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이제 우리 아이를 만들어야지 (91/155)


91화. 이제 우리 아이를 만들어야지
2022.12.16.



 
아델은 한 시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잠이 안 온다고 하자 마크는 한숨을 내쉬더니 약속대로 책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제이드와 폴린이 보드게임을 하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초저녁 시간 내내 붙잡혀 있어야 했다.

겨우 두 아이가 잠들자 책을 들고 은빛 늑대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에도 은빛 늑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등이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아델은 간신히 불안감을 참아야 했다.


“크리스 너무 늦게 왔지? 그래도 화내지 마. 선물을 가져왔으니까. 늑대 일족에 관해 적은 책이래.”

마크에게 빌린 책을 들고 아델은 은빛 늑대의 옆에 편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크게 소리 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좀 더 빨리 깨어날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완벽해 보이는 짐승에게도 치명적인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우리는 그 약점을 이용해 그들을 없애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늑대 일족은 짐승일 뿐이며 인간과 공생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멸족시킬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일족끼리의 전투에서 다친 상처는 재생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전투 시에 그들의 이빨이나 발톱에서 특수한 물질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천적이 없는 이 최상위 포식자들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델은 책 읽던 걸 잠시 멈추고 중얼거렸다.


“마크의 말이 맞았네. 그래서 스톤과 싸우다가 다친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크리스, 그러니까 만일 다시 또 같은 일족을 만나서 싸우게 되면 근거리 공격은 피해. 차라리 내 피스톨로 쏴버려. 아니지, 내가 쏠 테니까 당신은 피해. 알았지? 그러니까 나 몰래 싸우지 말란 뜻이야.”

마치 아이에게 당부하듯이 말한 후 그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는 일족을 이간질하는 방법으로 서로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적으로서 적을 제압하는 전술이니…… 이 나쁜!”

아델이 분노해서 소리쳤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동도 없이 숨만 쉬는 은빛 늑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책에 시선을 돌렸다.


“둘째, 늑대 일족은 평생 한 명의 반려와 짝을 이룬다. 주로 번식기인 겨울에 짝짓기를 통해 서로를 각인하게 된다. 간혹 반려가 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각인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평생 한 명의 반려와 짝짓기를 하고 번식한다.”

아델은 씩 웃으며 은빛 늑대를 돌아보았다.


“그럼 늑대 일족은 절대 바람을 피울 수 없다는 말이네? 뭐야, 그럼 지금까지 괜히 불안해했잖아.”

그러더니 은빛 늑대의 귀에 대고 짓궂게 속삭였다.


“어떡하지, 크리스? 난 바람을 피울 수 있는데 당신은 불가능하네. 왜, 약올라? 그럼 빨리 일어나. 안 그러면 나, 바람피울지도 모르거든.”

“…….”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치, 재미없어.”

아델은 다시 책장을 넘겼다.


“우리는 여기서 늑대 일족을 멸족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전투력이 약한 암컷과 새끼를 참살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들의 개체 수가 감소 될 수밖에…… 말도 안 돼!”

탁!

아델은 결국 읽던 책을 덮어버렸다.

늑대 일족과 싸운다는 방식이 모두 야비하고 교활했으니까.


“화가 나. 늑대 일족을 짐승 취급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짐승보다 더 잔인하고 더 야비하잖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정말 이렇게 해서 늑대 일족이 멸족된 거면…… 듣고 있어, 크리스?”

“…….”

“당신의 일족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것 같아.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아델은 의식이 없는 은빛 늑대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그쳤다.


“제발 좀 일어나. 당신이 잘못되면 이대로 당신 일족도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어서 기운 차려.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그는 늘 강했고, 어떤 위기에도 궁지에 몰리는 법이 없었다.

아델에겐 굳건한 요새였으며, 변하지 않는 신앙과도 같았다. 그런 그가 쓰러져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세계도 무너지는 것이다.

아델은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품에 얼굴을 묻었다.

***

한 참 후.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료실 창으로 달빛이 들이치자 깜깜하던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싸아아…….

어딘가에서 스며든 바람에 은빛 털이 신비롭게 일렁였고, 가지런히 뻗어 있던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꺼풀 아래 드러난 청회색 눈동자에도 초점이 또렷해져 갔다.


“하아아…….”

은빛 늑대에게서 옅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기대 잠든 아델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움직임은 없었다.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로 한없이 그윽하게 내려다볼 뿐.

그는 그저 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며칠 사이 그녀의 통통하던 뺨은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여 아델의 뺨을 살며시 핥아주었다.

그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


“으응…… 크리…… 스…….”

“…….”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던 아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다 그윽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놀라서 얼른 일어나 앉았다.


“크리스!”

“…….”

“정말 일어났구나. 꿈인 줄 알았어. 다행이야, 정말…….”

말을 하던 아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얼른 손으로 닦아내며 그녀가 웃었다.


“진짜 걱정 많이 했거든.”

“…….”

“크리스…… 왜 아무 말도 안 해?”

안도하며 웃던 아델의 표정이 다시 불안해졌다. 그는 은빛 늑대의 모습으로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그가 망설이듯 물었다.


“놀라지 않았어? 내가 이런 모습이라.”

그 목소리는 사람일 때보다 훨씬 더 낮고 허스키했다. 이런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는지 미간에 살며시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아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모르겠어. 그냥 언제부터인가 알았어. 당신이 은빛 늑대일지도 모른다는 걸.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가까웠는데. 인정하는 게 좀 힘들고 오래 걸렸을 뿐이야.”

그러더니 아델은 힘없이 웃었다.


“지금은 인정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해.”

“……음.”

그는 나직하게 침음 할 뿐 더 이상의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아델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몸은 어때? 이제 좀 괜찮아?”

그녀의 말이 끝나자 크리스틴의 거대한 몸이 조금씩 작아졌다. 온몸을 뒤덮고 있던 은빛 털도 서서히 사라지더니…….


“핫! 갑자기 뭐, 뭐야…….”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아델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인간으로 돌아온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며 그가 자신의 몸을 살폈다.


“대충 움직일 정도는 되는 거 같군. 수의사가 다행히 돌팔이는 아니었어.”

“일단 이거라도 걸치자.”

아델은 고개를 돌린 채 얼른 침상에 있는 시트를 건넸다.

크리스틴은 살며시 짓궂은 표정이 되었다.


“뭐야, 서운하게. 내 얼굴 안 보고 싶었나 보네.”

“당연히 보고 싶었지. 하지만 예의는 갖춘 차림으로 봤으면 좋겠는데.”

“우리 사이에 예의는 무슨.”

크리스틴이 씩 웃으며 아델의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하자,


“크리스. 당신 진짜…….”

아델이 울먹였다.

당황한 그는 재빨리 그녀의 뺨에서 손을 떼며 시트를 허리에 둘렀다.


“미안. 장난이었어. 그냥 당신을 다시 보니까 너무 기뻐서. 그러니까 아델 화내지 마…….”

그 무시무시하던 늑대가 지금은 영락없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가 되었다.

아델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와락 달려들어 끌어안았다.


“나도 기뻐서 그래. 당신이 장난치는 걸 보니까 정말 다 나은 거 같아서. 잘못 될까봐 진짜 겁났단 말이야.”

“하, 그럴 리가.”

그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예전처럼 오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결국 아델은 크게 소리 내어 울어버리고 말았다.


“으흐흑! 흐아앙!”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울며 약한 모습을 보여도 이제는 괜찮다는 안도감.


“아델…….”

흐느껴 우는 아델의 등을 토닥이다가, 크리스틴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미안. 아무도 당신을 울리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동안 길고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잠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이 굉장히 슬퍼할 테니까. 그 사람이 슬퍼할 거라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답답해지고 애가 탔다.

덕분에 무겁게 몸을 누르는 수마와 싸워서 이겼을 때 그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 걸어주고 슬퍼해 주던 그 사람이 바로…….

내 사랑하는 아내,

아델이었다는 걸.


“그런데 손은 어쩌다가?”

그러다 크리스틴은 아델의 손등 여기저기가 긁힌 걸 보았다.


“아아, 이거? 마차로 당신을 옮기다가. 황제의 병사들이 당신을 잡으려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아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날 숲에서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기억났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아수라장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능력하던 자신도.

그게 너무나 끔찍해서 꿈이기를 바랐었는데…….


“짐머와 제니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거기가 내 무덤이 될 뻔했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내 무덤이 됐겠지. 고마워, 아델.”

그는 상처투성이 작은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이 여린 손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던 아델도 엷게 웃었다.


“좋다. 당신 손이 크고 따뜻해서.”

 

 

***



“그런데 스톤은 어떻게 됐지?”

아델이 가져다준 옷을 입으며 크리스틴이 물었다.

스톤의 얘기가 나오자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내 피스톨로 놈의 머리통이 쐈어. 정확하게 명중했지.”

“정말 당신이?”

“응. 내가.”

아델은 오랫동안 묵혀왔던 숙제를 한 것처럼 후련했다.

하지만 자신이 쏜 피스톨에 끔찍한 모습으로 죽던 스톤을 생각하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같은 상황이 온다면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했겠지만.


“잘했어.”

크리스틴이 칭찬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한마디에 아델은 왠지 면죄부라도 받은 것처럼 편안해졌다.


“근데 왠지 좀 허무해. 그동안 나를 지탱해온 건 엄마를 죽인 놈에 대한 복수심이었으니까.”

“당신 마음속에 박힌 커다란 가시를 빼낸 거라고 생각해. 이제 곧 아물 거고.”

“가시……. 그러네. 곧 아물도록 당신이 도와줄 거지?”

“나보단 우리 아이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아델을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우리 아이를 만들어야지.”

너무나 담담한 크리스틴을 보며 오히려 아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