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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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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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을까?
2022.10.10.
“그래서 백작은 오스월드 후작이 범인이라던가요?”
둘만 남게 되자 이자벨은 대놓고 물어봤다.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오르비스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좀 더 조사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그럼 은빛 늑대의 소행은 아니다?”
“오스월드 후작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더 많으니까요.”
이자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글쎄요. 은빛 늑대가 바이스 백작과 닮았다고 하니까 용의 선상에서 지우고 싶어진 건 아니고요?”
아델은 뜨끔했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부인했다.
“은빛 늑대가 백작과 닮은 게 무슨 상관이죠? 저는 증거를 갖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증거가 오스월드 후작을 가리키고요.”
“하지만 내 남편이 죽던 시기에 오스월드 후작은 오르비스 왕국에 있었죠. 적어도 남편을 죽인 건 후작이 아니에요.”
“역시 은빛 늑대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단숨에 사람을 찢을 정도의 괴력을 가진 짐승이니까요. 아델 양의 어머니도 그렇게 당한 거 아니었나요?”
“……!”
아델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이자벨은 혀를 찼다.
“미안해요.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괜찮습니다. 진짜 범인을 잡을 수만 있다면…….”
“한 가지만 묻겠어요. 아델 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내 남편이 죽던 사냥터, 또 지금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그린힐. 오스월드 후작과 바이스 백작, 누가 더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었을까요?”
순간 알 수 없는 비수가 아델의 심장을 찌른 것만 같았다.
“지금 백작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말을 하는데 아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 역시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아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크리스틴은 며칠씩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제일 먼저 찾아와 위로해 줘야 했을 사람이.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그만큼 아니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나도 증거를 갖고 말하는 거랍니다. 그들을 해친 수법은 동일하니, 모두 같은 이의 범행이라고 본다면 후작보단 백작이 더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하지만 조금 전 괴력을 가진 짐승의 소행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백작을 의심하시죠?”
혼란스러워하는 아델에게 이자벨이 차분하게 말했다.
“늑대 일족이라고 들어봤나요?”
“늑대 일족…… 들어보긴 했어요.”
아주 오래전에 그런 종족이 살았다고 듣긴 했다. 아델도 은빛 늑대가 늑대 일족과 연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 관련된 자료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교황청에서 늑대 일족에 관한 이야기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벨이 말했다.
“늑대들을 부릴 수 있는 강한 종족이었다죠.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고, 늑대로 변하기도 하고. 늑대로 변했을 땐 사람처럼 다섯 개의 발톱을 지녔다더군요. 엄청난 힘과 흉포하고 잔인한 습성 때문에 결국 일족들끼리 싸우다가 멸족된 거라고 해요.”
“그건 그저 신화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신화라고요?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이 늑대 일족의 짓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아델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설마 바이스 백작이 늑대 일족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
이자벨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못 짚으셨네요. 그가 어린아이일 때부터 함께 자랐어요. 지금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요. 그렇다면 제가 모를 리 없죠. 절대 아니에요!”
강하게 부인하면서도 아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설마 언젠가 침실에서 보았던 은빛 늑대는 꿈이 아니라…… 크리스틴……?’
아니야. 절대!
아델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자벨이 엷게 웃으며 돌아섰다.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했던 얘기도 잘 생각해보길 바라요.”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넋 놓고 벤치에 앉아 있던 아델은 발아래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햇살에 나풀거리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크리스틴.
너무나 신비로워서 가끔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곤 했었다.
그가 정말 은빛 늑대일까?
그래서 은빛 늑대에 관해 얘기하는 걸 싫어했던 걸까?
“뭐 해, 여기서?”
“크리스…….”
크리스틴이 장난스럽게 콧등을 찡긋했다.
“바자회 한다길래 겨우 시간 내서 와봤더니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는 거야?”
“그러게.”
아델은 힘없이 억지로 웃었다.
“어디 아파?”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손을 내밀어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 순간!
아델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얼굴이 창백해.”
“조금 전 세이라가 다녀갔어. 말싸움하느라 먹은 게 체 했나 봐.”
“어쩐지. 몸이 차가워.”
그는 주저 없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아델을 감싸주었다.
“얼른 일어나. 의사에게 가자.”
아델은 제 일이라면 호들갑스러워지는 그를 얼른 진정시켰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바자회 준비로 무리했나 봐.”
“하긴, 사격 연습도 매일 했다며. 바자회 준비까지 하면서 무리했겠군.”
아델은 고개를 들어 크리스틴을 빤히 보았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그가 아델의 거짓말은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자신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모르고 이렇게 걱정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아델은 앞에 서 있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에 대한 의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러고 있으니까 피곤이 풀리는 거 같아.”
“더 피곤이 풀리는 얘기를 해줄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아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넘기며 그가 웃었다.
“당신이 만든 디저트는 벌써 매진이던걸.”
“와.”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자. 선황후에겐 이미 다 얘기해놨어.”
“그분이 별 얘긴 없으셨지?”
“별 얘기?”
“아니야.”
아델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하긴 지금까지 크리스틴을 의심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던 이자벨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 아는 척할 리가 없었다.
***
아델은 크리스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좌석 한쪽 옆에는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이 있었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말했다.
“오늘 오르비스 왕국에 파견한 조사관의 보고서가 도착했어.”
“뭐래? 스톤의 짓이래?”
“음, 이번 사건과 살해 방법이 거의 일치해. 이번처럼 시신을 전시해 놓은 건 아니지만, 스톤이 있던 외교 공관 근처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이 대량으로 발견됐어. 오르비스 정부에선 그를 범인으로 봤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외교 문제로 번질까 봐 추방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고.”
“보고서…… 봐도 될까?”
“미안. 보안상 그건 힘들어.”
“알았어.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아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자벨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크리스틴을 의심했었으니까.
지금 아델에겐 스톤이 범인으로 잡혀서 처벌받는 것보다, 스톤이 진범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크리스틴이 이번 사건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확신이.
그때 크리스틴의 신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스톤은 쉽게 처벌받지 않을 거야. 당신 말대로 황녀와 혼인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까. 결정적인 증거를 모아서 단숨에 쳐야지.”
“그럼 오스월드가 지하의 납골묘지를 한 번 조사해봐.”
“지하 묘지?”
“얼마 전 생각났어. 그곳에 신원미상의 백골들이 쌓여 있었던 게. 당신 얘기를 듣고 나니 그 백골들도 희생자였을 것 같아.”
아델의 말에 크리스틴의 눈이 빛났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야.”
“빨리 조사해야 할 거야. 오늘 세이라에게 얘기했으니 어쩌면 스톤의 귀에 들어갈지도 몰라.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무슨 소리야?”
“세이라를 좀 자극해놨거든. 그 애의 성격을 이용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
아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크리스틴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스톤과 오스월드 가에는 사람을 붙여뒀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올 거야.”
“역시 능력자.”
“이제 알았어?”
크리스틴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면 꼭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아델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스톤이 은빛 늑대였을까?”
씩 웃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지, 그게?”
아델은 그를 떠보듯 얘기를 꺼냈다.
“늑대 일족…… 들어 본 적 있어?”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건 감정을 숨길 때의 눈빛.
아델은 그게 왠지 불안해졌다.
은빛 늑대의 얘기만 나오면 저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대체 뭘 숨기는 거야, 크리스.
“……들어보긴 했어.”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고, 늑대로 변하기도 한 대. 다섯 개의 발톱과 엄청난 힘으로 단숨에 사람을 해칠 수 있고. 희생자들을 보면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그렇게 만들 수 없었어.”
아델은 자신의 바람이 신빙성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스톤이 범인이고 은빛 늑대인 거야. 그래야만 해.
“그러니까 스톤이 늑대 일족이고, 은빛 늑대라면 그런 짓을 한 게 설명이 되지.”
“아델…….”
크리스틴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아델은 생각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죽인 것도, 전대 황제를 시해한 것도, 이번 사건까지 모두 놈의 짓이 분명해. 놈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야. 반드시 잡아야지.”
“아델! 날 좀 봐.”
결국 크리스틴이 그녀의 뺨을 감싸며 자신을 보게 했다.
아델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지? 네가 은빛 늑대라니. 그건 말도 안 되잖아.’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어…….
“그래, 스톤이 늑대 일족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조사할게.”
“만일 놈이 늑대 일족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교황청에서 직접 심문할 거야. 오스월드 가는 몰락할 거고. 그리고…….”
크리스틴은 하던 말을 멈추고 아델을 응시했다.
“그가 늑대 일족이었으면 좋겠어?”
“응. 그래서 오스월드가 따위 몰락해 버렸으면 좋겠어. 짐승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람의 행세를 한다는 건 너무 끔찍하니까.”
“역시…… 그렇겠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틴의 표정이 어두웠다.
‘크리스, 왜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이야? 당신하고 상관있는 일처럼.’
아델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어머니를 죽인 게 늑대 일족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너무 끔찍한 존재였다.
사람을 단숨에 그렇게 만드는 짐승이라니.
그런데 만에 하나 크리스틴이 정말 늑대 일족이라면 어떡하지?
그가 은빛 늑대라면…….
“마블 궁으로 갈까?”
크리스틴이 물었다.
“아니, 사격장으로 가줘.”
***
“타앙! 타앙!”
푸른 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허공으로 높이 던져진 사과는 모두 아델의 피스톨에 맞아서 떨어졌다.
“오, 정말 천잰데요! 이렇게 실력이 빨리 늘다니.”
제니퍼는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진 사과를 보며 물개박수를 쳤다.
“모두 스승님이 훌륭해서죠.”
아델은 겸양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사실 그 말씀을 해주시길 바랐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단장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크리스틴을 돌아보았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아델의 사격 실력이 말도 안 되게 늘었다. 물론 그녀의 뛰어난 재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훌륭한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자 뒷짐 진 채로 조용히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제니퍼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대로 아델을 향해 사정없이 던졌다.
“……!”
타앙!
깜짝 놀란 아델은 재빨리 조준하며 총을 쏘았다.
총알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사과는 아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사과를 던졌다.
타앙! 타앙! 타앙!
아델이 허겁지겁 총을 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