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은빛 늑대와 조우
(87/155)
87화. 은빛 늑대와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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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은빛 늑대와 조우
2022.12.02.
“크르르르르! 크르르르!”
놈은 무시무시한 괴성을 흘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절벽이 뒤를 막고 있어서 로드웰 공작은 더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놈의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을 때는 차라리 심장마비에 걸려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시종과 기사단장처럼 저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테니.
휙!
잠시 후 갈색 늑대의 거대한 앞발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공작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스컥!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숨이 끊어진 건가? 생각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아서 다행…….’
“크르르르!”
하지만 다시 들려온 짐승의 괴성에 눈을 떴다.
뜻밖에도 거대한 갈색 늑대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놈의 앞에는 한 남자가 피에 젖어 붉어진 레이피어를 겨눈 채 서 있었다.
***
“바이스 백작!”
살면서 이토록 반가운 사람이 또 있을까?
로드웰 공작은 그야말로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나라면 이 시간에 도망을 칠 겁니다, 공작.”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공작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절벽 틈 사이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어서 기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턱!
하지만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을 막아섰다. 갈색 늑대였다.
“네놈은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없다!”
서걱거리는 끔찍한 소리였지만 이건 분명 사람의 음성!
공작은 눈앞의 이 괴물이 늑대 일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치니 너무나 소름 끼쳤다.
이제 보니 늑대 일족은 은빛 늑대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넋을 놓고 서 있는 공작을 크리스틴이 등 뒤로 끌어당겼다.
“그건 네놈에게 해 줄 말이군, 스톤.”
스톤?
설마 이 괴물이 스톤 오스월드?
공작은 깜짝 놀라 갈색 늑대를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놈은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스톤 오스월드와 느낌이 매우 닮았다.
“크크크……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나를 죽이겠다고? 그 노인네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러고 보니 공작의 앞을 막아선 크리스틴은 옆구리에 화살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에 젖은 화살을 대수롭지 않게 뽑아냈다.
“이깟 상처, 곧 아물 테니 걱정하지 마라.”
“죽어!”
그 사이 갈색 늑대가 공격한 것은 크리스틴이 아닌 로드웰 공작이었다.
퍼억!
놈은 사나운 발톱을 세워 공작의 가슴을 크게 내리찍었고,
스컥!
동시에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다시 놈의 어깨를 베었다.
“크아아아!”
하지만 갈색 늑대는 상처가 난 몸으로 아랑곳없이 훌쩍 날아, 저만치 나가떨어진 공작을 또 한 번 공격했다.
“제길!”
안타깝게도 인간의 몸인 크리스틴은 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퍼억!
놈은 다시 한번 앞발로 공작을 내리찍었다.
“스토온!”
그제야 놈이 크리스틴을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이런…… 노인네의 명줄이 곧 끊어지겠는데? 공작을 죽였으니 네놈은 이제 큰일이군. 귀족회와도 적이 될 테니까.”
놈은 마치 크리스틴이 공작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화를 내긴커녕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놈은 발전이라곤 없군.”
“뭐?”
“수법이 항상 똑같으니까. 아델의 어머니를 죽이고 은빛 늑대의 짓으로 몰아갈 때부터. 그래놓고 네놈 딴엔 꽤 영리하다고 생각하겠지. 비열한 비겁자 주제에.”
크리스틴이 대놓고 무시하자 스톤은 털을 곤두세우며 포효했다.
“크르르르!”
“왜 정곡을 찔리니까 창피한가?”
하지만 스톤은 크리스틴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다시 키득거렸다.
“크크크! 그래, 아델의 어머니. 그 여자도 내가 찢어 죽였지. 네놈에게도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며?”
“……!”
“그것도 모른 채 은빛 늑대를 증오하던 아델을 보면 어찌나 재미있던지. 크크큭, 게다가 복수를 하게 도와달라며 내게 애걸하더군. 그뿐인가? 그 대가로 뽀얀 살결 위에 내 머리글자를 하나씩 새겨 넣던 그 밤의 기억이란……. 흐음, 그녀의 피 냄새는 정말 달았어.”
“다 지껄인 건가?”
“왜 더 들려줘?”
“아니. 이제 네놈이 죽어야 할 시간이거든.”
어둠 속에서 들려온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음산했다.
***
스스스스…….
크리스틴의 몸이 점점 거대해지고 온몸에 은빛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달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빛 늑대!”
스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크르르르! 역시 네놈이 은빛 늑대였어. 바이스 백작!”
뭐가 그렇게 좋은지 놈은 잔뜩 흥분해서 크리스틴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크리스틴은 이제 스톤과 똑같은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은빛 털과 고요한 청회색의 눈동자가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즐거운가, 스톤?”
그의 목소리도 서걱거리면서 한층 낮게 울렸다.
“물론이지! 나 늑대 일족은 정말 처음 보거든. 우와, 정말 나 말고 또 있을 줄 몰랐어!”
스톤은 마치 친구를 만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기뻐했다.
그런 놈을 보며 크리스틴도 엷게 웃었다.
사실 그는 마음속에 줄곧 한 가닥 의심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아델의 어머니를 죽인 건 정말 내가 아니었을까?’
그날의 기억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가 죽던 숲에 자신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스톤을 떠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놈은 제 입으로 술술 내뱉으며 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놈의 얘기를 듣는 것은 역겨웠지만 한편으론 감사한 일이었다.
이렇게 홀가분해질 수 있었으니.
“고맙군. 끝까지 멍청해 줘서.”
“감사는 됐어. 정말 아쉽지 뭐야, 이렇게 만나자마자 죽여야 한다니.”
파아앗!
스톤이 그대로 앞발을 뻗어 사납게 달려들자,
크리스틴도 날렵하게 놈을 향해 날아갔다.
쩌어억!
끔찍한 파열음이 들리고, 달빛 속에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척!
바닥에 내려선 은빛 늑대의 이빨엔 갈색 털이 달린 살점이 물려 있었다.
척!
하지만 갈색 늑대의 앞발톱에도 은빛 털과 잔뜩 피 묻은 살점이 박혀 있었다.
두 늑대는 각기 치명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크크크…… 역시 강해, 은빛 늑대! 싸울 맛이 나!”
“닥치고, 꺼져!”
은빛 늑대는 산자락이 울리도록 크게 포효하며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갈색 늑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숨어서 기습하시겠다? 어딜!”
갈색 늑대가 금방 나무 위로 쫓아 뛰어오르자,
“크아아아!”
등 뒤에서 홀연히 나타난 은빛 늑대가 놈의 오른쪽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크허억!”
갈색 늑대는 일부러 은빛 늑대가 매달려 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떨어졌다. 부딪치는 충격을 이용해 은빛 늑대를 부서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빛 늑대 역시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떨어지는 방향을 틀려고 했다.
짧은 시간 동안 공중에서 서로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퍼어억!
결국 은빛 늑대가 몸을 트는 데 성공했고, 갈색 늑대는 등으로 떨어지며 그대로 충격을 받았다.
놈이 꼼짝 못 하는 사이, 은빛 늑대는 다시 사납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은빛 늑대가 사납게 턱을 잡아 흔들자, 갈색 늑대의 목덜미에서 살점이 뜯기고 뼈가 드러났다.
“크으, 방심했어…….”
갈색 늑대는 꼼짝도 못 한 채로 피를 뿜어냈다. 떨어지면서 뼈를 다친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동족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무심하기만 했다.
“이 죽음도 네놈에겐 사치다.”
은빛 늑대는 다시 한번 크게 앞발을 들어 놈을 후려쳤다.
퍼억!
갈색 늑대의 거대한 몸이 힘없이 날아가 절벽 바위에 부딪혔다.
그 순간이었다.
은빛 늑대는 다시 놈을 공격하는 대신, 어두운 숲을 돌아보았다.
스스스스…….
숲을 쓸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이 점점 자신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발소리.
그들이 지닌 무기에서 나는 진한 쇠 비린내.
‘백여 명은 넘는 모양이군.’
얀은 그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모양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은빛 늑대다. 쏴라!”
파파파팟!
동시에 수백 개의 화살이 까맣게 날아들었다.
그는 훌쩍 몸을 날려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화살 비가 집요하게 날아들었다.
“허억! 허억!”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사실 은빛 늑대도 싸우는 동안 어깨와 옆구리를 심하게 다친 것이다.
화살에 맞았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갈색 늑대의 발톱에 뜯겨나간 상처는 쉽게 피가 멈추지 않았다.
“젠장!”
하는 수 없이 그는 화살 비를 피해 바위 뒤로 몸을 감췄다.
그 순간,
피를 흘리며 꼼짝도 못 하던 갈색 늑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생기를 잃고 죽어가던 눈동자에서 일순 광기가 스쳤다.
“크아아아아아!”
놈은 그가 방심한 틈에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옇게 드러난 송곳니가 그대로 은빛 목덜미에 깊이 박혔다.
“쏴라!”
동시에 다시 화살 비가 은빛 늑대를 향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타아앙!
어둠 속을 울리며 한 방의 총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순간 세상이 고요해진 듯하더니,
퍽!
갈색 늑대의 머리에서 뜨거운 피가 튀었다.
총알이 날아온 것은 절벽 위였다.
재빨리 돌아본 은빛 늑대는 낯이 익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델!’
절벽 위에 짐머와 함께 서 있는 아델은 이곳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쓰러진 갈색 늑대를 다시 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이번엔 자신을 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짐머가 튀어나온 바위를 디딤돌 삼아 절벽을 뛰어내려 왔고,
“공격! 공격하라!”
화살이 쏟아지던 숲에서는 제니퍼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곧 숲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고,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제니퍼가 데려온 W.G 제1 부대원들이 얀의 병사들을 단숨에 쓸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온통 아델에게로 향해 있었다.
날 보지 마, 아델…….
고개를 돌려.
제발…….
“그가 늑대 일족이었으면 좋겠어?”
“응. 그래서 오스월드가 따위 몰락해 버렸으면 좋겠어. 짐승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람의 행세를 한다는 건 너무 끔찍하니까.”
아델의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하아…….
결국, 다 끝나 버린 건가?
***
아델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두웠지만 그녀가 쏜 총알이 그대로 스톤의 머리에 명중한 걸 느낀 것이다.
덕분에 갈색 늑대는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정말 죽은 건가?
내가…… 놈을?
그러나 갈색 늑대에 관한 생각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은빛 짐승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겼기에.
‘저것이…… 은빛 늑대……?’
언젠가 잠결에 침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했지만 무척 아름다웠다는 인상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달빛 아래에 온전히 모습이 드러낸 그것은 아름답다는 말로 부족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눈부신 은빛 털.
매섭고 날렵한 눈매 안에 자리한 고요한 눈동자는 영혼마저 빨아들일 것 같았다.
이 거대한 짐승은 괴물이 아니라, 어쩌면 숲의 정령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 은빛 늑대의 고요한 청회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델은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 당신이었구나. 은빛 늑대!’
언제부터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 같다.
그가 자신과 다른 존재라니.
사람을 찢어 죽이는 끔찍한 짐승이라니.
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그는 전혀 끔찍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늘 이 신비로운 짐승과 함께였던 것 같았다.
나의 아름다운 짐승…….
그 순간,
“아아, 안 돼……!”
아델은 비명을 지르며 절규했다.
은빛 늑대의 거대한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