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네가 곧 나의 집 (83/155)


83화. 네가 곧 나의 집
2022.11.18.



 
얀의 코앞에 바싹 다가온 크리스틴은 목소리를 한층 낮춰서 속삭였다.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얀? 늑대 일족은 평생 한 명의 반려와 잠자리를 한다는 사실.”

“……!”

순간 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톤은 이미 결혼을 한 전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에이프릴의 임신은 거짓이란 건가?

크리스틴이 쯧쯧 혀를 차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 자에게 황녀님이 이용당하고 계신 것 같군요. 물론 황녀님만 이용당했기를 바라겠습니다, 폐하.”

“……정말인가?”

대답 대신 크리스틴은 자신의 양쪽 어깨에 달린 견장을 잡아챘다.

툭. 툭.


“짐머.”

“예, 대장님.”

짐머가 얼른 다가오자 그는 어깨에서 떼어낸 견장을 건네주었다.


“폐하께 돌려드리도록.”

짐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얀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금색 술 달린 견장이 놓여 있었다. 근위대장 임관식 때 황제가 직접 달아준 견장이었다.


“지금 무슨……!”

“이제 그만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더는 귀족 놀음이 재미가 없어져서. 마블 궁의 짐은 정리되는 대로 빼지요.”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참,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곧 국채 만기일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제야 얀은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랬다. 곧 국채 만기일이 돌아오고 있었다.

오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고는 점점 비어 갔다. 그걸 국채를 발행해서 연방 중앙은행에 자금을 융통해 채운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연방 중앙은행의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전쟁이 끝나면 금방 경기가 좋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재정 지출은 많았고, 세수를 올리자는 안건에 귀족회가 사사건건 반대를 하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귀족회 놈들!

빌어먹을 짐승 놈들!

***

얀은 시종들과 근위대를 따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홀로 스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스톤은 아직 감옥으로 보내지기 직전으로 검은 성안의 격리시설에 구금되어 있었다.

간혹 황제를 알아본 사람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거느리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라는 걸 알고는 눈치껏 얼른 지나갔다.

뚜벅뚜벅.

고요한 발걸음 소리가 긴 복도를 울렸다.

어느덧 해가 저무는 늦은 오후였다. 복도의 창으로 보이는 붉은 해는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 벽에 드리웠다.

그 무렵 얀은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는 에이프릴이 자주 쓰던 것과 같았다.

설마?

그가 걸음을 멈추는 동안에도 모퉁이에서 생겨난 그림자는 점점 크게 길어졌다.

얀은 이유도 모른 채 얼른 기둥 뒤로 몸을 감췄다.

곧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에이프릴!

예상대로였음에도 얀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더구나 그 아이는 연신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펼쳤다. 두 눈은 비밀스럽게 반짝였고, 양 볼은 발그레한 것이 묘하게 선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더는 그가 알던 순진하던 딸은 거기에 없었다.

얀은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에이프릴의 팔을 꺾고, 스톤의 목을 베고 싶었다.

역시 주치의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크리스틴이 했던 그 말은 다 뭐란 말인가?

***

철컹!

철문이 열리자,


“오셨습니까, 폐하.”

스톤은 이미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는지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것이 얀에게는 오히려 조롱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조금 전까지 제 딸을 능멸한 파렴치한 짐승 놈 주제에!

얀은 목구멍까지 솟구치려는 노화를 가까스로 삼키며 말했다.


“오스월드 후작,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지?”

“무엇을 말씀입니까, 폐하?”

스톤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많은 백성을 왜 그리 무참하게 살육했느냐 말이다!”

“묻고 싶은 게 정말 그것뿐입니까, 폐하?”

순간 얀은 뜨끔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놈의 눈은 어딘가 익숙했다. 사람의 속을 꿰뚫는 것 같은 크리스틴과 닮은 것이다.

하지만 얀은 놈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렸다.


“내 딸을 인질 삼아 협박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나는 네놈이 늑대 일족이라는 것도, 늑대 일족은 평생 한 사람의 반려와 짝을 이룬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백작이 그러던가요?”

“네놈이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

하지만 스톤은 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놈은 늑대 일족이었군요. 늑대 일족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걸 보니.”

“닥쳐라, 스톤! 네놈은 곧 처형될 것이다!”

“저런, 가여운 황녀님은 아비도 없는 아이를 낳게 생기셨군요.”

결국 분노한 얀은 스톤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쿵!


“네 이노옴! 감히 내 딸을 능멸하다니!”

그러나 멱살을 잡힌 스톤은 기분 나쁘게 웃을 뿐이었다. 분노하는 상대를 보는 것이 즐겁다는 듯.


“폐하, 조금 전 나가는 에이프릴을 보셔서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이미 저희 둘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랍니다.”

“닥쳐! 그 사악한 혀에 놀아날 줄 알고!”

그러나 스톤은 멱살을 쥔 얀의 손을 침착하게 떼어냈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얀은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어른과 아이만큼이나 힘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좋습니다. 백작의 말대로 제가 늑대 일족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아무리 늑대 일족이라도 반려가 죽은 지 10년쯤 지나면 새 반려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종족은 번식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얀은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건가?

에이프릴이 정말 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리고 지금 더 중요한 문제는 전대 황제를 누가 죽였느냐가 아닐까요?”

얀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뭐라?”

“로드웰 공작가에서는 은빛 늑대의 짓이라던데, 그 늑대가 백작이라면…… 그 배후는 바로 폐하가 되시겠군요?”

“……!”

얀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스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역시! 제가 눈치가 꽤 빠르답니다, 폐하.”

이러다간 놈에게 한없이 끌려다니게 되리라.


“그딴 허튼소린 지옥에 가서 지껄이도록 해라. 네놈은 곧 처형될 것이고 에이프릴은 수녀원으로 보내질 테니. 짐은 내 백성과 내 나라에 해를 끼친 살인마를 원칙대로 처벌할 것이다. 이 원칙에 예외는 없다!”

얀은 정색하며 황제로서의 위엄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스톤에겐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저를 죽여 얻는 게 무엇입니까, 폐하?”

“뭐라?”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보시지요. 결정은 그 뒤에 하셔도 늦지 않으니.”

스톤은 달콤하게 웃으며 얀을 향해 다가들었다.

교활한 그림자가 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



“대장님, 정말 이렇게 그만두십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크리스틴이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는데 소식을 들은 근위대들이 몰려왔다.

조금 전 장교들에겐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인사를 했지만 다들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린힐의 연쇄살인마를 잡는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그였다. 다들 그가 곧 후작에 봉해질 거라고 예상하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그동안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틴은 더 이상의 작별인사 없이 문을 나섰다.

그의 뒤로 짐머가 서류와 소지품이 든 상자를 들고 따랐다.

미련 따윈 없었다.

이미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이제는 소중한 그것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을 생각이었다.

본궁을 나오던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칫했다.

바람결에 아델의 향기가 실려 온 것이다.

지금쯤 그녀는 미아와 함께 자신의 저택에 있을 텐데.

설마 다시 황궁에 들어온 걸까?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정원의 분수대 근처에 서 있는 아델을 발견했다.

이제 막 꽃눈을 틔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에서 연 핑크색 보닛과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대로 살구꽃 같았다.


“크리스.”

아델도 그를 발견하고는 엷게 웃었다.


“아직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델이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있는 곳이 내 집이지.”

그러더니 살갑게 크리스틴의 팔짱을 꼈다.


“잊었어? 누가 뭐래도 당신과 나는 한 짝이라는 거. 신발이나 장갑처럼.”

“하!”

크리스틴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러나 아델이 대수롭지 않게 했을지 모를 그 말이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네가 있는 곳이 나의 집…….

그에게도 그랬다.

숱한 전쟁터에서도 그리워했던 게 그녀였는지 그녀가 살았던 집이었는지 가끔 헷갈리곤 했었다.

그러나 그녀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가 그리워했던 건 아델과 함께 살았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는 걸.

그녀가 곧 그의 집인 것이다.


“그런데 당신 어깨의 견장이…….”

“아아, 이거? 근위대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거든.”

그는 마치 놀이라도 그만둔 것처럼 빈 어깨를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

그러나 아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요즘 황제와 그의 불화설이 심심치 않게 회자 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근위대를 그만둔 걸 보면 필시 둘 사이에 큰 트러블이 있었으리라.

그 이유는 스톤일 것이고.

아델은 이러다가 크리스틴이 어떤 화라도 당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상대는 황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짐작한 크리스틴은 달콤하게 웃었다.


“너무 바빠서 내 약혼녀를 사랑해줄 시간이 모자라서 말이지.”

“지금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데.”

“난 마음보단 몸으로 표현해주고 싶어.”

그가 능청스럽게 속삭이자, 아델은 당혹스러워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얘긴 밖에서 하지 말라니까!”

속삭이며 나무라는 아델을 보며 그는 오히려 어이없어했다.


“뭐야. 어제 했던 고백은 기억 못 하는 건가?”

“고백이라니?”

“다른 여자들이 날 보는 것도 질투 난다며. 황녀님이랑 약혼 얘기가 나올 땐 질투가 나서 미쳐버리는 줄…… 헙!”

아델이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언제. 없는 말 지어내지 마!”

크리스틴이 장난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떼어냈다.


“뭐야, 없는 말이라면서 얼굴이 새빨개지는 건 뭐지?”

“더워서 그래. 추울 줄 알고 옷을 두껍게 입었더니.”

아델은 새침한 얼굴로 손부채질을 해댔다.


“아, 그러셔? 하여간 취중 진담이 얼마나 노골적이던지. 이 예쁜 머릿속에 그렇게 야한 생각이 가득한 줄 몰랐…….”

“그만, 그만 안 해!”

아델이 다시 달려들어 입을 막으려 하자, 크리스틴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도망가며 놀려댔다.

촤아아!

순간 분수대의 물줄기가 힘차게 솟구쳤고, 두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함께 뒤섞였다.

마침 스톤을 만나고 나오던 얀의 걸음이 멈칫했다.

저 멀리에서 크리스틴과 아델이 장난스러운 아이들처럼 정원을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놈은 근위대를 그만둬놓고 뭐가 그리 좋은지 저토록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얀은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이렇게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네놈은……!’

 

 
한때는 훌륭한 충복이라고 생각했었다.

놈을 수하로 두었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전투마다 그는 항상 승리했고, 그의 영광은 곧 황제의 영광이었다. 그의 주군이라는 것은 가장 큰 자랑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걸 아낌없이 주었다. 원한다면 땅도 주고, 광산도 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민 놈을 귀족으로 만들어주었고, 아끼는 딸까지 주려고 했건만…….

그런데 이제 보니 놈은 자신을 이용해 필요한 것만 가져간 것이다.

석탄 쪼가리나 나오던 광산에 그토록 엄청난 다이아몬드와 희귀 광물들이 매장되어 있다는 건 추호도 몰랐으니까.

광산만 제 손에 있었어도 이토록 재정난에 시달리진 않았을 텐데.


‘교활한 놈. 이제 얻을 건 다 얻었으니 내 손을 놓겠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떠나려거든 네놈이 가진 것도 당연히 내놓아야지.’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보시지요. 결정은 그 뒤에 하셔도 늦지 않으니.”


“말하라.”


“저를 죽이면 에이프릴을 잃겠지만, 놈을 죽이면 놈이 가진 모든 게 폐하의 것이 됩니다. 재물도 영광도……. 제가 그리 만들어 드리지요. 폐하의 사위인 제가 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