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얀의 마지막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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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얀의 마지막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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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얀의 마지막 임무
2022.11.25.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갖고 왔네.”
“좋은 소식부터.”
“교황청에서 스톤의 이의신청을 기각했네. 그러니 자네와 아델 양은 정식으로 혼인할 수가 있게 됐어.”
그 말을 듣고도 크리스틴의 표정 변화가 없자 얀은 조금 머쓱해 했다.
“이미 알고 있었나 보군.”
“조금 전에.”
“그럼 나쁜 소식도 들었나?”
나쁜 소식이라는 말에 크리스틴이 관심을 보이자 얀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로드웰 공작이 교황청에 서신을 쓴 모양이야. 칼라임에 나타난 은빛 늑대를 조사해 달라고 말이지.”
“은빛 늑대는 스톤이 정체를 감추기 위해 퍼트린 가짜 소문이라고 결론 난 걸로 아는데.”
“나도 그리 말했지. 그러나 공작은 이번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서신을 직접 들고 교황청으로 간다더군.”
크리스틴은 대수롭지 않게 코웃음 쳤다.
“증거도 없는데 교황청에서 믿을까?”
“로드웰 공작이라면 교황청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교황청에서 조사를 시작하면 스톤은 물론 자네까지 위험해질 수 있네.”
크리스틴은 얀의 교활한 속내를 읽었다.
“그래서 로드웰 공작을 처리해달라?”
조금 전까지 한숨을 내쉬던 얀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말귀가 빠르군.”
그는 자신의 손을 빌려 로드웰 공작을 처리하고, 스톤이 늑대 일족이라는 게 밝혀지는 걸 막고 싶은 것이다. 자칫하면 에이프릴까지 다칠지 몰랐으니까.
“거절하지.”
얀은 이미 거절당할 걸 짐작하고 온 모양이다. 바로 다음 조건이 이어졌으니까.
“이번 일만 해결되면 자넬 공작으로 봉하지. 그리고 영웅 대접을 받으며 영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네. 원한다면 자치권도 줄 수 있어.”
“당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이제 없을거다, 얀.”
그러자 얀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그럼 정체가 발각되어 교황청으로부터 쫓기고 싶나? 이제 자네 아내도 생각해야지. 응? 이번이 마지막일세. 황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크리스틴은 얀의 약속 따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청에서 조사관이 나온다면 확실히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
“그럼 당분간 푹 쉬고 나서 보도록 하지.”
접견실을 나온 얀은 한껏 자상한 표정이었다. 마치 크리스틴이 걱정되어 친히 방문한 사람처럼. 부탁 따위 한 적 없다는 듯 근위대들을 거느리고 돌아가는 뒷모습은 여전히 오만했다.
그러나 아델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가 계산적이고 어떤 면에선 스톤보다 더 교활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게다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틴의 표정이 꽤 복잡해 보였다.
“페하께서 왜 다녀가셨어?”
황제가 마차를 타고 사라지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게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
“못 들어주겠다고 하지 그랬어.”
그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해도 돼? 상대는 황제인데?”
아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상대는 황제였지. 생각 같아선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뒤통수에 소금이라도 뿌려주고 싶네.”
“한번 해보지 그랬어. 재밌겠는데.”
크리스틴이 쿡쿡거리며 웃자, 아델이 엷게 눈을 흘겼다.
“지금 웃음이 나와?”
“마지막 부탁이래. 그 일만 마무리 해주면 루스울프로 돌아가도 좋대.”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에 아델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 부탁…… 위험한 일이지?”
“아델, 내게 위험한 일 따윈 없어.”
“와, 이 자신감은 뭐지? 그럼 무슨 일인지 말해줘.”
크리스틴은 애매한 표정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말 안 해주는 걸 보니까 위험한 일 맞네.”
“2, 3일 정도 어딜 좀 다녀와야 해.”
“어디?”
“돌아오는 대로 루스울프로 떠나자.”
계속 대답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2, 3일 동안 대체 어디를 가는데?”
잠시 망설이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블루게일. 미안하지만 더는 말해 줄 수 없어.”
하지만 아델의 녹색 눈은 거길 무슨 목적으로 가는 건지 집요하게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이러다간 모두 자백해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아델의 어깨를 식당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질문 끝! 그만 식사하러 가자.”
“칫!”
아델이 입을 삐죽 내밀자,
초옥.
“핫, 뭐야!”
깜짝 놀란 아델이 입술을 막으며 바라보자 그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입을 내밀기에 키스해달라는 건 줄 알았지.”
“헐. 당신 언제 이렇게 느끼해진 거야?”
“그러게. 내가 언제 이렇게 느끼해졌지?”
“앞으로 이런 짓은 내 앞에서만 해. 알았지?”
“응.”
초옥.
이번엔 아델이 그에게 입을 맞추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건 약속 도장.”
그런 아델이 귀여워서 크리스틴은 다시 입 맞추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
다음 날.
아델이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땐 그가 누웠던 옆자리가 이미 차가웠다.
아침에 떠나는 줄 알았는데 모두 잠든 새벽에 떠났나 보다.
그의 빈자리엔 대신 곱게 접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벚꽃이 지기 전에 가르덴 호숫가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자.
사랑하는 남편이.]
“치이.”
아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의 메모를 곱게 접어 피스톨을 넣어둔 상자에 같이 넣었다.
그러다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정원수 아래에 짐머가 타냐와 함께 있는 게 보였다.
같이 떠난 게 아니었나?
얼른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백작님과 동행한 게 아니었나요, 짐머 경?”
타냐와 얘기 중이던 짐머는 얼른 돌아보았다. 늘 침착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더불어 그의 앞에 있던 타냐도 두 뺨이 살며시 붉었다.
“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가씨.”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타냐는 짐 정리를 하려면 바쁘다며 얼른 뛰어갔다.
“제 옷을 수선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짐머는 머쓱해 하며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꽤 좋아 보이던걸요.”
“핫, 오해십니다!”
“그나저나 백작님과 함께 떠나는 줄 알았는데요.”
“이번엔 혼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 떠나신 건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별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씀은…….”
“무슨 일로 떠났는지 물어도 대답 안 해줄 거죠?”
“죄송합니다.”
짐머는 고개를 꾸벅 숙일 뿐이었다.
온화하고 조용해 보이는 성품의 짐머였지만 누구보다 입이 무겁다는 걸 아델은 알았다. 그러니 크리스틴이 심복으로 곁에 두는 것이리라.
“알겠어요.”
그래, 별일 없겠지.
하지만 아델은 어제부터 이상한 불안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는 건 그의 임무가 그만큼 비밀스럽다는 것.
비밀스러운 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교활한 황제가 친히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인데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
하지만 아델은 크리스틴의 걱정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는 대로 루스울프로 떠나려면 정리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가져가야 할 짐을 선별하고, 이동할 때 필요한 마차와 인부들도 수배해야 했다. 또한, 이동 시에 쓰게 될 물자와 간단한 먹거리들, 묵게 될 숙소도 알아봐야 했다. 정산해야 할 결제 대금도 여러 군데였다.
대부분은 핸리와 하녀장이 알아서 했지만 최종 결정은 안주인인 아델의 몫이었다.
그러다 샤넬의 집에서 웨딩드레스를 가봉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땐 깜짝 놀랐다.
“잊고 계셨군요, 약혼식 드레스를 맞출 때 웨딩드레스와 피로연 드레스 디자인도 함께 보셨잖아요.”
샤넬 부인의 말을 듣고 나니 아델은 기억이 났다.
일전에 약혼식 드레스를 맞추면서 웨딩드레스도 함께 봤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결혼식을 올릴 수 없게 되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제작을 의뢰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백작님께서 같이 주문해 두셨어요. 곧 식을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그랬군요.”
크리스틴 역시 자신만큼이나 결혼식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결혼식에 제대로 된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웨딩드레스도 없이 결혼할 뻔했다.
아델이 가봉한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샤넬 부인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정말 아름다워요! 약혼식 드레스가 천사였다면, 웨딩드레스는 여신이네요!”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가슴선을 따라 깊게 팬 네크라인에 퍼프 소매가 달려 있었다. 스커트는 하늘거리는 시폰 천이 화사하게 펼쳐졌고, 허리 중심부에서부터 전체적으로 진주와 크리스털이 은은하고도 화려하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델은 과하게 화려하고 과감한 디자인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원래 봤던 디자인보다 가슴이 많이 보이는 것 같네요.”
“제 디자인의 모토는 ‘아름다운 곳을 더 돋보이게’ 랍니다. 저만 믿으세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가 될 테니까.”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라니요?”
샤넬 부인은 마치 어떤 대상을 의식하고 말한 것 같았다.
“그게…… 황녀님도 곧 결혼하실 모양이더라고요.”
“황녀님이요?”
샤넬 부인은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사실 제 친구가 황궁 재단사로 있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 황후께서 비밀스럽게 부르더니 황녀님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하라고 하셨대요.”
아델은 혼란스러웠다.
“오스월드 후작은 지금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요. 백작님이 어렵게 잡으셨는데 어쩌면 곧 풀려나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그런 끔찍한 죄를 짓고도 풀려난다면 이건 황제가 작정하고 놓아주는 거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놓고 크리스틴에게 마지막이라며 무슨 부탁을 한 걸까?
“그런데 더 이상한 게 뭔 줄 아세요?”
“더 이상한 거라니요?”
“글쎄 황녀님의 치수를 재지 못하게 했대요. 최근 살이 찐 것 같으니 평소보다 넉넉하게 만들라고만 했다네요.”
“왜 그런……?”
샤넬 부인은 아까보다 더 목소리를 낮췄다.
“가끔 저희 숍에도 그런 주문을 하는 귀부인들이 있거든요. 대부분 임신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설마 에이프릴이 스톤의 아이를?
아델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샤넬 부인은 얼른 발뺌했다.
“물론 황녀님이 그랬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핫! 깜짝이야!”
비밀스러운 얘기를 마치고 가봉실을 나가던 샤넬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문 앞에 이자벨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귀신이라도 되나? 왜 그렇게 놀라지?”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몸이 허해졌는지 깜짝깜짝 잘 놀라네요.”
“안녕하세요, 선황후 폐하.”
아델이 공손히 인사를 하자 샤넬 부인은 살았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소식 들었어요. 결혼 축하해요, 아델 양.”
“감사합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시간 괜찮죠?”
“물론입니다.”
***
샤넬의 집을 나온 두 사람은 일전에 바자회가 열렸던 성당으로 갔다.
평일이라 성당 안은 간혹 회랑을 지나는 사제들뿐, 고요하고 한적했다.
이자벨은 나무로 둘러싸인 중정의 벤치에 앉았다. 나뭇가지 위에는 하나같이 연녹색 새순이나 꽃봉오리가 매달려 있었다. 긴 겨울을 무사히 살아냈다는 생존을 알리려는 듯.
“난 여기 이 자리가 참 좋아요. 마음이 평온해지고 잡념이 사라진다고 할까?”
이자벨은 멀리서 들려오는 성가대의 합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뭔가요?”
하지만 아델은 그녀처럼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스톤이 곧 풀려날지도 몰랐으니까.
“아델 양의 말대로 그린힐의 연쇄살인범은 오스월드 후작이었더군요. 하지만 나와 아버님은 선황제를 시해한 범인은 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바이스 백작을 의심하시나요?”
“글쎄요. 그건 교황청에서 밝혀주겠지요.”
“그게 무슨……?”
“아버님이 오늘 교황청으로 갔답니다. 이번 연쇄 살인사건이 늑대 일족의 짓이라고 보고한다면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보일 테니까요. 모든 건 두고 보면 알겠죠.”
“만일 놈이 늑대 일족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교황청에서 직접 심문할 거야. 오스월드 가는 몰락할 거고. 그리고…….”
아델은 언젠가 크리스틴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교황청에서 개입한다면 스톤과 오스월드 가는 몰락하게 될 것이다. 아델이 원하던 바였다.
하지만 그러면 크리스틴도 위험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정말로 늑대 일족이고, 교황청에서 그 정체를 알게 된다면…….
“제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백작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어요. 황제와 우리, 누구 편에 설 것인지. 우리를 돕겠다면 아버님은 내가 막아보도록 하죠.”
“백작이 은빛 늑대라고 단정 짓고 계시네요.”
“물론 아니기를 바란답니다.”
이자벨은 그렇게 우아한 협박을 하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아델은 황제가 크리스틴에게 시킨 마지막 임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교황청이라면…… 블루게일에 있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순간 아델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크리스틴이 새벽에 블루게일로 떠난 것은 교황청으로 가는 로드웰 공작을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얀은 그에게 공작의 암살을 지시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놓고 뒤로는 에이프릴과 스톤의 결혼 준비라니.
얀, 이 배신자!
“괜찮아요?”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이자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아델이 허둥지둥 인사를 마치고 중정을 나오는데 짐머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스톤 오스월드가 풀려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