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마크의 금서 목록
(9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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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마크의 금서 목록
2022.12.12.
“제이드는 콩을 좋아하는구나.”
“네, 콩을 먹어야 힘이 세지니까요.”
“콩도 먹고 당근도 잘 먹어야 힘이 세지는데.”
“……!”
당황해서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며 아델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설마 제이드 너, 여전히 당근을 안 먹는 거니?”
“머, 먹을 거예요!”
아델은 가늘게 자른 당근을 아이의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와삭, 한 입 베어 문 제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 엄청 달아요!”
“그럼. 당근이 얼마나 단데. 나중에 당근 케이크도 만들어 줄게.”
“오늘 만들어 주면 안 돼요?”
“오늘?”
“네! 그리고 내일도, 또 내일도…….”
“그렇게 케이크만 먹으면 이빨이 다 썩을걸?”
“양치질 잘하면 돼요. 나 아델 아줌마가 만드는 케이크를 먹고 나면 양치질 잘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와서 같이 살아요. 나랑 폴린 형이랑, 그리고 우리 아빠랑……. 또 그 바이스 백작 아저씨도 데리고 와서…….”
아이의 간절한 표정에 아델은 난처하면서도 울컥해졌다.
그녀가 까맣게 잊고 지내는 동안 이 아이는 자신을 이토록 그리워했던 것이다.
아델은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맞췄다.
“제이드, 다 같이 사는 건 힘들겠지만,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서 가끔씩 놀러 올게.”
“가끔은 싫어요. 매일매일. 우리 집에서 매일 살면 안 돼요?”
“제이드. 이리 나와라.”
갑자기 들려온 마크의 서늘한 목소리에 아델이 돌아보았다.
부엌문 앞에 서 있는 그는 평소에 볼 수 없는 단호하고 매서운 얼굴이었다.
“싫어. 나 아델 아줌마랑 같이 있을 거야!”
“제이드!”
“괜찮으니 놔두세요.”
아델이 만류했지만,
“아닙니다, 아델.”
완강하게 거절한 마크는 아들을 데리고 부엌을 나갔다.
아델은 크리스틴만 생각하느라 그에게도, 제이드에게도 정말 못 할 짓을 해버린 것 같았다.
***
진통제를 맞고 잠든 은빛 늑대는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델은 털에 묻은 피를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는 잠시 힘겹게 눈을 떴다가 감았을 뿐 초점도 없고,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어떤가요?”
마크가 오후 진료를 마치고 나자 아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빛 늑대의 숨이 편안한 건 마음이 놓였지만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까 봐 너무 불안했다.
“아침보다는 한결 좋아진 것 같습니다. 봉합한 자리도 벌써 아물기 시작했고요.”
그 말에 아델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마크는 여전히 신중했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안심할만한 상태는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최고의 솜씨를 가진 의사 선생님이고,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인색하게 말하니까 안심해도 될 거 같네요.”
“그럼 이제라도 가서 눈 좀 붙이는 게 어떨까요?”
“전 괜찮아요.”
마크가 미간을 모으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지금 두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습니다. 얼굴에도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잤다고 쓰여 있네요.”
“와, 역시 명의는 다르시네요. 그걸 알아보다니.”
아델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당신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 아델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대충 묶었고, 윤기 나고 맑았던 피부는 푸석한 데다가 입술도 잔뜩 마르고 갈라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마크. 그리고 그가 깨어나는 대로 떠날게요.”
“쫓아내지 않을 테니, 그렇게 조급하게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오래 있을수록 제이드에게…….”
“제이드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들은 금방 정을 줬다가도 또 잊어버리니까.”
자신을 배려하는 말에 아델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아이들은 순수해서 한번 정을 준 사람을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마크, 난 정말…… 당신에게 못된 짓만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마크의 반응은 쿨했다.
“자아비판은 필요 없습니다. 의사에게 와서 진료를 받았으니 진료비만 지불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때 진료비를 바가지 씌웠다고 욕이나 하지 마십시오. 백작은 부자니까 더 많이 받을 겁니다.”
아델은 힘없이 웃었다.
“속물처럼 말하는 거 안 어울려요.”
“모르셨습니까? 제 진료비가 비싸기로 소문이 자자한 거?”
“아, 어쩐지……. 올 때마다 환자가 없더라.”
“뭐라고요?”
두 사람은 억지로 농담을 하며 억지로 웃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럼 쉬어요, 아델.”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가려는 마크를 아델이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다.
“그보다 마크, 부탁할 게 하나 더 있는데…….”
***
드르륵.
마크가 진료실의 책장 하나를 밀었다. 커다란 책장이 회전하듯 움직이자 뒤에 숨은 공간이 드러났다.
“와, 여기에 이런 곳이…….”
“오래된 저택에 흔히 있는 밀실이죠.”
그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등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천정까지 책으로 빼곡한 작은 방이 나왔다. 고서 수집이 취미라는 마크는 이곳에 수집한 책들을 진열해 놓았던 것이다.
“낡은 책들이라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그러다가 그는 목소리를 한층 낮춰서 얘기했다.
“그리고 들켜선 안 되는 금서들도 꽤 있고요.”
“금서요?”
의아해하며 아델이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꺼내 들자,
“앗, 아델 안 돼요!”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아델은 잠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타난 현란한 그림에 그녀의 뇌가 잠시 정지한 것이다. 크리스틴과 수없이 뜨거운 밤을 보내면서도 이런 건 상상도 못 해봤던 장면이었다.
그동안 마크가 얼른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챘다.
“화보집이에요. 무척 구하기 힘든 거죠.”
“화보집이라기엔…… 뭔가 굉장히…… 음…… 난해하네요. 당신이 그런 책을 좋아한다는 것도 의외고…….”
아델은 침착하게 말하면서도 마크에게서 살며시 떨어졌다.
누구보다 신사답고 기품있어 보이던 이 신사가, 이런 밀실에서 저런 책을 보고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마크는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흠흠, 뭐 일단은 저도 건강한 성인 남성이니까 싫어할 이유는…… 아니, 왜 그렇게 보죠?”
“제가 뭘요. 그냥 의외의 인간적인 모습에 조금 당황한 것뿐이랄까.”
아델이 놀리자 마크의 얼굴과 목덜미가 조금 붉어졌다. 늘 침착하던 그의 이런 모습도 의외였다.
결국 아델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걱정 마요, 마크. 당신과 좀 더 허물없는 친구가 된 기분이니까.”
“이제 보니 당신은 돌려서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탁월하군요.”
“고맙네요. 저도 모르는 재능을 발견해줘서. 그보다 제가 말했던 그 책들은요?”
아델은 수집한 고서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중에 늑대 일족과 관련된 책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겁니다. 당신이 찾는 책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간 마크는 책장 제일 위 칸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책들을 꺼냈다.
“늑대 일족에 관한 기록이 삭제되기 전의 책들이죠. 아마 황궁 서고에도 이건 없을 겁니다. 교황청에서 모두 불태웠으니까.”
책을 받아든 아델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닦아냈다. 모서리가 낡고 너덜너덜해진 양장본의 책은 얼핏 봐도 엄청 오래된 것 같았다. 출간연도를 보니 100년도 더 넘은 것이었다.
“고마워요. 조심히 읽고 돌려줄게요.”
하지만 마크는 아델의 품 안에서 책을 빼앗았다.
“책을 읽고 싶거든 일단 눈부터 좀 붙여요.”
“괜찮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원래 잠을 잘 못 자거든요.”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혹시 압니까? 졸다가 이 귀한 책에 침이라도 흘릴지.”
“하, 말도 안 돼.”
“자, 어서 침대로 가요.”
“마크 제발요.”
아델이 한껏 애교를 부려봤지만, 그는 단호했다.
“이것도 의사의 처방입니다.”
그는 아델을 돌려세워 어깨를 잡고 비밀의 방에서 내보냈다.
“진짜 단호박이시네요.”
하는 수 없이 아델은 투덜대며 비밀의 방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럼 한 시간만 잘 테니까 그땐 책을 빌려주는 거예요.”
아델이 고집을 꺾었지만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세 시간 이상이요.”
“안 돼요. 제이드랑 저녁 준비하기로 했다고요.”
“제이드는 폴린이랑 놀러 나갔고, 새로 들어온 하녀는 음식 솜씨가 좋으니 염려 말아요.”
두 사람의 대화는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부부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델은 몰랐겠지만 마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
그동안에도 은빛 늑대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창가에서 들이치는 햇살에 은색 털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모습은 나른하면서도 신비로웠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슈?”
제니퍼의 커다란 목소리에 마크의 조수 쥬디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반쯤 열린 진료실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던 것이다.
“댁은 상관 마요!”
그러더니 얼른 몸을 돌려 가버렸다.
제니퍼는 의아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얼른 쫓아갔다.
그리고 막 복도를 벗어나려는 그녀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요?”
“무슨 소리예요?”
“우린 오늘 처음 봤는데 왜 나만 보면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화를 내냐는 거요?”
“제가요?”
“그렇수, 그쪽이! 지금도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혀 있잖수. 그러니까 더 마른 오이처럼 보이고…….”
눈매를 사납게 추어올리던 쥬디가 결국 폭발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여자에게 마른 오이 같다고 해 놓고 왜 화를 내는지 모른다고요? 내가 어디가 마른 오이 같다는 거예요! 어디가!”
쥬디가 바싹 다가들며 악을 쓰자 제니퍼는 어리둥절해 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 그건 뭐 실수라고 칩시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그쪽이 화를 안 내면 더 예뻐 보일 것 같다는 말이었수.”
잔뜩 독이 오른 것처럼 따지고 들던 쥬디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더니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삐죽거렸다.
“예쁘긴 뭐가 예뻐요. 마른 오이처럼 생겼는데…….”
“그래도 마른오징어보단 낫잖수.”
“뭐라고요!”
“참고로 난 오이를 아주 좋아한다우.”
인상을 쓰던 쥬디는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 내며 웃어버렸다.
“어머, 이 아저씨가 뭐래!”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새침하게 돌아서는 쥬디를 보며 제니퍼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오이를 좋아한다고 했지 자기를 좋아한다고 했나?”
그러더니 저만치 가는 쥬디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니라 제니퍼요! 금발의 제니라고 불러도 되고!”
“푸흡!”
바쁘게 걸어가던 쥬디의 걸음이 멈칫하더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제니퍼가 앞에 다가올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내 이름은 쥬디예요.”
겨우 웃음을 멈춘 그녀가 말했다.
“쥬디……. 참 예쁜 이름이네.”
“그래도 금발의 제니에겐 못 당하죠.”
“그건 인정!”
제니퍼는 왠지 오이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