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래, 이걸로 끝난 거야
(78/155)
78화. 그래, 이걸로 끝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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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그래, 이걸로 끝난 거야
2022.10.31.
벌컥!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온실의 문이 열렸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 그것을 보았다. 온통 눈부신 은빛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톤은 제 뒤통수에 겨눠진 피스톨을 낚아챘다.
타앙!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피스톨이 발사됐다.
챙그라앙!
총알은 밀실의 유리문에 틀어박혔고 유리 조각은 산산조각 빛나며 부서졌다.
눈부신 파편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그 사이로 날아간 피스톨이 저만치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뻗었다.
푸욱!
그 순간 스톤의 손등 위를 내리찍은 날카로운 칼날.
“크아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스톤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환하게 웃고 있는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웃음이 묘하게 섬뜩했다.
“찾았다, 살인마.”
그는 스톤의 손등을 관통해 바닥에 틀어박힌 레이피어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놈의 머리채를 사납게 잡아챘다.
“크흑, 이 찢어 죽일……!”
스톤이 이를 갈자,
“내가 할 소리.”
퍼억!
크리스틴은 그대로 놈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유리 파편 위에서 스톤의 얼굴이 짓뭉개졌다.
“비켜, 크리스!”
철컥!
그동안 아델은 피스톨을 주워 다시 스톤을 향해 겨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아델. 총소리가 났으니 곧 근위대가 몰려올 거야.”
“상관없어. 여기서 죽여버릴 거야!”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총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약속했잖아. 네 손으로 꼭 죽이게 해준다고. 그러니 총 내려, 아델.”
여전히 스톤의 머리를 바닥에 짓이긴 채 크리스틴이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아델은 쉽게 총을 내리지 못했다. 스톤을 노려보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되고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델…….”
저벅저벅!
그 무렵 온실 안으로 달려오는 근위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갈등하던 아델은 결국 분한 얼굴로 총구를 내렸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모든 사람이 듣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스톤 오스월드 후작, 당신을 부녀자 납치와 연쇄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포박해!”
“포박하라!”
우렁차게 대답하며 근위대원들이 달려와 스톤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
“바이스 백작, 네놈! 가만 안 두겠어! 증거도 없이 감히 나를! 백배 천배,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갚아주마!”
스톤은 끔찍한 피투성이 얼굴로 발광했다.
“증거라면 충분해.”
“……!”
스톤이 멈칫하자,
“어떻게 됐지?”
크리스틴은 뒤에 있는 수하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짐머가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찾았답니다! 지하 묘지에 신원불명의 백골들이 발견됐답니다!”
“그렇다는데?”
스톤은 날카롭게 웃었다.
“묘지에 백골이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조사해보면 알겠지. 끌고 가!”
하지만 스톤은 끌려가면서도 자신만만했다.
“네놈, 이 순간을 뼛속 깊이 후회할 거다! 난 곧 다시 나올 테니까! 그땐 네놈을 산채로 씹어 먹어주마!”
크리스틴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입을 찢어버려.”
“예?”
짐머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재갈을 물려.”
“으읍! 읍!”
스톤이 조용해지자 크리스틴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아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팔과 어깨에 군데군데 옷이 찢어지고 피가 묻어 있었다. 거울이 깨지면서 날아오는 유리 파편에 베인 것이다.
그는 미간을 모으며 깊게 숨을 골랐다.
“치료부터 해야겠다.”
하지만 아델은 다급하게 열쇠를 내밀었다.
“타냐부터 구해야 해. 이 저택 안에 이 열쇠가 있는 곳에 갇혀 있대.”
“알았어. 사람들에게 찾으라고 할 테니 넌 치료부터 받자.”
“타냐부터…….”
“젠장! 그만!”
크리스틴이 소리치자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흠칫하며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숨을 고르며 달래듯 말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제발…….”
짐머가 얼른 아델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들었다.
“예, 저희가 책임지고 찾을 테니 치료부터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또 사람 찾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아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짐머 경.”
“염려 놓으십시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아델을 보다못해 크리스틴이 번쩍 안아 들었다.
“핫, 크리스! 내려놔.”
많은 사람 앞이라 아델이 당황해서 속삭였지만 그는 들은체하지 않고 그대로 온실을 가로질렀다.
***
“크리스…… 나 괜찮아. 유리 파편에 조금 찔린 거야. 내려…….”
“가만있어. 안 그럼 엉덩이를 때려 줄 거니까.”
“뭐?”
“당신 하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안중에도 없나?”
“그게 무슨……?”
“젠장 됐어!”
온실을 나온 크리스틴은 결국 아델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혼자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아델은…….
“아아!”
바닥에 주저앉으며 아픈 듯 신음했다. 어느새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괜찮아?”
“못 걷겠어. 다시 안아줘.”
아델은 안아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양손을 뻗었다. 크리스틴이 가늘게 눈을 뜨자 재촉하듯 계속 어리광부렸다.
“뭐 해, 빨리.”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야.”
“알아. 엄청 엄청 어려운 남자라는 거. 당신이 이렇게 쉽게 져주는 건 나를 사랑해서라는 것도. 늘 고맙게 생각하고.”
“하, 말은.”
하지만 크리스틴은 이미 화가 다 풀린 얼굴이었다.
아델 한정 쉬운 남자가 분명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아델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크리스틴도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피가 마르는 줄 알았어. 당신이 그 빌어먹을 스톤 놈에게 잘못 될까봐, 별생각이 다 들었다고.”
“나도.”
그러다 아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사실 크리스틴이 정말로 은빛 늑대일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랐다.
은빛 늑대를 만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은빛 늑대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 크리스틴이라는 걸 확인했을 땐 저도 모르게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 엄마를 죽인 건 늑대 일족인 스톤이었고 놈이 잡혔으니 그걸로 다 끝난 거야.’
아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참 좋다. 날 걱정해주는 당신이 있어서.”
“사람 잔뜩 걱정시켜놓고 그런 웃음이 나와?”
“왜, 웃으니까 예뻐? 막 사랑해주고 싶어져?”
“하, 그런 말은 거울이나 보고 나서 하지?”
스톤과 치열하게 싸운 아델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옷은 여기저기 베어서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 몰골로 천진난만하게 저런 말이라니.
하지만 크리스틴의 눈에는 그마저도 예뻐 보였으니…….
“그래서 내가 안 예쁘다고?”
“예뻐.”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진심. 이제 됐어?”
장난치듯 정원을 가로지르던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칫했다.
정원의 어두운 나무 그늘에 작업복 차림에 전지가위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는 크리스틴을 향해 허리가 땅에 닿도록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는 아직 일러. 그리고 나도 오늘 큰 신세를 졌다.”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아델은 궁금해서 물었다.
“크리스, 누구……?”
오스월드가의 하인으로 보였지만 아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얼굴 한쪽이 화상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하인답지 않게 공손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저택의 정원사 죠셉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스톤이 당신을 온실로 데리고 갔다고 알려줬어.”
크리스틴의 말에 아델은 감사를 표했다.
“아아,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무사했네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러면서 아델을 바라보는 죠셉의 시선이 애틋했다.
“생각보다 더…… 비슷하군요.”
“네?”
“아닙니다. 다치신 것 같은데 어서 가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는 가위를 들고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죠셉은 크리스틴이 오스월드가의 별장에서 만난 남자였다.
스톤이 죽인 아내의 오빠. 스톤의 아내는 어려서 입양되었기에 오스월드가에서도 죠셉의 존재는 모르고 있단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손을 써서 그를 정원사로 들여보냈다. 지금까지 스톤의 움직임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덕분에 오늘 은빛 늑대로 변하지 않고도 아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시간이 지났지만 타냐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죠셉도 타냐가 이곳에 들어온 건 보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크리스틴도 이 저택에서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냄새라도 잘 좀 맡아보십시오!”
짐머의 채근에 크리스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난 사냥개가 아니라 네놈 상관이다만.”
“어쨌든 아델 양 찾을 때처럼 그 능력을 좀 발휘해보시라고요!”
크리스틴은 소리치는 짐머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화이트 고스트 기사들 사이에서도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통했다. 물론 전투에서는 이중인격을 의심할 만큼 돌변하긴 했지만.
“설마 둘이…… 사귀나?”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크리스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넘겨짚지 마십쇼!”
펄쩍 뛰면서도 짐머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타냐가 이곳에 있는 게 분명하다면 아마 냄새가 강한 곳에 있을 거다. 아니면 물이 많은 곳에 갇혀 있던지. 그러니 그녀의 체취가 사라진 거겠지.”
“그렇겠군요!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짐머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꾸벅 인사를 한 후 뛰어가며 외쳤다.
“하수로를 수색하라!”
그러자 결국 근위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하수로라고요?”
“없어진 게 하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짐머는 그들이 왜 이런 볼멘소리를 하는지 알만했다.
근위대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고 우월감에 빠진 자들도 있었다.
“없어진 건 하녀가 아니라 황제 폐하의 백성이다. 지체하면 한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서둘러!”
그러나 그들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습니다. 하녀 계집애 따위를 저희가 왜!”
“후작이 데리고 놀다가 하수로에 버리기라도 했나…….”
키득거리며 중얼대던 근위대원의 턱이 순식간에 돌아가 버렸다.
퍼억!
짐머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저만치 나자빠진 그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그만.”
그 순간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짐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흙투성이가 된 근위대원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귀관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하수로를 뒤지기 딱 좋아 보이는군. 자, 불만 있는 자는 더 나와라. 하수로를 실컷 헤엄칠 기회를 주겠다. 더 있나?”
“아닙니다!”
근위대원들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크리스틴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있는 짐머의 머리를 슥슥 헝클어뜨렸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어.”
“그런 말을 단장님이 하시니 설득력이 없네요.”
“하긴 그렇군.”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하며 쿨하게 인정했다.
어이없어 웃으면서도 짐머는 그가 왜 이러는지 잘 알았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으니까.
기사단 내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는 오히려 실없이 장난을 걸고는 했다. 그로 인해 당장 혈투가 벌어질 것 같던 험악한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지고는 했다.
덕분에 그 거친 사내들을 지금껏 큰 탈 없이 이끌어 온 것이다.
그는 한없이 무자비했지만 또 한없이 친근한 리더였다.
“흥분이 가라앉았으면 이제 와인 숙성실로 가봐.”
“예? 와인 숙성실이요?”
“아델이 그곳의 열쇠라는 걸 알아냈어. 저택 별채에 거대한 와인 숙성실이 있다더군.”
“핫!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짐머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크리스틴은 혀를 찼다.
“저러면서 넘겨짚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