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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오묘한 어른들의 세계 (73/155)


73화. 오묘한 어른들의 세계
2022.10.14.



“하아, 하아!”

숨이 차서 헐떡이는 그녀에게 크리스틴은 매몰차게 나무랐다.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이었나? 예상치 못하게 날아오는 물체는 빗맞히지도 못하는 실력을 갖고.”

아델보다 제니퍼가 더 발끈했다.


“미치신 거 아닙니까? 겨우 일주일 지났다고요!”

“하, 쏘는 방향에 맞춰서 던져줘 놓고 천재라고?”

“그야 처음엔 자신감도 중요하니까요.”

제니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에 크리스틴이 매섭게 나무랐다.


“아델이 여자고, 내 약혼녀라서 비위를 맞춰준 게 아니고? 제니퍼 네놈이 그렇게 아부를 잘하는 줄은 몰랐군.”

결국, 아델은 총을 든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정말인가요, 제니퍼 경?”

“그렇긴 하지만 지금도 매우 잘하고 계신 겁니다. 진짜 재능 있어요.”

아델은 크리스틴을 노려보며 제니퍼에게 말했다.


“아뇨, 빌어먹게도 단장님의 말이 맞네요. 적은 예상치 못하게 공격해 올 텐데 자신감보다는 실력으로 상대해야겠죠.”

제니퍼는 황당해하며 입을 벌렸다.

아델까지 크리스틴을 편들 줄은 몰랐으니까.

이거 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건지…….


“예, 예,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지옥 훈련을 기대하십시오! 그럼 잠시 쉬죠. 뒤가 몹시 마려워져서.”

저벅저벅 사격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토라진 모양새였다.

***

제니퍼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아델은 계속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그럼 당신이 제대로 가르쳐줘 봐.”

“됐어. 몸도 안 좋다며 오늘은 그만 쉬어.”

돌아서는 크리스틴의 앞을 그녀가 막아섰다.


“아니, 스톤이 은빛 늑대일지도 모르는 마당에 쉴 수는 없지. 그런 끔찍한 짐승을 상대하려면 이 실력으론 어림도 없을 테니까.”

“하, 당신이 직접 상대하려고?”

크리스틴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철컥!

아델은 앞을 향해 총을 겨눴다. 눈앞에 죽이고 싶은 원수라도 있는 것처럼 잔뜩 노려보면서.


“짐승이든 뭐든 엄마를 죽인 놈은 절대 용서 안 해. 내 손으로 직접 끝낼 거야.”

크리스틴은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총을 겨눈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요염하기까지 했다.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발전하다니. 제니퍼 놈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도 했다.


“그래, 누가 됐든 망설이지 마.”

“크리스!”

아델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의 총구 앞으로 크리스틴이 다가온 것이다.


“비켜. 위험해!”

그는 팔을 뻗어 아델의 피스톨을 움켜쥐며 제 이마에 겨누게 했다.


“놈이 끔찍하게 증오스럽다면 여기를!”

“크리스, 제발 이거 놔!”

그는 이번엔 그 총구를 제 심장에 가져다 댔다.


“만일 놈에게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생긴다면 여기를…… 쏴.”

겁을 먹고 당황하는 아델과 달리 그는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마치 총을 쥐고 있는 게 자신인 것처럼.


‘그래, 네 말대로 주저 없이 쏘는 거야, 아델!’

크리스틴 역시 아델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은 스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그 숲에는 자신도 있었으니까.

짐승으로 변이가 시작되어 폭주하던 그 날에.


‘그러니까 아델, 만에 하나 내가 범인이라면…… 날 쏴. 용서하지마.’

짜악!

크리스틴이 피스톨을 놓기 무섭게 아델의 매서운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미쳤어! 무슨 짓이야! 내가 실수로 방아쇠라도 당기면 어쩌려고!”

아델은 아직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팔다리까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맞은 건 그였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울먹이는 것은 그녀였다.


“그럴 일은 없었어. 내가 안전장치를 잡고 있었으니까.”

“안전장치를……?”

“그래, 몰랐어?”

사람을 지옥 문턱까지 떠밀어 놓고서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난이었다는 듯.

그 표정이 얄밉게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정말 심장에 해로운 남자.


“몰랐어. 너무 놀랐으니까.”

아델은 울컥해져서 노려보았다.


“손찌검 한 대로는 부족하다는 표정이네.”

“눈치가 빠르네.”

그 순간 아델은 피스톨을 내려놓고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크리스틴의 뺨을 감싸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

놀란 그가 잠시 움찔했지만, 곧 아델의 입술을 사납게 집어삼켰다.

거친 숨결이 뜨겁게 얽혔다.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 이게 맞는 건지.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아델은 이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늑대 일족일지도 모르는데,

어머니를 죽인 짐승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용서할 수 없는데…….

그런데 조금 전 자신의 총구 앞에 서 있는 크리스틴을 보자 그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자칫해서 그가 총에 맞기라도 하면……!’

그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자신이 잘못되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만일에 말이야, 크리스…….

네가 늑대 일족이라면, 내 엄마를 죽였다면…….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을까?


 

***

대저택을 둘러보던 짐머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다음에 올 땐 꽃모종을 좀 사 와야겠어.”

이곳은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 소속 ‘W.G 제1부대’ 훈련소였다.

지금껏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주력 무기는 검이었다. 크리스틴 역시 칼라임 제국 제일의 검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비밀리에 머스킷을 개조한 최신 무기를 도입해왔다. 그리고 제1 부대원들을 저격수로 훈련 시키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몰락한 귀족의 대저택을 사들여 특별 훈련소로 꾸민 곳이 여기였다.


“아무리 사내들의 훈련소로 쓰는 저택이라도 너무 삭막하군.”

이제 곧 봄이 코앞이었는데 제대로 된 꽃 한 송이조차 필 것 같지 않았다.

봄은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 아니던가!

꽃이 만발한 저택을 상상하며 짐머가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염병!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에잇 이거나 먹어라!”

투덜거리던 제니퍼는 하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힘차게 내뻗었다.


“무슨 일 있었나?”

짐머는 형식적으로 물었다.

크리스틴과 제니퍼는 죽이 잘 맞다가도 원수처럼 으르렁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관계였다.

또 보나 마나 별것 아닌 일로 다퉜으리라.


“단장님 말이야, 저 괴팍한 성격이 약혼녀 앞에선 좀 달라졌나 싶더니 여전하더군. 봄이 가기 전에 아델 양이 도망친다에 내 새로 산 속옷을 걸지.”

“속옷은 됐고, 단장님이?”

의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델에게만은 닭살이 돋도록 늘 다정한 크리스틴이 아니던가?


“그래, 약혼녀를 이 기회에 아주 용병으로 만들 생각인 모양이더군.”

“설마.”

“진짜라니까. 궁금하면 가서 직접 보라고. 아주 지옥 훈련을 시킬 모양이야.”

짐머는 조금 우려스럽긴 했다.

오면서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전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냉랭했었으니까.

***

찰싹!

걱정이 되어 사격장에 들어온 두 사람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상상도 못 할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아델이 크리스틴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 것이다.

크리스틴이 누구던가?

허우대는 저렇게 멀쩡해 보여도 전쟁터에선 악귀라고 불렸다. 적들이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깃발만 봐도 줄행랑을 친 건 절반은 크리스틴이 두려워서였다.

아무리 약혼녀라도 그런 크리스틴의 뺨을 때리다니.

물론 그가 매를 벌었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두 사람은 얼른 달려가서 아델을 구해야 하나, 그러면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때였다.


“우욱, 우, 웃었어!”

제니퍼는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가 뺨을 맞은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맞고는 웃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살짝 맛이 간 것처럼 보이지 않아?”

제니퍼의 말에 짐머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글쎄, 맛이 갔다기보다 일종의 애정 표현이 아닐까 싶군.”

“뭐! 애정 표현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던 제니퍼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이번엔 크리스틴의 뺨을 때린 아델이 그대로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힉! 끅!”

그는 딸꾹질이 나오는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이건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상황종료 됐어. 나와.”

짐머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제니퍼는 저 멀리서 펼쳐지는 어른들의 세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이 나이를 먹도록 여자와 손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순수 청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나무 뒤에 숨어 구경하느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크리스틴의 매서운 시선이 꽂혔다. 눈빛만으로도 찢어 죽일 기세였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제니퍼는 사격장을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제니퍼가 인상을 썼다.

조금 전만 해도 살벌해서 둘 사이에 무슨 사달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뺨까지 얻어맞아 놓고서 키스라니.

그것도 이렇게 벌건 대낮에, 사방이 훤히 뚫린 곳에서, 낮 뜨거울 정도로 격정적인.

게다가 크리스틴은 그들을 노려보면서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 표정은 당당하고 오만하며 어딘가 야릇해서 보는 사람이 더 낯이 뜨거웠다.


“단장님 말이야, 사실 저런 취향이었던 걸까?”

제니퍼의 물음에 짐머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취향이라니?”

“맞으면서 쾌락을 느낀다거나, 맞는 걸 좋아한다거나, 맞아야 흥분된다거나…….”

제니퍼의 말에 짐머는 턱을 괴며 진지한 얼굴로 고민해 보았다.


“글쎄, 두 분 사이의 일은 나야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뭔데?”

“아델 양이라면 항상 불타오를 준비가 됐다는 거.”

“젠장, 어른들의 세계는 오묘하군!”

 

***



“아!”

드레스를 벗던 아델은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옷 갈아입는 걸 돕던 타냐가 얼른 다가들었다.


“괜찮으세요?”

오른 손목을 어루만지며 아델이 쓰게 웃었다.


“오늘은 괜찮다는 말을 못 하겠네.”

“악, 손목이 엄청나게 부으셨어요. 오늘도 사격 연습하신 거예요?”

“응.”

“오늘은 정말 심각하네요. 이러다 총도 쏘기 전에 손목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그 정돈 아니야.”

“가서 얼음주머니랑 약 갖고 올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세요!”

아델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킨 후 타냐는 얼른 침실을 나갔다.


“후우.”

아델은 얇은 슈미즈 차림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격 연습을 하고 나면 격발 후 생기는 반동 때문에 늘 손목이 아팠다. 그래도 최근엔 요령이 생겨서 찜질하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크리스틴이 던지는 목표물을 맞히는 데 집중하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가는 것도 몰랐다.

그래도 결국 그의 비웃음을 샀지만.


“나쁜 놈…….”

“나 말인가?”

아델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타냐가 가지러 갔던 얼음주머니와 약이 담긴 상자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거기 두고 가.”

약점을 들킨 것만 같아서 아델은 일부러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며 도도하게 말했다.


“팔, 이리 내.”

“됐어. 별거 아니야.”

“그럼 이번엔 내가 덮칠 차례인가?”

“뭐?”

“아까 깜짝 놀랐거든. 갑자기 덮치더니 키스를 당해버려서 말이야. 갚아줄까 해서.”

능청스럽게 웃는 크리스틴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델은 인상을 썼다.

사격장에서 그런 상황에 그렇게 키스를 해버릴 줄은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변명하자면 그때는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고 여러 가지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과 원하는 마음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니 일종의 폭주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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