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사랑한다는 말로도 부족한
(8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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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사랑한다는 말로도 부족한
2022.11.21.
마블 궁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하인들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루스울프로 떠날 테니 최대한 간소하게 꾸리도록.”
“예, 주인님.”
하지만 대답하는 핸리나 짐을 꾸리는 하인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잠시만 크리스.”
그걸 눈치챈 아델이 응접실로 살며시 불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하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다니?”
“그러니까 루스울프로 함께 가는 건지…….”
“저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다행이다.”
오히려 크리스틴이 어이없어했다.
“그럼 내가 해고라도 할 줄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러더니 아델은 얼른 몸을 돌려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순간 문밖에서 귀를 대고 엿듣던 하인들의 당황한 얼굴과 마주쳤다.
다들 짐을 싸는 척하며 둘의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는지 물으려고 했습니다.”
핸리가 능청스럽게 둘러대자,
“그렇게 보기엔 이 상황은 무리가 좀 있어 보이는군?”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으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아델이 얼른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참, 좋은 소식이 있어요. 백작님께서 원하는 모든 사람을 루스울프로 데려가신답니다.”
그러자 눈치를 보며 주뼛거리던 하인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다들 성격 참 이상하군. 나 같은 괴팍한 주인을 따라가는 게 뭐 좋다고.”
아델이 살며시 속삭였다.
“괴팍한 주인은 많지만 그걸 아는 주인은 드물거든.”
“뭐?”
인상을 쓰는 크리스틴의 허리에 매달리며 그녀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물론 난 당신이 아무리 괴팍해도 사랑하지만.”
“하, 괴팍하다는 게 본심인가? 사랑한다는 게 본심인가?”
“궁금하면 오늘 밤 침대에서 알려줄게.”
크리스틴이 키스할 듯 얼굴을 내리며 속삭였다.
“꼭 오늘 밤까지 기다려야 할까? 당장 침대로 갈 수 있는데.”
그렇게 두 사람이 달라붙어 낯간지러운 밀어를 속삭일 때였다.
“흠흠!”
언제부터인지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던 짐머가 난처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들어온 교황청 소식입니다.”
교황청이라는 말에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제는 두렵지 않았지만 교황청이라는 존재는 확실히 성가셨으니까.
이번 연쇄 살인에 관한 얘기가 교황청까지 흘러 들어간 건가?
“아델, 잠시 나가 있어 주겠어?”
“이 얘긴 아델 양도 함께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짐머의 단호한 말에 크리스틴은 물론 아델도 덩달아 긴장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짐머는 매우 심각하게 말했다.
“이의신청이 기각되었답니다.”
앞뒤를 자른 말에 크리스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짐머가 금방 표정을 바꿔 씩 웃었다.
“스톤 오스월드가 교황청에 제기한 아델 양의 재혼에 관한 이의신청이 기각되었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가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아델이 믿기지 않아서 되묻자 짐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혼인 가능하십니다!”
***
그날 밤.
목욕을 마친 아델은 나이트가운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침실로 나왔다.
침실에는 이미 크리스틴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헐렁한 리넨 셔츠를 대충 걸쳐 입은 차림으로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 은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크리스틴이 고개를 돌려 아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혼자 마셨는지 두 볼이 살며시 붉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진 그가 조금 귀여웠다.
“내일 할 일을 생각 중이었어.”
“근위대는 그만뒀다며?”
“우리의 결혼식 준비.”
“결혼식은 루스울프에 가서 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 그때까지 참으라고?”
정색하는 그를 보며 아델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녀도 결혼식을 고대하긴 했지만 지금과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내일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그는 와인 잔을 내려놓더니 자연스럽게 아델의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어 물기를 닦아주었다. 언제부터인지 그가 아델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이젠 타냐 만큼이나 제법 능숙해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이 시간엔 식을 올릴만한 예배당이 없을 테니까.”
“어디 찾아보면 있을지도.”
아델이 장난으로 해본 말인데 그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한번 알아볼까?”
너무나 진지한 크리스틴을 보며 그녀가 놀리듯 웃었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서둘러. 난 이미 당신의 아내인데.”
“난 당신이 더이상 아델 양이 아닌 바이스 백작 부인으로 불렸으면 좋겠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내 아내.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됐으면 해.”
“물론 그건 나도 바라던 일이야.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동경해오던 결혼식이 있다고.”
“동경해오던 결혼식?”
아델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치 멀리 펼쳐진 그 어떤 곳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억나? 가르덴 호숫가 근처에 있던 작은 성당.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서 결혼식을 올렸잖아. 엄마와 아저씨도 그곳에서 식을 올릴 예정이었고.”
“기억나.”
“봄엔 성당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새하얗게 날렸지. 여름이면 담장에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폈고…….”
“음, 동화처럼 아름다운 곳이었어.”
”무엇보다 난 결혼식이 끝나고 온 마을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간이 참 좋았어. 그러면 다들 진심으로 그 부부가 영원히 행복해지길 기도해주곤 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축복받는 결혼식이란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크리스틴은 등 뒤에서 아델의 날씬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으며 나직하게 약속했다.
“그래, 루스울프로 돌아가는 대로 꼭 가르덴 호숫가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지금 돌아가면 아마 벚꽃이 지기 전에 식을 올릴 수 있을 거야.”
그의 영지인 루스울프는 칼라임의 최북단에 위치했고, 아델과 크리스틴이 살던 마을은 루스울프에서도 끝자락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제일 늦게 꽃이 피었던 곳. 영지 내에서도 소외되다시피 했던 작은 광산 마을.
하지만 칼라임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이었다.
“고마워. 이해해줘서.”
“당신이 원하면 뭐든 다 해줄 거야.”
“정말이지?”
“물론.”
“그럼 아이도……?”
아이라는 말에 크리스틴이 잠시 멈칫했다.
아델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내가 정식으로 당신의 아내가 되면 우리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아델…….”
“혹시…… 아이를 가져선 안 되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델은 난처해하는 크리스틴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사실 그가 왜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델 역시 그의 정체를 듣고 싶은 마음이 반,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만일 그가 직접 은빛 늑대라고 밝힌다면 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추측하는 것과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엄마를 죽인 게 그가 아니라고 해도 솔직히 겁이 났다. 다른 종족이라니.
“아니야. 아이 얘기는 결혼식을 올린 후에 하자.”
아델은 결국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시인했다.
“아델, 당신이 그렇게 아이를 원할 줄은 몰랐어.”
“단순히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라, 당신과 나의 아이를 원하는 거야. 미아가 그러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대. 하지만 난 지금 이대로도 좋아. 서로 충분히 사랑하는 걸 아니까.”
“난 모르겠는걸.”
그러더니 크리스틴은 고개를 숙여 음흉하게 덧붙였다.
“당신을 안을 때는 확실히 알겠는데, 자꾸 잊게 돼.”
“무, 무슨…… 꺅!”
그가 아델을 번쩍 안아 창문턱에 앉혔다. 그리고 날씬한 두 다리 사이로 바싹 다가들며 사르르 눈웃음쳤다.
“그러니까 아델 당신이 머리 나쁜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아델은 저도 모르게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늑대 일족은 어쩌면 요괴, 아니 요물일지도 몰랐다.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요염하게 웃으며 사람의 혼을 빼놓기도 했으니까.
그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은밀하게 다리를 어루만져왔다. 너무나 익숙한 손길에 아델은 반사적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학습된 쾌락이 야릇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너무 쉬운 여자가 된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초옥. 초옥…….
기꺼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는 크리스틴을 보자 모든 게 상관없어져 버렸다.
서로에게만은 자존심 따위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키스 해줘, 크리스.”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속삭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아델의 손은 자연스럽게 두툼한 목덜미를 쓰다듬고, 단추를 풀며 셔츠의 안으로 들어와 탄탄한 살갗을 어루만졌다.
달아오른 숨결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탐닉이 과감하고 뜨거워졌다.
순간 그가 아델의 엉덩이를 받치며 번쩍 안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아델도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당신 이제 큰일 났다.”
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야릇하게 위협해왔다.
“뭐가?”
“내가 내일부터 출근을 안 하거든.”
“……그게 왜……?”
“몇 날 며칠이고 당신을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말이지.”
“……!”
놀랄 새도 없이 아델은 어느새 침대 위에 눕혀졌고, 그의 양팔과 양 무릎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크리스…… 설마 농담이지?”
“농담처럼 보여?”
아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평소보다 더 이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델은 천천히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이스 백작이 이토록 뜨겁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귀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직 나만이 아는 내 남자.
“내가 당신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너의 비밀.
그걸 확인해도 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딱!
크리스틴이 아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웃었다.
“농담이야. 그렇게까지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아델은 녹색 눈동자 속에 온통 그를 담은 채로 고백했다.
“사랑해, 크리스.”
“나도.”
사랑한다는 말로도 차마 성에 차지 않는 사람.
나의 심장.
나의 모든 것.
나는 아마 언젠가 너를 인정하게 될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다음 날 아침.
크리스틴은 품에 안긴 채 잠든 아델의 흐트러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넘겨 주었다.
간지러운지 아델이 콧등을 찡그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렸을 땐 누나라며 어른인 척 굴더니 자는 모습이 꼭 아기 같았다.
작고 귀여운…….
아기…….
그녀를 닮은 아기는 얼마나 더 귀여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크리스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아기를 가지려면 모두 다 얘기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늑대 일족이며, 그 능력으로 전대 황제를 죽이고, 수많은 적을 살육한 대가로 전쟁터의 영웅이 되었다는 것까지.
그러고도 그녀가 과연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할까??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크리스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온 모양이군.’
멀리서 황제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창가로 다가가자 근위대를 거느린 채 마블 궁 안으로 들어오는 얀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친히 왕림하신 걸 보니, 꽤 급한 용건인가 보군.’
***
크리스틴이 중앙 접견실로 가자 얀은 사람들을 물린 채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송구합니다, 폐하. 막 잠에서 깨어난 터라.”
황제를 맞이하는 크리스틴은 나이트가운 차림이었다. 더는 얀을 주군으로서 대접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 속내를 읽었는지 얀은 미간을 모았지만 표를 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황제라도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건 실례겠지. 하지만 이건 알아두게. 난 아직 자네를 해임한 적이 없네.”
“집착은 사양하고 싶은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갖고 왔네.”
“좋은 소식부터.”
“교황청에서 스톤의 이의신청을 기각했네. 그러니 자네와 아델 양은 정식으로 혼인할 수가 있게 됐어.”
그 말을 듣고도 크리스틴의 표정 변화가 없자 얀은 조금 머쓱해 했다.
“이미 알고 있었나 보군.”
“조금 전에.”
“그럼 나쁜 소식도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