든. 공연 내내 로열석 한 곳을 언제든 비워두는 조건으로.”

“설마 나랑 데이트하려고 후원했다는 건…… 아니지?”

“그 이유가 아니면 뭐겠어?”

“와, 역시 스케일이 다르구나.”

놀라는 아델을 보며 크리스틴은 무심한 표정으로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감동할 필요 없어. 하도 후원을 해달라며 찾아와서 사인했을 뿐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왠지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보니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건 아델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니 기특했다.


“말해봐. 나랑 데이트하려고 또 뭐 준비했어?”

“또 뭘 준비해야 하나?”

크리스틴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아델은 혀를 날름 내밀며 웃었다.


“당신이 능력자라서 자꾸 기대치가 올라가.”

“없어. 아무 기대하지마!”

 

마차의 문이 열리자 아델은 크리스틴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렸다. 일부러 한적한 곳에 마차를 세우고 걸어가는데도 사람들이 그들을 금방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아델 양!”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있었고, 사인해달라며 종이를 내미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2층에 마련된 로열석까지 찾아와 구경하고 돌아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원숭이가 된 기분이군.”

턱을 괴고 앉으며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는 그를 아델이 달랬다.


“당신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 같아.”

“다음엔 그냥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가자.”

“응, 단둘이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곳.”

아델의 그 말이 마법이라도 건 걸까? 크리스틴의 표정이 금방 음흉해졌다.


“지금 그냥 오붓한 곳으로 갈까?”

“응, 그건 아니야. 나 진짜 이 공연이 보고 싶었다고.”

“쳇!”

그동안에도 두 사람을 흘끔거리는 시선은 계속되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데?”

“저게 다 쇼라니까.”

수군거림 속에 섞인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굳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공연 시작인데 어딜 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델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금방 돌아올게.”

그는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

로열석을 나오는 크리스틴을 보며 사람들이 머뭇머뭇 물러났다. 아델과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쓱 훑어보던 그는 어떤 남자의 손에 들린 ‘칼라임 타블로이드’를 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겁먹은 얼굴로 소식지를 건네주었다.


“아니죠? 이 기사가 잘못된 거죠?”

“아델 양을 때리다니요.”

사람들이 진실을 확인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델과 크리스틴은 요즘 하루가 멀다고 소식지 1면을 장식하는 커플이었다.

대개는 두 사람의 오글거리고 낯간지러운 연애 소식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꽤 파격적인 기사가 실리고 있었다.

[폭력으로 얼룩진 마블 궁 커플의 실체!]

자극적인 타이틀과 함께 그 아래에 아델을 안은 크리스틴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삽화 속의 아델은 드레스가 찢기고 온몸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마치 크리스틴에게 폭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기사의 내용도 교묘하게 그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얼마 전 스톤과 함께 마블 궁을 찾아온 기자들의 짓이었다.

크리스틴은 그들을 체포한 후 은빛 늑대에 관한 기사를 쓰지 못하게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기자들이 음해하는 기사를 쓴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스톤이 있었기에 이런 대담한 짓이 가능했으리라.

크리스틴은 사람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몰려든 이유를 깨달았다.


‘아델이 이 기사를 보기라도 하면!’

모처럼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고 했는데 그녀가 상처라도 받을까 봐 걱정이었다.

얼른 아델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가 있는 로열석에서 들려온 것이다.
 

그러나 놀라서 달려온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왔어?”

아델이 한 남자의 목에 단검을 겨눈 채 상큼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으니까.


“우린 구면인 것 같군.”

크리스틴은 허옇게 질린 얼굴의 남자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얼마 전 그가 체포해서 잡아 가뒀던 기자 중 한 명이었다.


“어머, 아는 사람이었어? 난 또 치한인 줄 알았네.”

그럼에도 아델은 남자의 목에 겨눈 칼을 치우지 않았다.


“별로. 아는 사이까지는 아니야.”

크리스틴도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며 무심히 자리에 앉았다.


“그럼 치한 맞네. 여기까지 들어와서 귀찮게 자꾸 치근덕거렸거든.”

아델이 목에 단검을 더 바싹 들이대자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아델 양!”

“살려줄까, 크리스?”

“좋을 대로.”

“죽이면 뒤처리는 당신이 해줄 거야?”

“그 정도는 내 선에서 가능할 것 같군.”

“하긴 당신은 능력자니까. 오랜만에 피를 좀 보겠네.”

꽤 진지한 그들의 대화에 남자는 급기야 겁에 질려 소리쳤다.


“자, 잘못했습니다! 전 그저 길을 물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허옇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꼴이 금방 졸도라도 할 것 같았다.

아델은 하는 수 없이 남자의 목에서 단검을 내렸다.


“당신, 조금 전 분명히 칼라임 타블로이드 기자라고 했잖아요.”

“그야 제 신분을 밝히는 게 신사로서 예의니까.”

“하, 엉터리 소설로 내 약혼자의 명예를 실추시켜놓고 신사라고?”

“그건 은빛 늑대에 관한 기사를 못 쓰게 하니까 화가 나서…….”

파앗!

순간 단검이 남자의 머리 옆에 무섭게 내리꽂혔다. 크리스틴이 어느새 아델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던진 것이다.

깜짝 놀란 아델이 돌아보자 그는 나직하게 명령했다.


“당장 가서 정정 기사 올려.”

“알겠습니다!”

겨우 살아났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그를 보며 크리스틴이 물었다.


“저자가 뭐라고 했지?”

“별말 안 했어. 칼라임 타블로이드 기자라면서 우리 사이를 꼬치꼬치 캐묻기에 겁을 준 것뿐이야.”

“혹시 기사를 본 건가?”

아델은 의자에 앉으며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아까 타냐가 제이드의 편지랑 같이 가져왔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써놨길래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따지려고 했는데 딱 걸린 거지.”

예상외로 아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왜, 내가 상처라도 받을까 봐 걱정했어?”

“좀.”

“사실이 아닌데 내가 왜? 난 당신이 상처받을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어.”

“겨우 그런 걸로?”

“난 억울하게 욕먹는데 내성이 생겼지만, 당신은 영웅이란 찬사만 받아왔으니까.”

“잘 됐군. 이 기회에 당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아델은 명랑하게 소리 내 웃었다.


“아까 그 기자에게 감사라도 할 걸 그랬네.”

그동안에도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곤 했다. 다들 보여주기 쇼를 하는 거다, 아니다, 말이 많았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의 공연보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이 더 흥미로운지도 몰랐다.


“아까 들었는데, 오늘 출연진은 별로라더라.”

아델의 속삭임에 그가 대답했다.


“그럼 나갈까?”

 

***

공연장을 나온 두 사람은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며칠 전보다 한결 따뜻해진 날씨에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변에는 거리의 화가들이 쭉 늘어앉아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크리스, 우리도 그림 그려달라고 하자.”

“우리 그림?”

“그래, 소식지에 실린 말도 안 되는 삽화 때문에 눈 버렸으니까.”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조르니 크리스틴은 수락하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두 사람은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화가의 앞으로 가서 간이의자에 앉았다.


“거, 두 사람 연인 아니에요? 좀 더 다정하게 붙어 봐요.”

나란히 앉은 그들을 보며 노화가가 혀를 찼다.


“이렇게요?”

아델은 크리스틴의 옆으로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기댔다.


“아이, 좀 더 다정하게요. 옆에 커플처럼.”

이제 보니 옆의 커플은 찰싹 달라붙어 서로 쓰다듬고 비벼대며 난리가 났다. 보는 사람들은 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둘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아뇨, 저희는 이대로…….”

얼른 손을 내젓던 아델은 묵직한 팔이 허리를 휘감는 걸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아델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어두웠기 때문인지 다행히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제 됐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만족스럽게 소리친 노화가는 재빠르게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에서 장인의 예술혼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것도 쇼타임이야?”

“아니, 승부욕 발동.”

“하여간.”

하지만 아델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 따윈 잠시 미뤄 둘 수 있었으니까.


“귀엽군.”

문득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아델은 수줍게 웃었다.


“나 이제 귀여울 나이는 지났는데.”

“무슨 소리야?”

“어?”

이제 보니 크리스틴은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기들은 참 귀엽다고. 저런 아기가 귀여울 나이가 지날 리 없지! 호호호!”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는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벅찬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그 옆에서 아기의 부모가 함께 추임새를 넣으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틴은 조용히 웃었다. 참 평화롭고 따뜻한 표정이었다.

제이드와 싸울 때도 그랬지만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델은 상상해 보았다.

나중에 자신들의 아이를 저렇게 함께 응원해주는 모습을.

그 아이가 행복하길 빌고, 힘들 땐 함께 돕고, 절망할 땐 위로해주는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지금은 미뤄두더라도 언젠가는 될 수 있겠지?

생각만으로도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강바람에선 봄기운이 느껴졌고, 멀리 들려오는 악사의 바이올린 소리가 퍽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



“이게 나라고? 와, 눈이 얼굴에 절반이야.”

“그래도 내 가슴에 수북한 털보단 낫군.”

장인의 예술혼을 담은 그 그림은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에 가까웠다. 덕분에 한동안 배를 잡고 웃을 수 있었다.


“잘 간직해야지.”

아델은 그림을 돌돌 말아 가방에 세워 넣었다.


“버려. 아니, 태워버려!”

“싫어. 우울한 날 보면 안 웃고는 못 배길 거야.”

그러더니 냉큼 그의 팔짱을 꼈다.


“그거 알아? 이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계속 팔짱을 끼고 있으면 그 커플은 헤어지지 않는대.”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이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앞까지 와 있었다.


“미신이야.”

“그래도 재밌잖아. 그러니까 크리스, 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 내 팔을 풀면 안 돼.”

미신이라더니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아델의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타박타박.

둘이 걷는 발소리가 박자를 맞추듯 들려왔다. 바람이 불자 파르르 흔들리는 물결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아까 그 아기네.”

걸음마를 하던 아기 식구들도 다리까지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아기는 이제 걸음마를 포기한 듯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다리의 난간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에 놀
란 부모들이 소리쳤다.


“잡아주세요!”

순간 크리스틴은 재빨리 몸을 날려 난간 사이로 몸을 내미는 아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

팔짱이 풀려버렸음을.
 


“괜찮아, 다 미신이잖아.”

아델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난 애초부터 안 믿었어.”

크리스틴도 쿨하게 동조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가는 다른 연인들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크리스, 우리 다시 처음부터 팔짱 끼고 걸을까?”

“됐어. 그만 돌아가자.”

크리스틴이 몸을 돌릴 때였다. 뒤따르던 아델의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과 마주친 것이다.


“또 만나네요, 아델 양.”

“선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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