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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당신의 머리에 꽃을 (80/155)


80화. 당신의 머리에 꽃을
2022.11.07.



 
아델과 타냐를 태운 마차가 오스월드 저택을 나올 때였다.


“아델 양!”

우렁찬 목소리에 아델은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굽이치는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였다. 제니퍼였다.

그 뒤로 아델도 낯이 익은 W.G 제1부대 소속의 기사들 몇 명도 함께였다.


“잠시 멈춰줘요.”

아델이 마차에서 내리자 제니퍼와 기사들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어쩌다가 귀하신 분께서 이런 상처가!”

제니퍼는 아델의 몸에 난 상처를 보더니 펄쩍 뛰었다.


“가벼운 상처라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아델 양이 납치됐다는 소문을 듣고 여차하면 쳐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죠.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단장님이 아델 양을 호위하라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백작님께서요?”

체포한 범인에 대한 보고를 위해 크리스틴은 조금 전 황궁으로 떠난 것이다.

짐머가 근위대를 이끌고 다가왔다.


“저도 지금 황궁으로 들어가 봐야 해서요.”

“아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렇게 호위까지 안 해주셔도…….”

아델이 미안해하자 제니퍼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델 양은 소중한 내 제자입니다. 만일 아델 양이 잘못됐다면 저 오스월드가는 아마 내 손에 가루가 됐을 겁니다.”

제니퍼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보며 아델은 얼른 웃었다.


“마음만으로 충분해요, 스승님.”

“마음을 알아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제니퍼는 제 가슴을 쿵쿵 쳤다.


“자, 그럼 아델 양의 호위는 내게 맡기고, 짐머 자네는 어서 가보게!”

짐머가 아델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좀 모자라 보이긴 해도 나름 듬직할 겁니다.”

“뭣이! 이 꽃성애자놈이!”

“그럼 잘 부탁하네!”

짐머가 근위대원들을 데리고 말을 달려나가자, 제니퍼도 엄숙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호령했다.


“다들 아델 양의 마차를 호위한다. 전군 호위 대형으로!”

“호위 대형으로!”

우렁찬 그의 명령에 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아델의 마차를 에워쌌다.

아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저분들은 누구세요?”

마차 안에서 궁금한 얼굴로 기다리던 타냐가 물었다.


“우리를 집까지 호위해 줄 기사분들.”

타냐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둘러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분들이 그 유명한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이세요?”

“응.”

“와앗! 진짜 꿈만 같아요. 기사단의 호위라니. 꺅! 좋아라.”

“그렇게 좋아?”

“그럼요. 꼭 공주님이 된 것 같잖아요.”

아델도 창밖으로 보이는 제니퍼와 기사들의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좀 유난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든든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그토록 두렵던 오스월드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아델!”

아델이 예전에 살던 저택에 도착하자 미아가 어느새 마중을 나왔다.


“미아!”

“너 온다는 소식 듣고 부랴부랴 나왔어.”

“몸도 힘들 텐데, 뭐하러.”

“바로 옆집인데 뭘. 그리고 마크가 운동을 많이 하래. 요새 너무 살이 쪘거든.”

미아는 아직 배가 나오진 않았지만 살이 붙어서 제법 임신부의 태가 났다.


“어서 오십시오. 아델 양.”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곧 마차 소리를 듣고 핸리와 서너 명의 하인도 저택에서 나와 그녀를 반겼다.


“다들 어떻게 된 거죠?”

아델이 어리둥절해 하자 핸리가 말했다.


“아델 양이 며칠 이곳에서 묵으신다며 백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고마워요, 핸리.”

“그럼 일단 들어가서 식사부터 하시지요. 보니타 부인도 함께 드시겠습니까?”

“어머, 그럼 임신한 사람을 굶겨서 보낼 생각이었나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제니퍼도 능청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흠, 그러고 보니 벌써 식사 때가…….”

아델은 핸리에게 살며시 물었다.


“핸리, 오늘 식사는 다 함께 먹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다 함께라니요?”

“말 그대로 한 테이블에서 다 함께요.”

“설마 저희까지?”

“물론이죠.”

“안 됩니다. 그건 격식에 어긋나는…….”

“가끔은 파격도 재밌잖아요.”

“저도 도울게요!”

타냐가 팔을 걷어붙이자 모두 입을 모아 소리쳤다.


“안 돼! 넌 쉬라고!”

 

***

초저녁부터 시작된 식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 함께 하는 식사는 다 함께 준비했다.

식당에 있던 식탁은 거실 한복판으로 옮겨졌고, 그것으로는 자리가 모자라서 기사단이 금방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다.

아델은 잘 빨아뒀던 커튼을 테이블보로 깔고, 미아는 집에 있던 꽃을 가져와 장식했다. 핸리는 모자라는 촛대를 대신해 찻잔 받침 위에 양초를 세워놓았다.

그러는 동안 부엌에서 하나둘 음식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파티라 특별한 요리는 없었지만 다들 정신없이 먹고 떠들며 만족해했다. 분위기에 취해선지 누가 무슨 말만 해도 즐거워하며 크게 웃어댔다.


“괜찮아? 힘들면 들어가서 쉬어.”

그 와중에도 아델은 타냐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타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작게 속삭여왔다.


“저 지금 진짜 행복해요. 이렇게 떠들썩하고 즐거운 식사는 처음이라.”

살며시 상기된 타냐의 얼굴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오늘의 끔찍한 기억 따윈 다 잊은 것처럼.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랐다. 이런 떠들썩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그녀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덮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오랜만이네.”

예전에 아델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땐 가끔 이런 자리가 있었다. 마을의 축제가 있는 날이면 다들 모여서 웃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즐겼다. 어른들이 흥겨우면 아이들은 덩달아 신이 나기 마련이었다.

아델은 이 자리에 크리스틴이 없는 게 아쉬웠다.

초저녁에 시작된 식사는 그렇게 밤늦도록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변했다. 와인 통에 갇혀 있던 타냐를 생각해서 술은 와인이 아닌 맥주였다.

미아는 아쉬워하며 과일주스로 잔을 부딪쳤다.

***



“워, 워!”

늦은 밤 아델의 저택으로 돌아오던 크리스틴은 말을 멈췄다.

이 시끌벅적한 소리가 정말 아델의 집에서 들려오는 건가 싶었다.

처음엔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긴장했다. 하지만 곧 웃음소리가 대부분이라는 걸 깨닫고는 살며시 심술이 났다.


“왜 그러십니까, 단장님?”

뒤따라오던 짐머가 물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빼고 파티를 하는 모양이군.”

“에엣? 타냐가 아직 아플 텐데…….”

짐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틴은 이미 말을 달려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깊은 밤인데도 아델의 집은 불빛이 환했다. 그리고 담장 밖까지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정말이네요!”

짐머도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는 한편 저 분위기에 섞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가서 훼방을 놓을까요?”

“좋은 생각 같군.”

두 남자는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콰앙!

사납게 문을 열고 들어간 크리스틴은 한껏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빼고 이 재미난 파티를 즐기는 게 상당히 괘씸했으니까.

하지만 적군들도 떨게 만드는 그의 살벌한 표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크리스! 와아앙, 크리스다!”

아델이 비틀거리며 달려와 폴짝 안겨버린 것으로 상황종료였으니까.

그 뒤를 제니퍼가 쿵쾅거리며 성난 멧돼지처럼 쫓아왔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아델 양! 벌칙은 벌칙입니다!”

“벌칙이라니?”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으며 제니퍼를 째려보자, 아델이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고자질을 했다.


“크리스, 제니가 자꾸 술 먹이려고 해. 혼내죠! 나빠!”

아델은 코맹맹이에 혀는 반 토막이라도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크리스틴의 표정이 더욱 무시무시해지자 제니퍼가 얼른 변명했다.


“제가 아니라 핸리, 저 할아범이 원흉입니다! 게임을 해서 아델 양이 계속 벌칙주를 마셨거든요. 진짜 무슨 노친네가 게임을 저리 잘하는지.”

“과찬이십니다.”

핸리는 평소처럼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핸리를 본 크리스틴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핸리, 자네 머리에 그건…….”

미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벌칙이죠. 아델이 지면 술을 마시고, 핸리가 지면 머리에 꽃을 달고.”

그랬다. 언제나 점잖고 기품 있던 핸리의 머리 양쪽에는 두 송이의 꽃이 꽂혀 있었다.

그 대가로 아델은 취하도록 벌칙주를 마셨나 보다.

아델의 설욕을 대신 갚아주고 싶었던 크리스틴은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무슨 게임인지 모르지만 이번엔 나하고 하지.”

그러나 양쪽 머리에 꽃을 단 핸리는 평소처럼 기품 있고도 단호하게 사양했다.


“죄송합니다만, 전 이제 잘 시간이라서 그럼 이만.”

그는 점잖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핸리, 핸리! 도망치지 말아요! 이러는 게 어딨어!”

울먹이며 그를 쫓아가던 아델은 결국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크리스…… 흑!”

아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애처롭게 응시했다. 꼭 실연당한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크리스틴은 그런 아델의 모습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발그레한 얼굴로 취해서 울먹이는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흠흠, 이제 그만 자도록 해. 다른 사람들도 어서 정리하고.”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델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크리스틴에게 애원했다.


“크리스…… 흑, 나 오늘 이 꽃을 핸리의 머리에 다 꽂아 줄 때까지 절대 못 자. 핸리…… 핸리…… 돌아와요.”

비틀거리며 핸리를 쫓아가는 아델을 보며 다들 배를 움켜쥐었다.

얼핏 봐도 그녀의 손에 들린 꽃은 대여섯 송이는 되어 보였다.

결국 크리스틴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하고 해, 아델.”

“응?”

“무슨 게임인지 모르지만 나하고 해. 대신 단 한 번에 그 꽃 전부를 걸고. 게임에서 지면 조용히 들어가서 자는 거로. 콜?”

아델의 표정이 환해졌다.


“당신이 지면 이 꽃을 전부 머리에 달 거야?”

“물론.”

“후회할 텐데?”

게임이든 뭐든 지금까지 승부에서 져 본 적이라곤 없는 크리스틴이었다.


“후회하는 건 당신이겠지.”

“좋아, 콜.”

세기의 대결에 사람들은 모두 눈을 반짝였다. 자겠다며 들어갔던 핸리까지 슬그머니 나왔다.


“그래서 무슨 게임이지?”

크리스틴의 물음에 다들 한목소리로 외쳤다.


“고음 게임!”

“그게 뭔데?”

짐머가 옆에서 간단히 설명했다.


“번갈아 가며 점점 음을 높여서 노래하는 겁니다.”

‘노래’라는 말에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핸리가 아델을 이겼다고…… 하지 않았나?”

어느새 사람들 속에 합류한 핸리가 대답했다.


“제가 지금도 성가대에서 테너를 맡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크리스틴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게 바로 음악적 소양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음치였다. 그것도 지독한!


“크리스 얼른 하자! 하자!”

이런 상황에서 아델이 승부욕을 드러내며 눈을 반짝이자 크리스틴은 식은땀이 흘렀다.

이 모든 사람, 특히 이 많은 하인과 자신의 기사단 앞에서 노래라니.

지금껏 쌓아온 주인으로서의 위엄과 근엄한 이미지에 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참, 그러고 보니 폐하께 깜빡 잊고 보고를 안 한 게…….”

슬그머니 돌아서려는데,


“급한 보고라면 제가 가겠습니다, 단장님.”

짐머 이 망할 자식!


“에이, 비겁하게 도망치십니까?”

눈치 없는 제니퍼 놈까지!

결국 크리스틴은…….


“그냥 내가 져주지, 아델.”

음치인 것이 탄로 나고 머리에 꽃까지 다느니, 차라리 단칼에 패배를 인정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나았다.


“져주다니?”

“난 어차피 아델 당신을 이기지 못해. 사랑하니까.”

크리스틴이 느끼할 정도로 다정하게 바라보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에이, 단장님! 이건 아니죠!”

“백작님, 설마 음치세요?”

하지만 당사자인 아델은,


“으아아앙! 크리스!”

울음을 터트리며 크리스틴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그래. 내가 어떻게 당신과 싸우겠어. 잘못했어, 크리스. 흐윽, 용서해줘.”

이 말도 안 되는 전개에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술에 취한 아델은 감동한 얼굴로 훌쩍거렸다.

휴우.

크리스틴은 겨우 한시름 놓으며 아델을 달랬다.


“그럼 가서 잘까 아델?”

“응, 크리스!”

크리스틴이 아델을 번쩍 안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가자, 한껏 재미 난 구경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불현듯 야릇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기…… 아무래도 2차는 저희 집으로 옮기는 게 좋겠죠?”

미아의 센스있는 제의에 다들 동의했다.

물론 딱 한 명, 제니퍼는 예외였지만.


“어, 분위기 좋은데 왜? 뭐야,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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