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저 우연히 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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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저 우연히 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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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저 우연히 닮은 걸까?
2022.10.03.
챙! 챙!
반짝이는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경쾌한 금속성이 들려왔다.
“턱을 좀 더 당기시고,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깨가 흔들리면 불필요한 동작이 많아집니다!”
챙!
“시선은 정면, 배에 힘을 주셔야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결국, 아델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며 말했다.
“잠시 쉬죠.”
이자벨이 돌아가고 난 후, 그녀는 몇 시간째 검술 연습 중이었다.
하얀 리넨 셔츠에 몸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머리를 높이 묶은 모습이었다. 앞머리와 셔츠는 땀으로 잔뜩 젖어있었다.
“검술은 춤과 같답니다. 본연의 우아함을 잃고 마구 휘두르기만 한다면 시정잡배의 칼싸움이 되는 거지요.”
검술을 가르치던 백발의 기사는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은 그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잡배의 칼싸움이라도 실전에서 더 쓸모 있는 쪽을 배우고 싶네요.”
백발의 기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만간 전쟁터에라도 나갈 예정입니까?”
아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은 이만하죠.”
백발의 기사가 돌아가자,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레이피어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우아한 검술을 원한 게 아니었다. 어떤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를 원했다.
크리스틴과 함께 지내는 동안 잊고 있었다.
결국 제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슈욱! 슈욱!
다시 날카로운 칼날로 허공을 찌르기 시작했다.
“아델, 네 어머니를 해친 그 은빛 늑대는 말이지, 아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몰라.”
“은빛 늑대가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하네요.”
그 얘기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쓸데없는 잡념을 산산조각내듯 그녀의 동작이 빠르고 사나워졌다.
얼굴이 벌겋게 익고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가 들썩이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아……!”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그대로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콰당!
아델은 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잦아들지 않는 호흡을 가쁘게 내쉬느라 가슴이 요동쳤다.
‘하아,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자벨의 말을 듣는 순간 크리스틴의 모습에서 은빛 늑대가 겹쳐져 버린 것이다.
늑대의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을 때 한순간 그가 늑대로 보였으니까.
은빛 머리카락, 청회색 눈동자…….
우연히 닮은 것뿐인가?
그러나 얼마 전 침실에서 보았던 은빛 늑대가 마음에 걸렸다.
잠결에 꿈을 꾼 거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줄곧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
“저희 단장님의 행동을 이해해주십시오. 단장님은 늑대입니다.”
“뭐 해?”
***
흠칫 놀라서 시선을 들던 아델은 다정한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크리스틴이 머리맡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무슨 멍청한 생각이야. 그는 분명히 사람인데…….’
그가 은빛 늑대를 닮았다는 생각 따윈 멀리 떨쳐버리기로 했다.
“검술 연습하다가 넘어졌어.”
아델은 어리광부리듯 팔을 내밀었다.
“일으켜달라고?”
“응. 혼자선 못 일어나겠어.”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면서도 그녀의 팔을 잡아 순순히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는 땀을 닦으라며 손수건을 주고, 체온이 유지되도록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걸쳐주었다.
“검술은 언제부터 배웠어?”
“사흘 됐어. 미처 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그동안 안 들어왔기 때문이고.”
“아아, 미안.”
“됐어. 바빴잖아.”
“그런데 갑자기 검술은 왜?”
“언젠가 당신이 그랬지. 휘두를 줄도 모르면서 칼을 휘두르면 자해용이 되는 거라고. 적어도 내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옆에 이렇게 훌륭한 수호자를 두고서?”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겼다.
“나흘 만에 돌아와서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네?”
“흠흠!”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보다 오늘은 일찍 귀가한 거야? 아니면 다시 나가 봐야 해?”
“오늘도 못 들어가면 당신에게 쫓겨날 거라고 하고 겨우 빠져나왔어. 그래도 호출이 오면 가봐야 할 수도 있고.”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늦어?”
“범인이 잡힐 때까지.”
“범인이라면 은빛 늑대…….”
그는 아델의 말을 재빨리 끊었다.
“은빛 늑대는 아니야.”
이번에도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럼 짐작 가는 범인이라도 있어?”
“범인은 은빛 늑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괴물이야.”
“괴물?”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다면 사람의 형상을 했어도 그건 괴물이지. 그리고 그 괴물이 지금까지 잠잠했던 건 그동안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고.”
아델은 그 순간 스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끔찍한 사건들은 그가 돌아오고부터 발생했다. 그리고 악랄한 시신의 처리방법도 스톤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아보니 8년 동안 오르비스 왕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어. 파견한 조사관이 돌아오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겠지.”
“진짜 스톤이야?”
“일단은 심증.”
아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몰랐다.
***
나흘 만에 귀가한 크리스틴과 아델은 모처럼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고 설마 화난 거야?”
“어?”
아델은 깜짝 놀라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내 얼굴을 봐주질 않네.”
아델은 거의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멋쩍게 대답했다.
“미안. 뭘 좀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
“스톤 오스월드.”
크리스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있으면서 딴 놈을 생각하셨다?”
“생각해보니까 사실 엄마를 죽인 귀족들을 의심하게 만든 것도 놈이었어. 그런데 당신 추측이 맞다면 엄마를 죽인 진범은 스톤인 거잖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델은 지금껏 그를 의심하지 못한 게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책하지마, 아델. 이제 잡으면 되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럼 놈은 은빛 늑대를 끌고 다니면서 범행을 저지른 걸까?”
“풉!”
크리스틴은 그대로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괜찮아?”
“콜록, 콜록!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얼른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는 아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아델, 은빛 늑대는 누군가가 끌고 다니거나, 길들이거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을까?”
왜?
라는 천진한 얼굴로 아델이 바라보았다.
“그냥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그런가…….”
“당연히 그래야겠지. 보통 늑대와는 다른 존재니까.”
“그럼 스톤과 은빛 늑대가 한패?”
“아닐 것 같은데.”
“그럼 스톤이 은빛 늑대? 아니, 그건 말이 안 되고.”
크리스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델은 다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스톤이 범인이라면 전대 황제를 죽인 건 또 누굴까? 그때 그는 오르비스에 있었을 텐데.”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델은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말했다.
“실은 이자벨 선황후가 당신과 손잡고 싶어 해.”
“뭐?”
“생각해본다고 했지만 나는 찬성이고.”
“아델!”
“스톤이 부마가 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가령 당신이 이 모든 범죄가 스톤의 짓이라는 걸 밝혀내도 처벌이 될까?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게 밝혀졌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결론 났잖아.”
아델의 말에 크리스틴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델은 더욱 조심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만일 전대 황제의 일에 당신이 개입되었다고 해도 선황후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어. 당신의 영지에 자치권을 주겠다고도 했고.”
탁!
크리스틴은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신, 그동안 상당히 위험한 일을 하고 다녔군.”
“아니, 위험한 일은 이제부터 하려고. 황제와 스톤이 손을 잡았으니, 당신 편도 만들어야지.”
크리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아델, 아무 걱정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아델이 발끈했다.
“당신은 날 지켜주겠다면서! 그런데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야? 그저 얌전히 파이나 굽고 침실에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하지만 내 몸 정돈 나도 지킬 수 있어. 상황파악도 못 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그래서 갑자기 검술을 배우는 거야?”
아델은 뜨끔했다.
“뭐, 워낙 어수선한 시국이기도 하고.”
“그렇게 배워서 자기 몸을 지키려면 몇 년이 걸릴 것 같지?”
아델도 그게 불만이긴 했다. 그녀의 스승은 검술을 예술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당신이 실전 필살기 같은 걸 가르쳐주던가.”
말이 나온 김에 아델은 두 눈을 반짝이며 다가들었다.
“그래, 크리스, 당신이 가르쳐주면 되겠네.”
아델이 몇 번 조르자 크리스틴은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단히 옷 챙겨입고 정원으로 나와.”
“네, 백작님!”
아델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모든 끔찍한 사건은 스톤이 범인이었다.
혹시라도 크리스틴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홀가분했다.
그리고 스톤이 범인이라면 꼭 제 손으로 죽여버릴 것이다!
***
“칼은 어딨어?”
밖으로 나온 아델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검술을 가르쳐주는 줄 알고 바지에 부츠를 신고 머리도 묶고 나왔다. 그런데 그의 손은 비어 있었다.
대신 옆에는 늘씬한 그의 애마가 서 있었다.
“잡아. 갈 곳이 있어.”
크리스틴은 훌쩍 말 위에 올라타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 시간에?”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아델을 앞에 태운 채 그는 마블 궁을 빠져나갔다.
번화한 시내에서 벗어나 인적 드문 마을로 들어서자 불빛 하나 없이 사방이 어두웠다.
달빛이 흐릿해서 아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둠 속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저택 앞에서 말을 멈췄다.
끼이익!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철문이 열렸다.
크리스틴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아델은 깜짝 놀랐다.
드넓은 저택 정원 앞에 백여 명의 남자들이 창과 칼을 들고 훈련 중이었다.
저택 입구와 창문 곳곳에는 하얀 늑대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꼈다. 바이스 백작가 소속의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깃발이었다.
외견상 저택으로 보이던 이곳은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훈련소였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단장!”
“여어, 단장님!”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반가워하며 그를 아는 체했다. 그러고는 다들 맞춘 것처럼 일제히 아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크리스틴과 함께 말을 타고 온 아델이 누군지 짐작한 것이다.
“혹시 이분이 소문의 그…….”
커다란 덩치에 금빛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노골적이리만큼 아델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리스틴은 그를 소개했다.
“그래, 내 약혼녀다. 인사해, 아델. W.G 제1부대 단장 제니퍼야.”
W.G는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약어였다.
“풉!”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아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죄송해요, 너무 아름다운 이름이라…….”
말에서 내린 아델이 얼른 사과하자 제니퍼는 눈을 찡긋하며 대꾸했다.
“이해합니다. 제 이름만큼이나 아델 양도 진심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니퍼라고 부르는게 이상하면 ‘금발의 제니’라고 불러주십시오. 여기선 다들 절 그렇게 부른답니다.”
“푸흡!”
아델은 다시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크리스틴은 두 사람이 첫 만남부터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게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이름 갖고 환심 사는 짓은 삼가라고 했을 텐데.”
제니퍼는 아델에게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참고로 단장님은 ‘은발의 크리스틴’으로 불린답니다. 저와는 천생연분이죠. W.G의 쌍두마차라고나 할까.”
“닥쳐라, 제니퍼.”
“아우, 우리 크리스틴 님은 너무 새침데기라니까.”
결국 크리스틴이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나자, 제니퍼는 급히 엄숙하고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물건은?”
“아주 잘 나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