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음엔 네 차례야, 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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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다음엔 네 차례야, 세이라
2022.11.04.
세이라는 3층 자신의 침실에 달린 응접실에서 티 타임을 즐겼다.
봄이 다가오는 오후의 햇살은 나른했고, 차와 디저트는 평소보다 더 향긋하고 달았다.
그녀는 정원 한복판에서 근위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크리스틴을 보며 엷게 웃었다.
“백작님께서 이렇게 도움을 주실 줄은 몰랐네.”
조금 전 스톤은 크리스틴의 근위대에게 포박되어 끌려갔다.
솔직히 조금 충격이긴 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자신의 혈육이 그 끔찍한 연쇄살인마였다니.
물론 어젯밤 지하 묘지에서 수많은 백골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예감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는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고민을 했었다.
스톤에게 사실대로 말할까?
아델이 백골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곧 근위대가 오라버니를 잡으러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니 빨리 증거를 없애라. 가문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해야 옳았다.
하지만 상대는 스톤이었다.
아델의 말대로라면 그는 연쇄살인마였고, 그 증거의 진위를 알고 있는 자신을 살려둘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그가 고마워하며 증거를 인멸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혈육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에는?
스톤은 황제의 부마가 되고 에이프릴은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 세이라에겐 그저 황실의 인척이라는 명예 외에 남는 게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이 저택의 실질적 주인은 자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미치광이 살인마와 그 맹하고 어리숙한 황녀에게 이 모든 걸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스월드가는 자신이 더 잘 알았고, 더 잘 다스릴 수 있는데도.
“그 괴물은 점점 더 위험해질 거야. 너와 가문이 먹히기 전에…… 네가 오스월드가를 구하는 방법도 있겠지.”
그리고 아델이 했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
내 가문.
오스월드가.
그래, 이건 모두 내 가문을 구하는 길이라고.
내가 여 후작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스톤만 사라진다면…….
그래서 세이라는 그대로 납골묘지를 나왔다. 그리고 아침에는 스톤을 향해 어느 때보다 상냥하고 착한 동생처럼 굴어주었다. 근위대에게 잡혀가는 그를 보며 겁먹은 여동생처럼 울부짖기도 했다.
덕분에 모든 것이 이렇게 평화로웠다.
“즐거워 보이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세이라가 얼른 돌아보았다.
어느새 아델이 그녀가 있는 창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너,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군데군데 유리에 베인 상처가 보이긴 했지만 세이라의 방으로 들어오는 아델은 너무나 당당했다.
“그러게. 감히 여기를 다 들어와 보네. 내가.”
그러면서 아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가구와 소품들로 황후의 방만큼이나 호화롭게 꾸며진 곳.
예전에도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세이라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서.
아끼던 장신구를 훔친 것 같다며 하녀들을 시켜서 옷을 벗기거나, 마음에 둔 귀족 자제에게 추파를 던졌다며 마시던 차를 뿌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뺨을 맞거나 머리채를 잡히는 건 기본이었다.
“더 호화로워졌네. 하긴 지난 8년 동안 네가 이곳의 주인 행세를 했을 테니까. 전대 후작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스톤을 외교관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 바람에 너만 횡재했지. 사실 그분께선 날 위해 그를 오르비스로 보내려고 하셨던 건데. 안타깝게도 그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지만.”
“허튼소리 지껄이려거든 꺼져. 안 그러면 사람들을 부를 거야!”
“글쎄. 지금 이 저택에서 감히 내게 손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아델은 자연스럽게 세이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누가 앉으라고 했어!”
세이라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손님을 서 있게 할 생각이야? 후작가의 예법은 그런가?”
“손님?”
세이라는 기가 막혔지만 아델의 표정과 목소리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확실히 아델은 예전과 달랐다. 크리스틴의 약혼녀라며 사람들이 떠받들어서인지 목에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그런 얄팍한 오만함과는 뭔가 달랐다. 이 서늘한 표정은 크리스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델은 접시에 담긴 쿠키를 우아하게 집어서 입안에 넣었다.
“윽!”
하지만 인상을 쓰며 얼른 뱉었다. 그것도 조금 전 세이라가 마시던 찻잔에.
“뭐 하는 짓이야!”
아델은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맛없는 걸 잘도 먹고 있었네.”
아델이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데도 세이라는 파르르 분노할 뿐 사람들을 부르지 못했다.
아델의 말대로 이 저택의 하인들 모두 근위대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자칫하다가 스톤과 얽혀서 누명이라도 쓸까 봐 대부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이라도 그걸 아는 것이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만큼 눈치가 빨랐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하고 꺼져!”
세이라는 겨우 화를 참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아델이 엷게 웃었다.
“지하 묘지에 있던 백골들을 왜 안 치웠지? 그것만 발견되지 않았으면 네 오라버니가 이렇게 잡혀가진 않았을 텐데.”
세이라는 뜨끔 했지만 얼른 표정을 숨겼다.
“네 말이 사실일 줄은 몰랐으니까.”
아델은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괴며 세이라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는 마치 세이라의 속내를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 눈빛도 왠지 크리스틴을 닮았다.
둘이 함께 산 것만으로 이렇게 닮아 갈 수 있는 건가?
“아니, 넌 일부러 증거를 안 치운 거야.”
“뭐? 내가 왜!”
“난 이미 그럴 줄 알았거든. 그래서 네게 말했던 거고.”
세이라는 숨이 막혔다. 왠지 아델에게 조종당한 기분이었으니까.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스톤이 잡혀가면 너는 다시 이 후작가의 가주 행세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황후와 인맥도 쌓아놨겠다, 여 후작도 욕심낼 수 있겠지.”
“아니야…… 정말…… 아니야!”
정곡을 찔린 만큼 세이라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세이라 그거 알아? 넌 내 수에 말려든 거야.”
“뭐?”
“둘보단 하나가 처리하기 쉬우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드르륵.
아델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음엔 네 차례라는 거야, 세이라.”
아델은 쿠키가 녹아 있는 찻잔을 들어 세이라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들이부었다.
쪼르륵…….
“그리고 다음에 왔을 땐 좀 더 공손히 손님을 대하도록.”
생각지도 못한 봉변에 세이라는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그러다 곧 불같이 화를 내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이 계집애가! 린다! 린다!”
세이라의 비명을 들은 하녀장이 달려왔다.
“아가씨 무슨 일……!”
늙은 하녀장 린다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저택의 공주님이 비에 젖은 생쥐가 되어 길길이 날뛰고 있었으니까.
그런 세이라를 뒤로하고 아델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하녀장.”
린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을 대하는 아델의 태도가 너무나 오만하고 우아한 것이다. 제 앞에서 늘 주눅 들고 겁먹은 아델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아델과의 관계에서 늘 우위를 차지했던 하녀장은 기세 좋게 소리쳤다.
“네가 감히 여기를 왜!”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녀장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넨 나를 보면 머리부터 숙이도록 해. 나이를 먹은 만큼 처신도 똑바로 해야지.”
하녀장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며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델의 표정이 얼마나 위엄있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답.”
“네…….”
“고개는 아직 뻣뻣하네.”
“소, 송구합니다. ……마님.”
항상 아델을 조롱하며 지하실 마님이라고 부르던 하녀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감히 지하실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조만간 또 보자, 세이라.”
그제야 아델은 세이라의 방을 나갔다.
세이라는 그때 깨달았다.
스톤이 없는 자신이 생각보다 무력하다는 걸.
아니. 자신이 무력한 게 아니라 아델이 강해진 것이었다.
***
세이라의 방을 나온 아델은 타냐가 있는 손님용 침실로 향했다.
조금 전 타냐는 와인 숙성실에서 구조되었다.
스톤은 그녀를 와인 숙성실의 오크통 안에 가둬 두었던 것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오스월드 저택의 주치의가 응급처치를 했고, 크게 상하거나 다친 곳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똑똑.
아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타냐가 침대에서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
아델은 얼른 달려가 타냐를 꼭 끌어안았다.
의사는 곧 깨어날 거라고 했지만 아델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녀였지만 그녀에겐 가족과 다름없는 아이였으니까.
“조금 전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생각보다 말짱한 것 같고요.”
옆에 있던 짐머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타냐가 그를 살며시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안 말짱하다고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그 정도면 말짱한 겁니다. 아델 양보다 더 다친 곳이 없잖습니까?”
타냐는 그제야 아델의 손등과 팔뚝에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도 다치셨네요. 설마 절 구하시려고…….”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그랬어. 잘 해결됐고.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서…….”
아델이 걱정할까 봐 타냐는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많이 무섭긴 했는데, 아가씨가 꼭 구해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예전에도 절 구해주셨던 것처럼요.”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스톤이 아끼던 도자기를 깨트렸다는 이유로 타냐는 며칠째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타냐를 못 본 척했다.
그때 아델이 나서서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타냐는 굶어 죽었을 것이다. 대신 아델에게 며칠 동안 음식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건 그 이후에 들은 얘기였다.
그때부터였다. 타냐가 아델을 친 언니처럼 따르기 시작한 게.
“그렇게 말하면 아마 짐머 경이 서운할걸? 이번엔 나보다 더 애쓰셨어.”
“정말요?”
타냐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옆에서 계속 말짱해 보인다며 서운한 말만 했으니까.
“아닙니다. 저야 당연히 해야 할 임무였습니다.”
짐머가 얼른 난감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자, 아델이 놀리듯 타냐에게 속삭였다.
“너를 열심히 안 찾는다고 근위대들과 주먹 싸움까지 했지 뭐야.”
“아델 양! 그건……!”
“어머, 미안해요. 비밀이었나요?”
“전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의자에서 허둥지둥 일어나는 짐머의 얼굴이 왠지 조금 발그레해진 것 같았다. 그런 짐머를 향해 타냐가 재빨리 소리쳤다.
“저기…… 고마웠어요, 짐머 님!”
짐머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얼른 내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두 분, 쉬십시오!”
쿵!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아델은 다시 타냐를 놀렸다.
“어머, 이러다 문이 뚫어지겠네.”
짐머가 사라진 뒤에도 타냐는 한동안 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뭘요!”
“그냥 그렇다고.”
아델은 짐머와 타냐가 만나는 걸 생각해보았다. 썩 보기 좋은 커플이 될 것 같았다. 물론 괜히 중간에 나서서 설레발 칠 생각은 없었지만.
“저 이제 그만 일어나도 될 것 같아요.”
“왜, 더 누워 있지.”
“이곳엔 더 있기 싫어요. 좋았던 기억이 없으니까.”
“하긴.”
아델도 쓴웃음으로 동조했다.
사실 오스월드 저택의 공기마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때 타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저는 오늘 우리 집으로 가면 안 될까요?”
“우리 집?”
“죄송해요, 아가씨 집이요. 제겐 거기가 제일 편해서.”
아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기가 제일 편해. 같이 가자, 타냐.”
“아가씨도 같이요?”
“그럼 우리 집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