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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아델의 묘수(1) (76/155)


76화. 아델의 묘수(1)
2022.10.24.



 
얀은 크리스틴과 함께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술병과 피우던 시가가 잔뜩 놓여 있었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시가에 불을 붙였다.


“오스월드 저택의 수색이 중단된 이유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 판단이네.”

시가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얀이 나른하게 말했다.

순간 크리스틴의 입매가 비틀리듯 말려 올라갔다.


“하, 판단이라? 스톤하고 다시 협잡을 하려는 게 아니고?”

얀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네놈……!”

크리스틴은 그의 손에 들린 시가를 빼앗아 테이블에 비벼껐다.

치이익.

연기를 내며 발갛게 타오르던 시가의 불이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사그라들었다.


“안 좋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서 말이지.”

“이, 이…… 짐승 놈이 감히!”

화를 참지 못한 얀이 격노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크리스틴의 매끈하고 하얀 얼굴 위로 은빛 털이 돋아났다. 하관이 더욱 날렵해지고 매섭던 눈매가 치켜 올라가더니 날카롭고 뾰족하게 길어진 늑대의 이빨이 섬뜩하게 드러났다.


“허억!”

크리스틴의 늑대화가 반만 진행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이질적이고 사나운 짐승의 모습에 얀은 뼛속까지 오한이 들었다.

그래, 잊고 있었다. 놈이 얼마나 잔혹하고 끔찍한 짐승인지를.

저 짐승의 모습으로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였는지를.


“그래 잊지 마라, 얀 발렌시아. 내가 짐승이라는 사실을.”

늑대와 인간 사이의 형상을 한 크리스틴의 목에서 서걱거리는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승의 형체를 하고 인간의 언어를 쓰던 늑대 일족.

그 이질적인 모습에 많은 사람은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보다 강한 그 존재들에게 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멸족시켜 버렸으리라.

다행히 사람들은 짐승보다 교활했으니까.

똑똑.


“대장님,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괜찮으십니까?”

“폐하, 별일 없으십니까?”

문밖에서 근위대원들이 문을 두드리며 물어왔다.


“별일…… 없다.”

얀은 신음하듯 밖에 대고 말했다.

그 사이 크리스틴은 다시 말쑥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리석은. 충분히 기회를 줬음에도 네놈은 그 기회를 차버렸다.”

경고하듯 그 말을 남긴 크리스틴은 몸을 돌려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얀은 한동안 겁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에이프릴!”

조금 전 에이프릴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얀은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혼인을 미루다니 안 됩니다, 아바마마!”

 

***

물론 얀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크리스틴의 얘기대로 할 생각이었다.

에이프릴에게 스톤과의 혼사를 미루자고 한 후, 오스월드가 저택의 수색을 승인할 서류에 사인도 할 생각이었다.

명백한 증거를 갖고 스톤을 잡아들이면 귀족회도 막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은빛 늑대라고 알려진 것이 스톤이라는 게 증명되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 일로 은빛 늑대에 관한 소문까지 잠재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이자벨과 로드웰 공작도 은빛 늑대가 전대 황제를 죽였다는 얘긴 꺼내지 못하리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스톤의 손을 놓는 건 아쉬웠지만 얻는 게 더 많았으니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을 틀어 놓은 것은 에이프릴이었다.


“안 되다니?”

“제 평판은 생각 안 해 보셨나요? 바이스 백작과 혼인이 깨져서 한동안 사교계에 웃음거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또 오스월드 후작과 혼인이 미뤄진다면 다들 뭐라고 떠들겠어요?”

“평판이나 소문 따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기 마련이다.”

“제 혼인이에요. 더는 아바마마의 뜻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얀은 눈앞에 있는 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기세등등한 그의 아내가 낳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항상 순종적인 아이였다. 이토록 강하게 고집을 피우는 건 처음이었다.


“에이프릴 너는 고귀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황녀다. 그 자리엔 그만큼의 책임감도 따르는 거야. 잊지 마라.”

얀은 딸의 뜻을 꺾기 위해 권위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환멸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바마마께선 원하셨겠지만, 저는 원한 적 없어요.”

마치 그의 치부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그…… 무슨……?”

“모를 줄 아셨나요? 아바마마께서 어떻게 그 자리에 앉으셨는지.”

짜악!

얀은 저도 모르게 에이프릴의 뺨을 후려쳤다. 화가 나서가 아닌 수치심 때문이었다. 추악한 속내를 낱낱이 들켜버린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쿵!

휘청이며 쓰러진 에이프릴은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찧었다.


“에이프릴, 얘야!”

놀란 그는 얼른 달려가 딸을 일으켜 안았다.

그녀의 하얀 이마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어떻게 너를…….”

얀은 손으로 정신없이 에이프릴의 피를 닦아내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냉정한 손길로 밀어내며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을 사랑해요. 제 혼인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할 거예요”

“뭐라? 네가 지금 제정신…….”

“그리고 이젠 되돌릴 수 없어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는 에이프릴은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일순, 얀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났다.

온순하던 딸이 그토록 결혼을 고집하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으니까.


“에이프릴…… 너 설마……?”

하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에 얀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네가 어떻게…….”

얀은 거짓말이라고 말해달라는 듯 에이프릴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의 눈을 외면했다.


“생각하시는 대로예요…….”

“……!”

얀은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지?”

“제 주치의요.”

“오스월드 후작은?”

“어제 얘기했어요.”

“알았다. 당분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해선 안 된다.”

“네.”

“그래, 그래…… 물러가라.”

얀은 머리를 감싸 쥐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스톤이 늑대 일족이고, 에이프릴이 놈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다.

늑대 일족의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아마도 놈은 일부러 에이프릴을 이렇게 만든 게 분명했다.

제 인질로 삼기 위해!

와장창!


“으아아악! 스톤!”

 

***

마블 궁의 응접실로 들어오는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초조하게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던 아델은 맥이 탁 풀렸다.

황제와 얘기가 잘 안 된 것이 분명했다.

타냐를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그가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가 해도 안 되는 일이라면 좌절할 시간에 다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더 나았다.


“정식으로 수색은 힘들 것 같아, 아델.”

그가 어렵게 입을 열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됐어. 변덕이 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황제를 믿느니 우리가 타냐를 구하고 스톤을 잡으면 되지.”

“우리가……?”

아델이 눈을 빛내며 웃었다.


“내일 스톤이 보낸 마차를 타고 오스월드가로 갈게.”

크리스틴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제정신이야?”

물론 아델도 그가 순순히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아, 당신은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하지만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

“일단 얘기는 해 봐.”

아델은 크리스틴을 설득하기 위해 두 손을 붙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내가 스톤의 마차를 타고 오스월드 저택에 가면 당신은 근위대를 이끌고 와. 약혼녀가 납치를 당했다면 충분히 수색할 구실이 될 테니까. 이건 황제의 승인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크리스틴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서 안 돼! 차라리 내가 W.G 부대원들을 이끌고 오스월드가로 쳐들어갈 거야.”

“오스월드가랑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이 멍청이!”

결국 화가 난 아델이 소리쳤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과격한 발언에 크리스틴은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드는데! 황제의 명을 어긴 당신에게 명분은 없어. 그 싸움으로 다치는 사람들은 또 무슨 죄고! 내가 당신에게 소중한 만큼 그들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야!”

아델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크리스틴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당신이 미끼가 되겠다?”

“왜 나를 구할 자신이 없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래, 그러니까 나도 스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야. 당신을 믿으니까.”

“하지만 놈은 생각보다 더 미치광이야.”

“나만큼 놈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

물론 아델도 두려웠다. 스톤을 만나러 그 끔찍한 오스월드가로 다시 가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타냐를 구하고, 어머니의 원수인 그를 잡는 일.

누구보다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크리스, 날 믿어. 내가 당신을 믿는 만큼.”

 

***

깊은 밤 오스월드가.

똑똑.

잠옷 위에 로브를 걸친 차림의 세이라는 스톤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라버니, 들어가도 돼요?”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 열게요.”

끼이익.

세이라는 조심스럽게 스톤의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요새 스톤은 밤마다 밖을 나갔다가 새벽 무렵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번은 우연히 새벽에 돌아오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뭘 했는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사냥을 좋아했으니 밤 사냥이라도 나간 걸까?

하지만 요사이 그린힐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 되는 시기와 맞물렸다. 무엇보다 그가 밤늦게 외출하는 날은 거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


‘아델의 말대로 오르비스 왕국에서 발생한 살인도 설마 오라버니의 짓이었을까?’

‘그 계집애가 괜히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물론 아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썩 내키지 않았을 뿐.

스톤의 방을 나온 세이라는 저택의 지하 납골묘지로 향했다.

저택의 지하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납골묘지로 가는 길은 그중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으스스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에 오래전 아델의 숙소가 있었다.

한여름에도 한기가 들 정도로 서늘하고 벽과 천정에서 곰팡이가 자라며 물이 떨어지는 곳.


“독한 계집애.”

세이라는 한 손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으론 코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이런 끔찍한 곳에서 2년이나 잘도 버티다니.”

사실 아델을 이곳에서 지내게 한 건 스톤의 결정이었다. 백작가의 사생아 따위는 후작 부인 호칭만으로도 과분하다는 것이었다.

세이라 역시 그 천한 계집애에게 알맞은 대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찮던 계집애가…….”

칼라임 최고 영웅의 연인이 되어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수많은 시인은 두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고, 소식지에서는 매일 그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소식을 궁금해했다.

그런데…… 세이라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톤과 결혼한 에이프릴이 오스월드가로 들어오면 이곳의 안주인 자리마저 내줘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교계에서의 입지도 약해지리라.

사실 지난 8년간 이곳의 실질적인 가주 노릇을 해 온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황실의 인척이라는 허울 좋은 명예뿐.


‘빌어먹을 명예 따위!’

세이라는 사실 명예가 아닌 권력을 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세이라는 눈앞의 계단을 내려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얼마나 한참 내려갔을까?

벽돌을 쌓아 아치형으로 만든 기다란 통로가 나왔다.

등불을 들어 비춰보았다. 빛이 닿지 않는 끝은 검은 어둠이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젠장, 아니기만 해봐…….”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아델에게 다시 한번 이를 갈며 세이라는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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