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스톤을 잡을 수 있을까?
(74/155)
74화. 스톤을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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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스톤을 잡을 수 있을까?
2022.10.17.
“그땐 너무 놀라서 경황없었어. 그냥 사고 같은 거였어.”
“이해해. 너무 굶주리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치거든.”
“굶주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 난 그냥 입술만 닿을 생각이었는데 무섭게 달려든 게 누군데.”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아델은 괜히 그를 탓했다.
“난 굶주린 거 맞고. 요새 바빠서 본의 아니게 금식 중이었으니까.”
헉!
“그런 말, 너무 아무렇지 않게 좀 하지 말래?”
“진짜야. 언제 이성을 잃고 폭주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아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폭주하며 달려들 거라고 경고하듯이.
아델은 침대에서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안 돼. 월례 행사 중이거든.”
딱!
그가 웃으며 아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농담이야. 팔이나 이리 내.”
그러고는 침대 옆에 의자를 드르륵 끌어다 앉았다.
“농담치곤 표정이 너무 진지했어.”
아델은 투덜거리며 그의 앞에 새하얀 팔을 내밀었다. 백자처럼 희고 가느다란 팔은 손목이 벌겋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걸 본 크리스틴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많이 아팠겠네.”
“누구 덕분이지.”
그는 아델의 팔목에 허브로 만든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꼼꼼하게 감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얼음주머니로 찜질을 해주었다.
“사격 연습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해도 좋아. 하지만 스톤은 내가 잡을게. 그러니까 당신은 위험하게 나설 생각 마.”
“아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아델의 초록빛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빛났다.
크리스틴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만일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게 놈이라면 마지막 숨통을 끊는 건 당신에게 맡길게.”
“만일이 아니라 놈이 분명해.”
꼭 그래야만 했다.
“응, 놈이 분명 할 거야.”
잠시 후 그는 약과 붕대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그럼 난 가볼게.”
“어딜……?”
아델이 놀라서 쳐다보자 그가 엷게 웃었다.
“월례 행사라며. 아무 짓도 안 하고 당신 옆에서 자는 거 괴롭거든. 특히 굶주린 상태에서.”
아델은 살며시 눈을 흘기며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알았어, 잘자.”
“응, 좋은 꿈 꾸고.”
그는 너무나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너무나 쿨하게 돌아섰다.
그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월례 행사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아델에 관한 일이라면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잠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리라.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게 두려워.”
아델은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 진짜 이유를.
역시 그는…… 늑대 일족인 걸까?
***
아델의 침실을 나오는 크리스틴은 가면을 벗은 것처럼 표정이 어두워졌다.
“짐승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람의 행세를 한다는 건 너무 끔찍하니까.”
낮에 아델이 했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짐승.
그녀에게 자신은 어머니를 죽인 그 짐승들과 다를 바 없겠지?
그래서 차마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스톤이 이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때 복도 끝에서 짐머가 얼른 다가왔다.
“오스월드가에서 온 보고입니다.”
“보고해.”
“아직까지 납골묘지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스톤은 부재중이고, 문이 단단히 잠겨 있어서 섣불리 들어가기도 쉽지 않고요.”
“스톤에게 붙인 미행은?”
“그게…… 헬밸리에서 놓쳤답니다. 아무래도 눈치챘던 것 같습니다.”
“그가 또 범행을 저지를지 모르니 빨리 찾도록!”
“네, 단장님!”
***
다음 날 아침.
근위대 정복 차림의 크리스틴은 성큼성큼 황실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의 옆구리에는 두툼한 서류 더미가 끼어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요 며칠 잠잠하던 살인 사건이 어제 다시 발생한 것이다. 이번엔 황궁에 식자재를 납품하러 온 상인이 죽었다.
그로 인해 아침이 밝기도 전에 어전 회의가 소집되었다.
“여, 오랜만이네. 바이스 백작.”
스톤이 저만치에서 손을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누가 보면 오랜 벗을 만나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물론 크리스틴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후작.”
외교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스톤은 아직까지 따로 직책이 없었다. 그러니 어전 회의에 소집 대상이 아니었다.
“폐하를 도와 국정의 전반적인 상황을 챙기는 것도 부마의 몫이 아니겠나?”
“부마라…… 그렇게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요.”
“왜, 나를 음해라도 해서 이 혼인을 막아보려고?”
“음해라고요?”
지금도 스톤에게선 끔찍한 피비린내가 났다.
그래놓고 음해라는 말이 나오다니!
“네놈이 오르비스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지? 그걸 내가 한 짓으로 짜 맞출 생각이 아닌가?”
“저는 증거만 제시할 뿐, 판단은 대신들과 폐하의 몫이겠지요.”
스톤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안타깝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냉철하지 못해. 대신들과 황제 폐하라도 말이야.”
크리스틴이 경계하며 바라보자 스톤은 바싹 다가들며 속삭였다.
“자네도 알잖나? 이 모두가 은빛 늑대의 짓이라는 걸.”
“그, 무슨?”
크리스틴은 불길한 기분에 회의장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
“대대적인 토벌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린힐은 물론 수도 인근의 늑대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합니다!”
크리스틴이 어전 회의장에 들어서자 대신들은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황제의 앞에는 황궁 경비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다들 여기저기 다치고 붕대를 감은 상처투성이의 몰골이었다.
“은빛 늑대를 직접 봤다?”
얀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예, 비명을 듣고 가보니 피투성이 시체와 은빛 늑대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잡으려고 했지만, 무섭게 날뛰며 공격하더니 바람처럼 도망갔습니다.”
“그래, 어디로?”
얀의 물음에 그들은 스톤을 흘끔 쳐다보더니 얼른 대답했다.
“마블 궁 쪽입니다!”
“마블 궁?”
얀이 확인하듯 재차 묻자 그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히 마블 궁이었습니다.”
“저희 모두가 봤습니다. 그런데 마블 궁 주변을 아무리 수색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지요.”
증언이 끝나자 대신들의 불안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설마 은빛 늑대가 아직도 황궁에 있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마블 궁이라면 근위대들이 못 봤을 리 없지요.”
“누가 압니까. 보고도 못 봤다고 했을지.”
“근위대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글쎄요. 왜 그러는지는 본인들만 알겠지요.”
대신들은 크리스틴을 흘끗거리며 은근히 의심하기까지 했다.
스톤이 그동안 크리스틴과 은빛 늑대가 연관 있다는 소문을 꾸준히 퍼트리고 다닌 것이다.
게다가 칼라임 타블로이드를 비롯해 크고 작은 소식지까지 크리스틴과 은빛 늑대의 연관성을 꾸준히 제시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이 닮았다는 것도 사람들을 믿게 하는데 한몫했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얀의 준엄한 고함에 소란이 잠시 잦아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다시 모이겠소. 근위대장은 짐을 따라오도록.”
***
“역시 자넨가?”
집무실에서 둘만 있게 되자 얀이 물었다.
대답 대신 크리스틴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툼한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지난 8년 동안 오르비스 왕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입니다.”
그가 내민 서류를 넘겨보던 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모두 스톤의 짓이라는 건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처음 경비병을 살해한 것도 스톤 오스월드라고. 그 당시 스톤은 오르비스 왕국에서 추방당해 이미 그린힐에 와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은빛 늑대의 짓이라고 떠들지 않나!”
“소문을 퍼트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크리스틴은 문밖을 향해 명령했다.
“끌고 와.”
벌컥!
문이 열리고 곧 짐머와 근위대가 들어왔다. 그들은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을 얀의 앞에 무릎 꿇렸다. 조금 전 은빛 늑대가 마블 궁으로 사라졌다고 증언한 경비병들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상처투성이에 붕대를 감고 있던 그들은 붕대가 제거되고 모두 멀쩡했다.
“어떻게 된 거지?”
황당해하는 얀에게 크리스틴이 대답했다.
“스톤에게 매수당해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바른대로 말하라! 정말 은빛 늑대를 못 보았느냐?”
얀의 매서운 추궁에 경비병들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그들을 보며 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모두 끌고 가, 처형하라!”
“예, 폐하!”
짐머와 근위대는 울부짖는 경비병들을 끌고 나갔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얀은 책상에서 나와 장식장에 진열된 술을 꺼냈다. 마개를 열고 병째 들이켠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정말 스톤이 범인이라는 건가? 하지만 희생자들은 분명 사람에게 당한 게 아니었어.”
“그 문제의 답은 폐하께서도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질책 섞인 크리스틴의 대답에 얀은 뜨끔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스톤이 정말 늑대 일족이라는 건가?
“그가 늑대 일족이라는…… 증거가 있나?”
“승마대회에서 변이한 놈의 공격을 받아 늑대의 계곡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늑대들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보셨잖습니까? 늑대들이 놈을 공격하지 못했던 것을.”
“그런……!”
나직하게 신음하며 비틀거리는 얀을 보자 크리스틴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제 아셨습니까, 폐하. 저를 배신하고 잡은 손이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는 걸.”
한동안 창백한 얼굴로 멍하게 있던 얀은 절박하게 물었다.
“내가 어찌하면 되겠나?”
“황녀님과의 혼인을 최대한 미루십시오.”
“그리고?”
“오스월드 저택의 수색을 승인해주십시오. 그러면 스톤이 범인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져오겠습니다.”
스톤이 이번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만 밝힌다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은빛 늑대의 소문은 놈이 만들어낸 유언비어가 될 것이고, 그러면 아델도, 이자벨도 더는 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를 꺼낼 수 없으리라.
놈이 아델의 재혼에 대해 교황청에 이의 신청을 한 일도 흐지부지될 것이다. 아무리 썩어빠진 교황청이라도 살인범의 편을 들어줄 리 없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귀족회에서도 오스월드가를 버릴 것이다.
‘그래, 이 카드 하나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을 거야.’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게.”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크리스틴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얀은 결심한 듯 밖을 향해 말했다.
“에이프릴을 부르라.”
***
같은 시각.
아델이 사격 연습을 마치고 마블 궁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그녀가 사격을 배우는 건 측근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미아를 만나고 돌아온 것처럼 화려한 모자와 외출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비로드 파우치 안에는 피스톨이 들어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델 양.”
핸리와 하인들이 양옆으로 서서 아델을 맞이했다.
“실컷 수다를 떨었더니 좀 피곤하네요. 타냐에게 간단히 요기할 걸 갖고 와 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핸리가 공손히 대답하는데 하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오후부터 계속 타냐가 안 보입니다.”
2층 계단을 오르던 아델이 멈칫했다.
“외출한다는 말도 없었고?”
“아뇨, 오후에 마멀레이드를 만들 거라고 했었는데…….”
“핸리, 한번 찾아봐 줘요.”
“예, 별일 아닐 테니 염려 마십시오.”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아직 대낮이었고,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새벽, 황궁 안에서도 끔찍한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그러니 괜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워낙 똘똘한 아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