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달콤한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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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달콤한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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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달콤한 위선
2022.09.30.
이자벨은 근처에서 열게 될 바자회를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라고 했다.
함께 있던 다른 귀부인들도 그들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후원자가 필요하다며 아델에게 바자회에 꼭 동참해달라고도 했다.
크리스틴을 의식해서였는지 황후의 알현실에서와 달리 다들 호의적이었다.
물론 이자벨은 끝까지 도도하고 차가웠지만.
“두 사람 만난 적이 있어?”
이자벨 일행이 돌아가자 크리스틴이 물었다.
“오늘 낮에 황후궁에서.”
“그랬군.”
그 후 크리스틴은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결국 아델은 하루종일 꾹꾹 눌러 삼켰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전대 황제께서도 은빛 늑대에게 돌아가셨다더라.”
“그 말을 믿어?”
“알잖아. 은빛 늑대 얘기라면 내 판단력이 흐려지는 거.”
그러니까 크리스 네가 전부 사실대로 얘기해줘.
“남편을 잃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다 무너진 여자야. 누군가라도 탓하고 싶겠지. 실체가 없는 은빛 늑대라면 아주 좋은 대상이 될 거고.”
그 냉정한 말이 아델에겐 상처가 되었다.
“왠지 나에게 하는 얘기처럼 들리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내가 원망하려고 고른 대상이 있지도 않은 은빛 늑대라는 건가.”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상처받은 아델에겐 그의 표정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리스, 당신 말대로라면 은빛 늑대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잖아.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전부 허상을 봤다는 게 가능할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감정을 숨길 때의 그는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웃던 그의 눈이, 부드럽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당신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리스틴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백작에게 물어봐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은빛 늑대에 관한 기사를 막으려고 드는지.”
“그건 은빛 늑대에 관한 기사를 못 쓰게 하니까 화가 나서…….”
확실히 크리스틴은 은빛 늑대와 관련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아델의 마음이 흔들렸다.
‘만일 저 입에서 은빛 늑대와 관계 있다는 얘기라도 나온다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숨기는 게 있다고 얘기한다면?’
그와의 관계가 산산조각이 나는 건 생각만으로도 두려웠다.
“됐어. 내가 또 예민하게 굴었네.”
고개를 저으며 아델은 다시 그의 팔짱을 끼었다.
‘날 속이고 있다면 당신도 나만큼이나 힘들겠지.’
‘그럼에도 속여야 한다면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델은 스스로 비겁하다는 걸 알았다. 사실은 이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기를 바라기에 그런 이유를 붙여서 덮고 싶은 거니까.
고통스러운 진실보다 달콤한 위선을 택한 것이다.
***
“오페라는 즐거우셨어요?”
“응.”
“이별의 아리아에선 눈물바다가 된다던데 아가씨도 우셨어요?”
“응.”
아델의 머리를 빗겨주며 타냐가 쉴새 없이 질문했다. 그녀도 몹시 보고 싶어 하던 공연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아델의 대답에 영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거울 속의 아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아델은 힘없이 웃었다.
이건 아무리 타냐라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들어가도 되지?”
그때 크리스틴이 방으로 들어오자 타냐는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흐트러진 젖은 머리에 편안해 보이는 리넨 셔츠 차림이었다. 목욕을 했는지 아델의 등 뒤로 다가오자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여.”
거울 속에 비친 아델의 표정을 살피며 그가 말했다.
“많이 걸었더니 피곤했나 봐.”
“머리…… 내가 빗겨줄까?”
“그래 줄래?”
칼을 쥐던 거친 손은 둥그런 빗을 집어 들고 능숙하게 아델의 머리를 빗겼다. 그 손길은 누구보다 부드러웠고, 표정은 한없이 다정했다.
언제나 본인보다 그녀가 더 우선인 사람.
아델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아줄래, 크리스?”
머리를 빗기던 손길이 멈칫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아델은 얼른 덧붙였다.
“엉큼한 생각 금지. 정말 그냥 안아만 달라는 거야.”
“알아.”
그는 양팔을 뻗어 등 뒤에서 아델을 안아주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델만큼이나 그도 복잡한 기분인 것 같았다.
“조금만 시간을 줘, 아델. 언젠가 다 얘기할 테니까.”
“무슨 얘기?”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얘기.”
“그런데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
며칠 후.
꺄아악!
수도 그린힐 한복판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오늘 또 희생자가 나왔다면서요?”
“벌써 몇 명째인지 모르겠어요. 요새는 무서워서 해가 지면 밖을 못 나온다니까요.”
칼라임의 수도 그린힐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요 며칠 거의 매일 참혹한 시신이 발견되었다. 다들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칼라임 타블로이드에선 매일 자극적인 제목과 삽화로 1면을 장식하며 사람들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이 모두가 은빛 늑대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을 찢어 죽일 정도의 힘은 짐승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니까.
많은 사람이 믿으면 그게 진실이 되는 법.
봄이 오는 그린힐은 어느새 은빛 늑대의 공포로 뒤덮였다.
“아가씨, 오늘도 사건이 발생했대요!”
칼라임 타블로이드를 손에 든 타냐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차를 마시던 아델은 얼른 소식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이 소식지를 챙겨보고 있었다.
칼라임 타블로이드에 대한 신뢰도는 낮았지만, 그들이 은빛 늑대에 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늑대와 달리 발톱이 다섯 개라거나, 신비로운 청회색 눈동자라거나, 그 짐승이 사람을 어떻게 단숨에 죽였는지…….
모두 엄마가 죽던 때에 듣던 것과 똑같았다.
어제는 하룻밤 사이에 두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했다.
크리스틴은 황궁 근위대였지만, 황제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근위대도 비상이었다. 그로 인해 며칠째 귀가하지 못했다.
“빨리 놈을 잡아야 할 텐데요.”
타냐가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델은 읽던 소식지를 내려놓았다.
“뭔가 이상해.”
“뭐가요?”
놈은 10년 가까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며칠 사이에 폭주하듯 갑자기 늘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여서 보란 듯이 시내 한복판에서 전시해 놓았다.
단순한 짐승의 짓이라기엔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과시라도 하려는 것 같은 악랄한 의도…….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핸리가 고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
정말 뜻밖의 손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자벨 선황후 폐하.”
전대 황후였지만, 이자벨은 아직도 귀부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오늘은 시녀 한 명 거느리지 않은 채 혼자였다. 옷차림도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수수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의 만남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는다는 뜻.
아델은 타냐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부탁 좀 하려고 왔어요.”
장갑을 벗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자벨은 본론부터 꺼냈다.
“부탁이라니요?”
“바자회에서 판매할 디저트가 필요해서요. 다들 아델 양의 솜씨가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네요.”
“그건 얼마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자세한 일정은 사람을 보내서 전하도록 하죠.”
“정말 그 말씀만 하러 오신 건가요?”
그 순간 이자벨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아델 양이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도 부탁 한 가지는 들어줄 수 있어요. 은빛 늑대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고 했던가요?”
서로 거래를 하자는 뜻인가?
“네, 은빛 늑대에 관해 알고 계시는 정보를 듣고 싶습니다.”
로드웰 공작가의 능력이라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아델 양도 백작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 줘요.”
“백작을 배신하라는 건가요?”
“제의하는 거랍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백작을 러스티스 대공의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얘기죠.”
“……!”
아델은 숨을 삼켰다.
이자벨의 아들 러스티스 대공.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은 그는 전대 황제의 맏아들이었다. 전쟁 중에 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황제가 되었을 인물.
하지만 지금은 칼라임에서도 가장 외지고 쓸모없는 영지의 주인일 뿐이었다. 사실상은 유배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외조부는 귀족회의 수장 로드웰 공작이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으니 로드웰 공작가가 얌전히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예견된 순서.
그래서 얀은 귀족회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톤과 손잡은 것이다.
그리고 로드웰 가문은 황제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크리스틴과 손잡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역자가 되어 달라는 뜻.
너무나 엄청난 얘기에 아델은 덜컥 겁이 났다. 이곳은 마블 궁이었다. 아무리 둘만 있는 자리라도 황궁 안에서 대놓고 반역을 논하다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자벨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웃었다.
“아뇨, 아델 양도 잘 알고 있잖아요. 스톤 오스월드가 부마가 된다면 백작의 입지가 많이 약해질 거라는 것. 그러면 누구와 손잡는 게 이로울지도.”
아델은 다시금 황제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전쟁 중엔 크리스틴을 등에 업고 백성들의 인기를 얻더니, 이제는 정치적 실리를 위해 스톤과 손잡은 것이니까.
이자벨은 다시 달콤한 미끼를 던져왔다.
“우리를 도와준다면 훗날 백작에게 영지의 자치권을 줄 수도 있어요.”
“그 말씀은……?”
“백작의 영지는 공국이 되는 거고, 그대는 대공비가 된다는 얘기죠.”
대공비…….
아델은 그런 호칭 따위 하나도 솔깃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제의는 매우 솔깃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거죠? 며칠 전만 해도 백작을 미워하지 않으셨나요?”
“은빛 늑대가 나타났으니까. 다들 그런 건 없다고 했죠. 하지만 지금 온 시내가 은빛 늑대의 공포로 떨고 있어요. 그러니 내 남편의 죽음도 다시 조사할 명분이 생겼고요. 그렇게 되면 누구보다 백작의 도움이 필요하죠.”
정말로 지금의 황제가 전대 황제를 죽인 거라면, 그들의 생각대로 크리스틴이 그 일에 관여했다면, 누구보다 중요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러스티스 대공은 황좌를 되찾을 충분한 명분을 얻을 것이고.
“만에 하나 백작이 전대 황제 폐하를 시해하는 데 가담했다면…….”
이자벨은 단호하게 말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이 있는데, 칼을 미워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대답이 됐을까요?”
크리스틴의 죄는 일절 묻지는 않겠다는 뜻.
하긴 그들은 전대 황제를 죽인 범인을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시 황좌를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할 뿐!
“뜻은 잘 알았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럼 바자회 때 보도록 하죠.”
호쾌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던 이자벨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아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었다.
“혹시 바이스 백작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걸 본 적 있나요?”
“아니요.”
“딱 한 번 본적이 있어요.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였죠.”
그날의 일을 떠올리려는 듯 이자벨은 미간을 모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온몸에 피를 묻힌 채 거친 숨을 내쉬며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꼭…… 늑대 무리를 이끄는 늑대의 수장 같았거든요.”
“……!”
“은빛 늑대가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