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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암흑 속의 습격자 (86/155)


86화. 암흑 속의 습격자
2022.11.28.



 


“워, 워!”

한 무리의 일행들이 황급히 말을 세웠다.

지도대로라면 길이 있어야 할 곳에 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무슨 일인가?”

황금 장식이 달린 마차 안에서 온화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교황청으로 향하는 로드웰 공작과 그를 호위하는 공작가의 기사단이었다.

제일 선두에 있던 기사단장이 마차에 다가가 보고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중간에 이정표가 틀렸던 모양입니다.”

드르륵.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로드웰 공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귀족회의 수장인 그는 온통 백발에 살집이 있는 온유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짙은 갈색 눈동자는 강단 있고 심지가 굳어 보였다.


“이런,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데.”

숲이라서 해가 기울면 금방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돌아서 시내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기사단장의 물음에 공작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미안하네만 벌써 피곤하군. 오늘은 그냥 가까운 근처에서 묵는 게 좋겠네.”

얼마 전 겨우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그에겐 종일 마차를 타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예, 마땅한 숙소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얼마 후 공작 일행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낡은 산장을 발견했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십니까?”

몇 번을 불렀지만 산장 안에선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웠는데 불이 켜져 있지 않은 걸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의 보고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지. 얌전히 머물고 내일 떠나는 수밖에. 대신 사용료는 두둑하게 놓고 가세.”

“예, 공작님.”

로드웰 공작은 시종과 주치의의 부축을 받아 2층의 제일 큰 침실로 올라갔다.

빈집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었나 보다. 집 안의 가구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부엌엔 식자재들도 남아 있었다.


“곧 식사를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시종의 말에 공작은 손을 내저으며 침대로 향했다.


“됐네. 나는 좀 쉬어야겠어.”

“그럼 시장하시면 언제라도 종을 울리십시오.”

“그럼세.”

침대에 누운 공작이 곧 눈을 감자, 시종은 그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침실을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굴에 와닿는 서늘한 바람에 공작은 잠에서 깨어났다.

촛불도 꺼졌는지 침실 안엔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열린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에 어렴풋이 방안의 형체들이 보였다.

창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낯선 침입자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갑자기 소란을 떨면 오히려 침입자를 자극할 수 있었으니까.


“게 누구시오?”

어둠 속에서 굵은 저음의 대답이 들려왔다.


“소리쳐서 사람을 부를 생각은 마십시오. 공작님의 기사단이 모두 몰려와도 제 상대가 되지 못하니.”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내용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벌했다. 그리고 그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온 공작은 직감했다.


“설마…… 바이스 백작?”

 

***

칼라임 수도 그린힐의 외곽지역.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델의 기별을 받은 제니퍼가 수하들을 이끌고 헐레벌떡 말을 몰아왔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얼른 백작님을 찾아야 해요! 짐머 경이 먼저 출발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백작님은 지금 블루게일의 교황청으로 향하고 있을 거예요. 함정에 빠졌을지 모르니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해요.”

아델은 다급했지만 제니퍼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크리스틴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어쨌든 교황청으로 가시는 백작님을 찾으면 되는 거죠?”

“네, 되도록 빨리. 어서 서둘러요!”

아델이 이렇게 다급한 이유는 스톤 때문이었다.

조금 전 스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전해 온 짐머는 다시 덧붙여서 말했다.


“놈은 풀려나자마자 블루게일로 향하고 있답니다!”

 
그 순간 아델은 줄곧 느꼈던 불안감의 실체와 맞닥트렸다.

스톤이 블루게일로 향하는 이유는 크리스틴을 습격하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얀은 크리스틴을 이용해 로드웰 공작을 암살하고, 다시 스톤을 시켜 그의 뒤를 칠 계획인 것이다.

얀, 스톤!

결국 교활한 악마들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었다.


‘안돼!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아!’

아델은 제니퍼, 그리고 W.G 제1 부대원들과 함께 서둘러 블루게일로 향했다.

***



“교황청으로 가시는 중이란 얘길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아무 감정이 없어서 섬뜩했다.


“자네가 이 산장으로 우리를 유인한 건가?”

“대화하려면 아무래도 조용한 곳이 좋을 테니까.”

크리스틴은 정말 대화를 나누려고 온 사람처럼 창가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공작은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았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시내의 고급 여관에 묵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잘못된 이정표를 따라 산속에서 길을 잃고 이 산장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게 모두 이 남자의 계획대로 움직인 거였다.

이런 외딴 산장이라면 자신의 일행들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날 죽일 생각인가?”

“그건 협상이 결렬된 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협상?”

“선황제의 시해 사건에 대해 증언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말에 공작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거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은 황제의 오른팔이 아니었던가?


“설마…… 황제를 배신하겠다는 건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얀과 저는 서로가 필요해서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서로 필요 없어졌으니 손을 놓는 것이죠.”

“해서 자네가 내게 원하는 건?”

“교황청으로 가는 여정을 멈추고, 더이상 늑대 일족에 관해 알려고 하지 말 것. 그리고 루스울프의 자치권.”

“역시 자네가…… 선황제를 시해한 은빛 늑대였군.”

“그 은빛 늑대는 제가 죽였습니다.”

공작은 크리스틴의 말뜻을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은빛 늑대가 선황제를 습격한 것을 목격했네. 그래서 그 늑대를 죽였지. 그러나 얀 발렌시아 대공은 자네의 입막음을 했어. 왜냐면 은빛 늑대를 이용해서 선황제를 시해한 게 그였으니까. 맞나?”

노련한 정치가답게 공작은 금방 자연스러운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이대로라면 선황제의 시해범으로 얀을 쫓아낼 충분한 구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가벼운 처벌을 받는 걸로 끝날 수 있었다.


“협상이 무사히 끝난 것 같군요.”

“다행이네.”

공작이 겨우 안도할 때였다.

스릉!

크리스틴이 그대로 칼을 빼 들어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 무슨!”

놀란 공작은 반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침대 아래에 처박혔다.

핑! 핑! 핑!

조금 전 그가 앉아 있던 침대 위로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와 박혔다.

크리스틴의 칼날에 잘린 화살들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찌 된 일인가?”

“습격입니다.”

크리스틴은 화살이 날아온 창문을 재빨리 닫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공작을 부축해 문으로 나갔다.


‘얀, 예상보다 더 빨리 움직였군.’

 

***



“죽어!”

문이 열리자마자 한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슈칵!

그는 크리스틴의 칼날에 금방 피를 뿜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곧 아래층에서 공작가의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 올라왔다. 그러다 공작을 붙잡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고는 일시에 칼을 움켜쥐었다.


“……바이스 백작!”

“백작, 네놈 짓이냐?”

크리스틴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공작을 넘겼다.


“엄호할 테니 모시고 어서 빠져나가라.”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곧 산장 안으로 무장한 복면인들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으니까.

크리스틴은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공작가의 기사들도 합류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채앵! 챙!

어지러운 금속성이 뒤얽히며, 처참한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산장의 바닥은 금방 피로 질척해지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크리스틴은 계속 길을 뚫고 나갔다.

공작을 부축한 기사단장과 시종은 그 뒤를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크리스틴의 주변으로 붉은 피 안개가 짙어지고 살점이 마구 튀었으니까.

하지만 더 섬뜩한 것은 이 끔찍한 지옥의 한복판에서도 그는 넋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달빛에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은 눈부셨고, 역동적이고 현란한 검술은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홀린 듯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갔다. 마치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그동안에도 그는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뒷길로 빠져나가면 계곡이 나온다. 길은 험하지만 추격이 쉽지 않으니 제일 안전한 루트다.”

어느새 산장을 빠져나온 크리스틴은 좁은 뒷길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은 공작을 업고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쫓아라!”

그 뒤를 쫓는 복면인들을 크리스틴이 막아섰다.


“일단 나부터 상대하고.”

“바이스 백작, 폐하를 배신하는 거냐?”

복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피 묻은 칼날을 쓱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로드웰 공작은 내 몫이거든. 살릴지 죽일지도 내 마음이고.”

“폐하께선 네놈이 이렇게 배신할 걸 알고 우리를 보내셨다!”

그 말에 크리스틴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배신? 그건 내 뒤를 치라고 시킨 황제 놈에게 해 줄 말인데.”

“감히 폐하를 모욕하다니! 격발!”

우두머리의 외침에,

핑! 핑! 핑!

사방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크리스틴은 재빨리 세워져 있는 마차 뒤로 몸을 날렸다.

파파팟!

로드웰 공작이 타고 왔던 마차는 화살이 꽂혀서 금방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곧이어 복면인들이 사방에서 에워싸며 달려들자, 그는 마차의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다시 나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며 칼을 휘둘렀다.

몇 명은 그를 쫓아 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죄다 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럼 이만.”

그 사이 크리스틴은 새처럼 가볍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줄곧 여유롭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건 설마?”

퍼억!

동시에 화살 한 대가 그의 옆구리에 깊이 틀어박혔다.

그 충격으로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백작이 떨어졌다!”

“잡아라!”

그 기회를 놓칠세라 복면인들이 사방에서 새까맣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칼을 들고 포위해오는 사람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의 신경을 온통 자극하는 것은…….

토할 것 같은 이 역겨운 냄새는…….


“빌어먹을, 개자식!”

스톤이 분명했으니까.

***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기사단장의 몸이 참혹하게 찢겼다.

그 뒤에는 거대한 갈색 늑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놈의 무시무시한 앞발톱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이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이형의 존재 같았다.


“……!”

한평생 수많은 사건에 휘말려온 로드웰 공작이었다. 그래서 나름 담력이 크고 침착하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은 차원이 달랐다. 보는 것만으로 뼛속까지 떨리고 두려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크르르르르! 크르르르!”

놈은 무시무시한 괴성을 흘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절벽이 뒤를 막고 있어서 로드웰 공작은 더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놈의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을 때는 차라리 심장마비에 걸려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시종과 기사단장처럼 저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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