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델의 묘수(2)
(77/155)
77화. 아델의 묘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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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아델의 묘수(2)
2022.10.28.
고오오…….
지하의 납골묘지는 고요했고, 어디선가 아득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다른 서늘함이 엄습해왔다.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환기 통로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관들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발했다. 석관 앞에 놓인 흉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소름 끼쳤다.
“진짜…… 아니기만 해봐…….”
세이라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고요한 묘지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꺅!”
주변을 둘러보던 세이라는 발아래 무언가를 밟고 미끄러졌다.
다행히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밑에 등불을 비춰보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백골들을 봤어.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개는 됐을 거야.”
아델의 말은 진짜였다!
***
다음 날 아침.
오스월드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나무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길 끝. 크고 작은 붉은 벽돌 건물에 뾰족한 청록색 지붕을 얹은 대저택이 점점 그 위용을 드러냈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눈에 익은 풍경에 아델은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지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과 함께 그녀의 악몽 속에 끈질기게 나오는 장소였으니까.
이 저택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는 꿈을 꿀 때면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차는 계속 오스월드가의 저택 중심부로 들어갔다.
이내 마부가 마차를 멈추자 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말쑥한 옷차림의 그가 하인들을 이끌고 나와 반겼다.
“어서 와 아델.”
그녀의 악몽 속 주인공인 스톤 오스월드.
“마음에 들어? 오래전 죽은 아내가 좋아하던 장소였어.”
아델과 정원을 산책하던 스톤이 마지막으로 데려온 곳은 온실 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실 안에 있는 밀실.
밖에서는 거울처럼 보이던 한쪽 벽이 사실은 밀실의 출입구였다.
밀실 안으로 들어오자 거울의 뒷면은 유리창처럼 투명했다.
밖에서는 이곳을 볼 수 없었지만, 이곳에선 온실 안의 풍경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아직 이른 봄이었지만 온실 안은 온통 만발한 꽃과 나무들로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아델도 이곳에 이런 밀실이 있는 줄 추호도 몰랐다.
물론 지금의 그녀에겐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타냐는?”
“일단 앉아.”
스톤은 밀실 한가운데 있는 화려한 티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엔 최고급 찻잔에 차와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마치 티 타임이라도 하려고 초대한 것만 같았다.
“타냐는 어디 있어?”
“앉으라고 했어, 아델. 타냐를 살리고 싶다면 내 말부터 순순히 들어.”
스톤은 상냥하게 웃었지만 두 눈에선 광기 어린 살기가 흘렀다.
아델은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사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크리스틴이 자신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저택을 수색하고, 타냐와 백골 사체들을 찾아낼 때까지.
“타냐가 무사하다는 증거라도 보여줘.”
찰그랑.
스톤은 아델의 앞에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이 저택 어딘가에 그 계집애가 갇혀 있는 곳의 열쇠야. 내 용건이 끝나면 가져가서 그 계집애를 구해.”
아델은 재빨리 열쇠를 움켜쥐었다.
“당신 용건이 뭔데?”
“너와 함께 차를 마시는 거. 자, 마셔 아델. 네가 좋아하는 홍차와 케이크야.”
하지만 아델은 바라보기만 할 뿐,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스톤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하긴, 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의심스럽다면 바꿔서 마실까?”
그가 아델의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뻗었다.
“됐어. 그냥 당신걸 마셔. 이미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을 테니까.”
“의심이 너무 많군, 아델 양.”
그는 제 앞의 찻잔을 거리낌 없이 마셨다. 그러고는 이제 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이 차를 다 마시면 나가도 되는 거지?”
“물론.”
하지만 아델은 믿지 않았다.
“날 부른 이유가 정말…… 그거뿐일 리 없을 텐데?”
“물론 아니지. 잊었어? 네게 은빛 늑대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거.”
은빛 늑대의 얘기에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네 어머니를 죽인 그놈을 보면 네 손으로 쏴. 숨겨 온 그 무시무시한 무기로 말이야.”
아델은 뜨끔했다. 스톤이 파우치를 뒤질까 봐 오늘은 가터링에 피스톨을 숨겨 온 것이다. 그런데 놈은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다.
“됐어. 지금은 타냐를 구하는 게 더 먼저야.”
그리고 아델은 제 앞의 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스톤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아델, 내 아내가 왜 이곳을 좋아했는지 알아?”
10년 전 아델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스톤의 아내가 죽은 후였다. 별장의 화재로 죽었다던 그녀는 초상화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꽃을 좋아했겠지.”
“아니, 여긴 꽃향기가 진해서 내가 그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이야……?”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델이 의아해했다.
“이 밀실을 몰래 만든 건 아내였지. 내가 냄새로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어 버리기 위해서. 꼭 너처럼 앙칼지고 애타게 만드는 계집이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아내가 알지 못한 게 하나 있었지. 짐승으로 변하면 후각도 훨씬 예민해져서 금방 찾을 수 있다는 걸. 물론 그 덕에 본의 아니게 본 모습을 들켜버렸지만.”
역시 스톤은 늑대 일족이라는 건가?
“그리고 아마 놈도 오늘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크리스틴도……?
“아마 너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텐데?”
아델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스톤은 그가 마치 은빛 늑대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라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곧 놈이 널 구하러 오겠지?”
“됐어. 난 이제 그만 일어나…….”
순간 시야가 빙그르르 돌고,
의자에서 일어서던 아델은 비틀거리며 탁자를 붙잡았다.
“이런. 어지러워, 아델?”
스톤이 다가와 얼른 그녀를 잡아 주었다.
“설마 내 차에 약을……?”
아델이 울상이 되어 노려보자,
“약을 탄 건 두 잔 모두였어. 난 미리 해독제를 먹어뒀고.”
가늘게 웃는 놈의 눈이 뱀처럼 사악하게 반들거렸다.
***
“대체 무슨 일이죠?”
아침부터 들이닥친 근위대를 향해 세이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오스월드 후작에게 납치된 약혼녀를 찾으러 왔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양옆으로 갈라섰다. 그 한가운데 검은 제복을 입은 크리스틴이 저벅저벅 걸어 모습을 드러냈다.
“납치라니요? 그런 일 없으니 돌아가세요!”
“항의라면 가주님을 통해 정식으로 하십시오.”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세이라가 발끈했다.
“내가 가주나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라는 건 가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단숨에 세이라를 무시하며 크리스틴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수색하라!”
하지만 세이라가 얼른 양팔을 벌리며 문 앞을 막아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인가요! 귀족회에서도 알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세이라가 귀족회까지 들먹이며 위협했지만 크리스틴은 차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섬뜩했다.
“마음대로. 지금 난 약혼녀의 안위가 걱정되어 눈에 뵈는 게 없거든.”
그는 어깨로 세이라를 밀어내며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 뒤를 수십 명의 근위대가 점령군처럼 줄줄이 따라 들어 왔다. 그들은 짐머와 크리스틴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저택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련의 소란을 듣고 오스월드가의 경비병들도 몰려왔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자들을 막아!”
세이라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하지만 다들 저택 홀 안에 버티고 선 크리스틴을 보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살기 싫어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감히 누가 저 바이스 백작에게 덤빌 수 있을까?
“지하의 납골묘지는 어느 쪽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이라가 흠칫했다.
“납골묘지라니요?”
“아무래도 내 약혼녀가 거기로 끌려간 것 같아서.”
세이라는 그가 이렇게 들이닥친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신, 아델을 찾는다는 건 핑계…….”
그때였다. 짐머가 북쪽 복도 끝에서 소리쳤다.
“이쪽이랍니다! 저희가 수색하겠습니다!”
“안 돼!”
세이라는 그들을 막으러 달려갔다. 물론 지하로 우르르 내려가는 근위대원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이 정도면 수색은 일단락될 것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불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오스월드 저택까지 들어오는 동안은 아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냄새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아델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체취도, 아무것도…….
더 불길한 것은 스톤의 흔적도 함께 지워졌다는 것이다.
‘인간으로는 아무래도 한계인가?’
늑대화가 되면 야생성이 강화되어 감각은 훨씬 예민해졌다.
문제는 한낮이라서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자칫 폭주해버리면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아델을 헤매고 찾아다닐 것인지, 아니면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빨리 찾아야 할지.
이 시간에도 잔인한 스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결국, 그는 결심했다.
찾고 나서 뒷감당은 나중에!
***
“아델? 아델?”
힘없이 늘어진 아델을 의자에 앉힌 스톤은 그녀의 뺨을 살며시 두드렸다.
미간이 조금 일그러질 뿐 아델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스톤은 회중시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 말 듣고 있지? 걱정하지 마. 그렇게 위험한 독은 아니야. 그저 한 시간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
“하지만 듣고 보는 건 문제 없을 거야. 그래야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은빛 늑대를 볼 수 있지.”
그리고 스톤은 아델이 앉아 있는 의자를 온실 입구가 잘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만일 저곳으로 은빛 늑대가 들어온다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곧 놈이 여기로 들어올 거야. 아주 잘 보이겠지? 그러니 똑똑히 봐. 네 원수 놈이 누구인지를!”
스톤은 눈을 감았다.
멀리서 점점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그는 애타게 크리스틴을 기다렸다.
예감이 맞다면 놈은 은빛 늑대가 확실했다.
멸족되었다는 자신의 일족.
하지만 그가 제 일족과의 조우를 이토록 원하는 것은 아델 때문이었다.
끝까지 자신을 외면하며 죽음을 선택한 그 계집과 너무도 닮았으니까. 그녀의 몫까지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놈을 제 어미의 원수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할 아델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희열이 몰려왔다.
철컥!
“……!”
순간 들려온 서늘한 금속성.
“손들어.”
“어떻게……?”
스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 당황했다.
“어서!”
뒤통수에 닿는 총구를 느끼며 그는 하는 수 없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취가 벌써 풀릴 리 없는데…….”
“나도 미리 해독제를 복용했으니까.”
스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잊었어? 매일 네놈 방을 청소했던 건 나였어. 그리고 네놈이 연구하던 노트를 전부 암기했지. 어떤 독을 즐겨 쓰고, 그 해독제를 어떻게 만드는지…….”
스톤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내 노트를 암기했다고?”
“그래, 네놈이 전대 후작님에게 독을 쓸 것도 이미 짐작했어. 해독제를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잠시 말을 멈춘 아델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분이 돌아가셔야 오스월드가에서 나올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후작님은…… 모두 알고 계셨고.”
아델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묵묵히 감내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를 죽인 건 스톤이었지만 죄책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으니까.
더구나 죽어가며 괜찮다고 달래주던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델……! 네년이…… 이 사악한!”
아델은 깔깔대며 소리 내 웃었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꽤 좋은데?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온 보람이 있어.”
스톤은 처음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아델에게서 진짜로 살기를 느꼈으니까.
이번엔 정말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아델…… 잠시만 다시 생각해봐. 정말 은빛 늑대를 보고 싶지 않아? 응? 네 어머니를 죽인…….”
스톤은 교활하게 눈을 빛내며 설득했다.
물론 돌아온 반응은 냉소적이었고.
“이제 지옥으로 꺼져, 스톤!”
벌컥!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온실의 문이 열렸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 그것을 보았다.
온통 눈부신 은빛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