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너를 지키는 게 나를 지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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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너를 지키는 게 나를 지키는 일
2022.10.07.
세 사람은 무기고로 쓰는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어때요, 근사하죠?”
제니퍼가 커다란 나무 상자를 열자, 기다란 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총 한 자루를 집어 든 크리스틴은 이리저리 자세를 취해보며 매의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군. 지난 전쟁에서 적군들이 사용한 머스킷을 플린트 락(부싯돌형)으로 개조했지. 덕분에 훨씬 가볍고 연사가 빨라졌어.”
아델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내게 왜 이걸 보여주는 거야? 설마…….”
“그걸 가져와 봐.”
“그거…… 말씀입니까?”
제니퍼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음.”
잠시 후 제니퍼는 작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은색 몸체에 우아한 조각을 새긴 작고 고급스러운 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이건 새로 개발한 피스톨이야. 머스킷보다 연사력이 좋고 휴대할 수 있지.”
크리스틴의 말에 제니퍼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아직 황실에서도 만져보지 못한 신개발 무기랍니다.”
“크리스, 이걸 설마 나보고 쏘라는 건……?”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며.”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던져!”
크리스틴의 명령에 밤하늘 위로 두 개의 물체가 높이 날아올랐다. 너무 멀어서 아델은 그게 뭔지 잘 볼 수가 없었다.
타앙! 타앙!
순간 천둥 치는 총성과 함께 피스톨에서 불꽃이 발사됐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날아오르던 물체는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먹먹해진 귀를 문지르면서 물체가 떨어졌을 법한 자리로 달려갔다.
“설마 사과였어?”
그곳엔 참혹하게 산산조각이 난 사과가 있었다.
만일 그게 사람이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단시간에 당신 몸을 지킬 수 있으려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어느새 다가온 크리스틴이 무심히 말했다.
“하지만 이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무기잖아.”
“모든 무기는 살생을 전제로 해, 아델. 그러니까 다루는 법을 잘 알아야지. 겁을 줘서 쫓아낼지, 타격을 입힐지, 아니면 단숨에 숨통을 끊을지.”
크리스틴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수없이 사선을 넘나든 그가 하는 말이었기에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뜻을 굽힐 생각이 아니라면 잡아, 아델.”
아델은 머뭇거리다가 그가 내민 피스톨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묵직하긴 했지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결심한 듯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게도 가르쳐줘, 크리스.”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데려와서 사격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얌전히 포기하고 돌아가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전에 이것 하나만 명심해. 당신이 이자벨 선황후를 만나는 걸 막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게 날 위해서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당신이길 바랄게.”
아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모든 건 날 위해서야.”
너를 지키는 게 나를 지키는 일이니까.
“좋아, 오늘은 내가 가르쳐줄게. 내가 없을 땐 여기에 와서 제니퍼에게 배우도록 해.”
“알았어.”
“그리고 절대로 어두워질 때 혼자 오는 일은 없도록 하고.”
“응.”
“그럼 일단 자세부터 잡아. 발은 어깨보다 조금 넓게, 팔은 힘을 빼고, 손은 이렇게 쥐고.”
“이렇게?”
아델은 진지한 얼굴로 크리스틴의 지시를 따랐다.
“좋아.”
“격발 후에는 반동이 심할 테니까 놀라지 말고.”
“어, 알았어.”
바싹 긴장하며 손에 힘을 쥐는 아델의 뒤로 크리스틴이 다가갔다.
“적응될 때까진 내가 잡아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는 아델의 뒤에서 피스톨을 잡은 그녀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아델이 흘끗 올려다보자,
“정면 주시.”
“핫, 넵!”
한편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다.
“제길…… 짐머가 새삼 존경스럽군. 저 꼴을 어떻게 매일 참고 보지?”
사과 던질 준비를 하고 있던 제니퍼가 와삭 사과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다른 기사들도 혀를 내둘렀다.
“저렇게 꿀 떨어지는 단장님이라니. 와, 이중인격. 완전 소름 돋네.”
“아니, 데이트하려면 단둘이 하시지. 오밤중에 왜 여기서 염장을 지르시는 거냐고!”
순간 총구가 그들을 향했다.
“우와 악!”
다들 재빨리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데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던져!”
“옛 썰!”
까만 밤하늘 위로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높이 날아올랐고,
타앙!
시원스러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
바자회 당일.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살인 사건으로 민심은 흉흉했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햇살은 어느 때보다 따사로웠다.
해마다 이자벨은 공원 안의 성당에서 자선 바자회를 열었다. 수익은 전액 고아원에 기부하고 있었다.
“이번 바자회는 못 열리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어요.”
“그러게요. 다행히 호응도 예년과 비슷한 것 같네요.”
“비슷하긴요. 저긴 아주 인기 폭발이랍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 아델이 있었다.
아델은 자신이 준비한 디저트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는 아이들은 물론 여인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지나가던 이들까지 궁금해서 몰려들었다.
“당근이 싫다고? 이건 당근으로 만든 케이크인데.”
“먹어볼래요!”
“우리 꼬마 아가씨는 시금치 쿠키가 어떨까? 먹으면 힘이 아주 세질걸?”
“저도요, 저도요!”
아이들이 경쟁하듯 아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델은 줄곧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저도 먹어볼 수 있을까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화사한 얼굴의 에이프릴이 웃고 있었다. 그 뒤에 세이라도 그림자처럼 함께였다.
***
에이프릴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은 성당 안의 중정으로 나왔다. 3층 높이의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에도 봄 햇살이 고즈넉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날, 어마마마 때문에 기분 상했죠?”
그날? 아, 얼마 전 귀부인들 앞에 불러놓고 조롱거리로 만든 일 말인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폐하가 원하신 만큼 상처를 받지는 않았어요. 워낙 내성이 생겨서요.”
“대신 사과할게요. 나 때문에 어머니가 아델 양을 미워하게 된 거니까.”
에이프릴이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줄은 몰랐다.
“괜찮습니다. 제가 감당할 몫이니까요.”
그러자 에이프릴은 저만치 물러서 있는 세이라를 흘끗 보더니 작게 물었다.
“그런데…… 후작과는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죠? 아, 오해 말아요. 그냥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니까.”
역시 그걸 묻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황녀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에이프릴은 한시름 놓은 눈치였다. 한동안 아델과 스톤이 부정한 관계였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아델은 그런 에이프릴이 안타까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동생처럼 느껴져서.
“혹시 혼인 날짜는 정해지셨나요?”
“봄이 끝나기 전에 할 것 같아요. 그분도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고요.”
그분…… 이라고 말할 때 에이프릴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스톤에게 푹 빠진 게 분명했다.
하기야 교활한 그가 어수룩한 황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니까.
“혼인은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평생 배우자가 될 사람인데 좀 더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에이프릴을 위한 조심스러운 충고였다.
크리스틴이 스톤의 범죄 증거를 찾고 체포하려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 전에 에이프릴과 결혼식이라도 올리면 모든 게 복잡해질 것이다.
물론 제일 복잡해지는 건 에이프릴이 될 것이고.
“그 말에 속지 마세요, 황녀님!”
어느새 세이라가 바로 뒤에 와 있었다. 에이프릴의 옆에 딱 달라붙은 그녀는 아델을 흠집 내기 시작했다.
“아델 양은 누구보다 이 혼인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아시잖아요. 두 분이 혼인하면 바이스 백작의 입지가 흔들린다는 것.”
아델은 어이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에이프릴에게 스톤 오스월드가 어떤 끔찍한 인간인지 전부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런 얘기가 들릴 리 없을 것이다. 괜히 더 미움받게 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세이라가 멋대로 지껄이게 둘 순 없었지만.
“글쎄. 백작의 입지가 흔들릴지 더 강해질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폐하의 뜻을 누가 알겠어.”
“무슨 소리야, 그게?”
“왜, 궁금해?”
팽팽하게 맞선 아델과 세이라의 사이에서 에이프릴은 난처해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정치 얘기가 나오는 게 제일 싫었다.
“그럼 두 사람은 얘기들 나누세요. 전 큰 어머님을 좀 뵈어야겠네요.”
***
“폐하의 뜻……이라니?”
에이프릴이 도망치듯 사라지자 세이라가 물었다.
“지금 그린힐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일 거 같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지난 8년 동안 오르비스 왕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면?”
잠시 멈칫하던 세이라가 발끈했다.
“미, 미친!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하지만 아델은 서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너희 집 지하실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
“있긴 뭐가 있어. 잘난 지하실 마님의 숙소가 있지.”
“그리고 납골묘지가 있지.”
“그래, 그게 왜!”
“내가 지내던 숙소에는 오스월드가의 납골묘지랑 연결된 통로가 있었어. 내 방 아래가 묘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지. 그래서 아래층엔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했어.”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그때 일을 한탄하고 싶은 거면 잘난 바이스 백작님께 하라고. 난 바빠서 이만.”
세이라가 짜증을 내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납골묘지에 갔었어.”
세이라의 걸음이 멈칫했다.
아델은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백골들을 봤어.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명은 됐을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세이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땐 놀라서 아무 생각도 못 했어. 그런데 요 며칠 생각해보니까 너무 이상하더라. 오스월드가 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버려뒀을 리 없으니까. 하인들은 그곳에 묻지 않았고, 짐승이라면 거기에 따로 모아둔 것도 이상하고.”
크리스틴의 얘기를 들은 후 아델은 스톤이 범인이라는 단서가 될만한 걸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그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는 그냥 끔찍하다고만 생각하고 도망쳐버렸지만.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상관인데?”
“8년 전에도 지금처럼 희생된 이들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거지.”
세이라는 불에 덴 것처럼 펄쩍 뛰었다.
“미친 소리 작작 해! 이건 은빛 늑대가 범인이야! 칼라임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고! 우리 가문에 앙심을 품고 수작 부릴 생각이라면 가만 안 둬!”
세이라가 소리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그런 세이라를 향해 아델은 분명하게 말했다.
“범인은 은빛 늑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괴물이지.”
“아니, 나는 범인이 은빛 늑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괴물이라고 생각해. 그 괴물은 바로 네 옆에 있고.”
“……!”
잠시 움찔하던 세이라는 곧 불같이 화를 냈다.
“개소리 작작 지껄여! 아무리 백작의 약혼녀라도 우리 가문을 모욕하면 귀족회를 통해 정식으로 항의할 거야!”
세이라의 협박에도 아델은 흔들리지 않았다.
“너야말로 잘 생각해봐, 세이라. 그 괴물은 점점 더 위험해질 거야. 너와 가문이 먹히기 전에…… 네가 오스월드가를 구하는 방법도 있겠지.”
“내가 오스월드가를 구해?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럼 이만.”
아델은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섰다.
그러다 중정 옆의 회랑에 서 있는 이자벨과 마주쳤다.
설마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던 걸까?
“여기 있었군요. 에이프릴이 세이라 양을 기다려서요.”
우아하게 웃는 이자벨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함께 ‘샤넬의 집’에 드레스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봄 신상품이 나왔다고 해서.”
세이라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
“저도 이만 자리로 가볼게요.”
그런 아델을 이자벨이 붙잡았다.
“잠시 얘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역시 얘기를 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