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가장 믿을만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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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가장 믿을만한 사람
2022.12.09.
마크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아이들의 침실을 나왔다.
2층을 내려오는데 창밖의 하늘이 엷은 푸른빛을 띠며 어느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마차였다.
‘급한 환자라도 생긴 건가?’
점점 가까워지는 마차에는 바이스 백작가를 상징하는 늑대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 시간에 왜 백작의 마차가?’
마차가 멈추자마자 한 여자가 급하게 뛰어내렸다.
“아델?”
마크는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 제이드와 아델의 얘기를 나누자마자 그녀가 마법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게다가 손과 얼굴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델! 대체 무슨……?”
“마크, 도와줘요, 제발!”
아델이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다쳤습니까?”
마크가 놀라서 달려오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잠시 멈칫한 아델은 그대로 마크를 끌고 와서 마차 안을 보게 했다.
“……!”
웅크리고 있는 피투성이 늑대를 본 마크는 놀라서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수의사로 풍부한 경험을 가진 그였지만 이렇게 커다란 늑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눈부신 은빛 털을 가진 늑대라니.
더 놀라운 것은 다 죽어가는 늑대를 대하는 아델의 태도였다. 그녀는 다시 늑대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쓸어주며 뭐라고 속삭였다.
마치 아픈 아기라기도 달래듯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이 늑대를 치료해 달라는 겁니까?”
마크가 어이없어하자 아델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제발 부탁해요, 마크. 이렇게 찾아온 게 염치없는 짓인 줄 알지만, 당신밖에 없었어요.”
그러자 마부석에서 내린 제니퍼는 한술 더 떴다.
“당장 치료해!”
칼을 뽑아 마크의 목에 겨눈 것이다.
마크는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싶었다. 갑자기 아델이 괴이한 피투성이 늑대를 데리고 나타나더니, 자칫하다간 목이 잘려 죽게 생긴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 2분 만에 일어났다.
“제니퍼, 무슨 짓이에요! 당장 칼을 거둬요!”
“하지만 단장님이…….”
“제니퍼!”
아델의 날카로운 외침에 제니퍼는 얼른 입을 다물고 칼을 거뒀다.
“아델, 내가 설마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마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미안해요. 밤새도록 블루게일에서 달려오느라 우리가 좀 흥분했어요.”
“지금 블루게일에서 오는 길이라고요?”
“진짜 한숨도 안 자고 달려왔수.”
제니퍼는 이번엔 작전을 바꿔 마크의 동정을 사려는 것 같았다. 고삐와 채찍을 쥐고 있었던 손을 펴 보이자 살갗이 벗겨지고 잔뜩 짓물러서 피가 나고 있었다.
“흐음…….”
마크는 한숨을 쉬더니 곧 소매를 걷어붙였다.
“의사에게 환자를 데려오는 게 염치없는 짓이 될 순 없죠. 좀 봅시다.”
그가 순순히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아델과 제니퍼는 겨우 살았다며 안도했다.
아델은 크리스틴을 살릴 사람은 마크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유능한 수의사였으며 줄곧 사람들도 진료해왔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만한 사람.
물론 이렇게 찾아오는 게 마크에게는 못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크리스틴을 살리는 것 외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피투성이 늑대의 상태를 살피던 마크가 낮게 혀를 찼다.
“대체 어쩌다가……?”
“어떤가요? 살릴 수 있죠?”
“의사는 어떤 환자를 두고도 확신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
조금은 위로가 될 말을 해 줄 법도 하건만 마크는 냉정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상처를 살피는 손길은 어떤 말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어깨와 옆구리의 상처부터 빨리 봉합해야겠군요! 아델, 어서 내 진료실에 있는 왕진 가방을 챙겨서 가져와요.”
“알겠어요, 마크!”
아델이 달려가자,
“어이, 거기 덩치는 날 좀 도와주고.”
덩치……!
평소였으면 난리를 쳤을 제니퍼였지만 지금은 고분고분 마크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수, 선생.”
***
마크가 손을 씻은 물은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
잠을 자고 있던 마크의 조수 쥬디도 얼른 준비하고 나와 그를 도왔다. 마크의 옷은 물론, 쥬디의 앞치마도 어느새 피에 젖어 있었다.
벌컥!
마침내 진료실의 문이 열리자, 복도에서 전전긍긍 기다리던 아델이 얼른 다가왔다.
“수술은 잘 된 거죠?”
“일단 혈관과 상처의 봉합은 잘 됐어요. 하지만 워낙 피를 많이 흘리고, 상처 부위가 광범위해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군요.”
마크의 조심스러운 말과 달리 진료실 안에 있는 은빛 늑대의 숨결이 한결 평온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모습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델은 그 모습을 봐도 불안했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진통제를 주사했으니 당분간 계속 잘 겁니다.”
“저녁엔 깨어날 수 있겠죠?”
“그러도록 노력해봅시다.”
“정말 고마워요, 마크.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인사를 하네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도록 하죠. 그보다 둘이 조용히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마크는 뒷정리하는 쥬디와 아델의 뒤에 장벽처럼 서 있는 제니퍼를 의식하며 말했다.
아델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직감했다. 유능한 수의사인 마크가 이 은빛 늑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척!
제니퍼가 아델의 뒤에 바싹 붙어서며 완강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되겠수. 아델 양은 지금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는 분이라서.”
“어머 이 아저씨, 말이 좀 이상하네. 지금 우리 선생님을 뭐로 보고!”
질세라 수술 도구를 챙기던 쥬디도 한마디 한 것이다.
물론 제니퍼 역시 질세라 인상을 썼고.
“아저씨? 아니, 이 말린 오이처럼 생긴 여자가 누구보고 아저씨래!”
“뭐라고요? 말린 오이? 아놔, 이 아저씨가 간만에 내 성질을 건드리네.”
두 사람이 살벌하게 눈싸움을 하는 동안 마크와 아델은 자리를 벗어났다.
***
“미안하지만, 곤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요. 당신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마크와 함께 저택 입구의 포치로 온 아델은 먼저 선언했다.
고마운 그에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게 나았으니까.
“좋아요. 그럼 단순한 질문부터 하죠. 저 늑대가 바로 악명 높은 은빛 늑대겠죠?”
단숨에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에 아델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표정으로 대답은 됐군요.”
아델은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은빛 늑대는 맞지만 그는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았어요! 그린힐의 연쇄 살인범은 스톤 오스월드였어요!”
“알아요. 나도 기사 정도는 읽고 있으니까.”
“미안해요. 그가 오해 받을까봐…….”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델, 당신은 저 늑대를 마치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
마크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설마 저 늑대가…… 바이스 백작인가요?”
“무슨 말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은 재미없어요.”
아델은 어이없다는 듯 완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은 마치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요?”
“마크…….”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포치의 벤치에 앉았다.
“내가 고서를 모으는 취미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늑대 일족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과 늑대의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다더군요. 그들이 일반 늑대와 다른 점은 커다란 몸집과 다섯 개의 발톱. 저 은빛 늑대는 늑대 일족이 맞을 텐데요.”
“제발…… 모른 척해줘요, 마크.”
아델의 목소리가 떨렸다.
“환자의 비밀을 떠들고 다닐 만큼 입이 가볍진 않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아델은 한시름 놓았다. 사실 밤새도록 달려서 여기까지 온 이유도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마크라면 크리스틴의 정체를 눈치채도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늑대 일족의 재생능력은 상당히 좋다고 들었는데…….”
“짐머도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처음 다쳤을 때와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아니요. 화살에 맞았던 자리는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었어요. 문제는 물어뜯긴 상처였죠.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괴사 되었을 거예요.”
“물어뜯긴 상처만 낫지 않았다는 건가요?”
“내 판단으론 그래요. 대체 어떤 짐승이 그런 거죠? 저렇게 발달 된 근육을 단숨에 물어뜯을 수 있는 짐승은 거의 없거든요. 턱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얘긴데.”
“스톤 오스월드요.”
마크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스톤 오스월드도…… 늑대 일족인가요?”
“네.”
“이제 모두 이해가 가는군요. 그린힐의 연쇄 살인 기사를 보면서 사람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스톤 오스월드가 범인으로 잡혔다고 해서 이상했어요. 그런데 그가 늑대 일족이라면 모든 게 다 설명이 되네요.”
“스톤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은빛 늑대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려고 했죠. 그런 걸 겨우 잡았는데 황제가 다시 놓아줬어요.”
그로 인해 크리스틴이 지금 저렇게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아델은 결코 얀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 황제가 다시 놓아줬다는 건가요?”
“에이프릴 황녀와 결혼시켜야 하니까요.”
“늑대 일족인 줄 알면서, 게다가 그런 끔찍한 살인범과 딸을 결혼을 시킨다고요?”
마크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아델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교활한 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스톤은 이제 다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을 테니까.”
아델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어두웠지만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쏜 피스톨에 놈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나던걸.
이번엔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확하게 놈을 쏜 것이다.
게다가 크리스틴의 경우를 보면 물어뜯긴 상처는 회복이 더뎠다. 스톤도 크리스틴에게 여러 곳이 물어뜯겼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재생능력이 탁월한 늑대 일족이라도 다시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이제 크리스틴만 아무 탈 없이 살아나 주면 된다.
그러면 아델은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어머니의 복수를 했으니까.
“아델 아줌마?”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아델은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에 잠옷 차림의 제이드가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델은 모든 시름을 잊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안녕, 제이드?”
“와아…… 진짜네…….”
“보고 싶었어.”
아델이 양팔을 벌리며 웃자,
“와앙!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제이드는 그대로 우다다…… 달려와 냉큼 안겼다.
***
아델은 제이드와 함께 저택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도와준 마크와 사람들에게 아침 식사라도 대접해주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제이드가 아델과 함께 요리하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고.
“콩 수프 만들어줘요.”
제이드는 아델을 돕겠다며 앞치마까지 두르고 조리대 옆에 서 있었다.
“제이드는 콩을 좋아하는구나.”
“네, 콩을 먹어야 힘이 세지니까요.”
“콩도 먹고 당근도 잘 먹어야 힘이 세지는데.”
“……!”
당황해서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며 아델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