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유능한 조련사 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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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유능한 조련사 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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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유능한 조련사 아델
2022.12.19.
“응, 이제 우리 아이를 만들어야지.”
너무나 담담한 크리스틴을 보며 오히려 아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한 건…… 내가 늑대 일족이라는 게 밝혀질까 봐 그랬어.”
“알아. 우리의 아이가 혹시라도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면 당신의 정체가 밝혀질 테니까.”
“그렇기도 하고. 사실은 나도 날 믿지 못했어.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게 내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었거든. 그날의 기억이 없었으니까.”
“기억이 없다고?”
“음, 그 무렵 나도 처음 알았어. 내가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는 걸. 갑자기 몸에 찾아온 변화로 제정신이 아니었지. 온몸에 털이 돋아나고, 살육과 번식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해져서 두려웠어. 그래서 미친 듯 도망쳤고. 그러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 같았거든.”
뜻밖의 얘기에 아델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리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며칠이 지났고 숲에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지. 돌아와 보니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도 끝나 있었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크리스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은빛 늑대의 짓이라는 당신의 말을 듣고 날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스톤의 확인이 필요했던 거야. 정말 내 짓이었다면…… 날 용서 못 했을 거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델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10년 전 그가 자신의 곁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알몸으로 숲에 있는 걸 봤다는 사람들의 소문까지.
“아델, 어머니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 주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그분은 내게도 어머니와 같았어. 지금도 가끔씩 그리워져.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파이를 구워주시며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그 날들이.”
아델은 크리스틴을 가만히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마치 어린 시절 그를 보살펴주었던 상냥한 누나처럼.
“고마워. 모두 다 말해줘서. 그리고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해줘. 이젠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거.”
“아델…….”
크리스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만일 당신이 늑대 일족이 아닌 더 한 거라고 해도 내게는 오직 크리스일 뿐이야.”
그가 잘못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그가 살아나 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어떤 모습이든 제발 곁에만 있어 달라고.
꼬르륵.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들려온 적나라한 소리에 아델과 크리스틴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파이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서.”
그제야 아델은 그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내 정신 좀 봐. 따뜻한 수프라도 가져다줄까?”
그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소 한 마리라도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
어느새 창밖의 하늘이 엷게 푸른 빛을 띠어갔다.
이른 아침형 인간인 마크는 오늘도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 평소처럼 아이들이 잠든 침실을 둘러본 그는 1층으로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1층 식당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온 집 안에 퍼지는 이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란…….
‘이 시간에 누가 일어났나?’
의아해하며 식당으로 가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이스 백작?”
마크는 제 눈을 의심했다. 맨손으로 닭 다리를 뜯고 있던 크리스틴과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자신의 낡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그는 마치 한참 성장기의 소년처럼 보였다.
언제나 오만하고 차갑던 모습만 기억하던 마크에겐 약간의 충격이었다.
게다가 넉살 좋게…….
“좀 이른 시간이지만 같이 먹겠나?”
마크는 이번엔 제 귀까지 의심하고 말았다.
그가 아는 크리스틴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이곳이 자신의 집, 자신의 식당이라도 말이다.
죽다가 살아나더니 다른 인격이 된 건가?
“저기…… 내가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거죠?”
입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크리스틴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우아하게 냅킨 천에 손을 닦았다.
“마크 캐슬러 남작. 버릇없는 꼬맹이를 키우고 있는 홀아비. 자기가 의사인 양 서슴없이 불법 의료행위를 하는 수의사. 뭐 웬만한 의사보다는 실력이 있는 건 인정. 한때 내 약혼녀에게…….”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하죠.”
여전히 말하는 본새가 밉상인 걸 보니 인격이 바뀐 건 아니었다.
“애플파이 다 구워져……!”
마침 트레이에 파이를 들고 들어오던 아델이 마크를 보자 멈칫했다.
“일찍 일어났네요, 마크.”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파이를 든 채로 아델이 환하게 웃었다.
어젯밤만 해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초췌한 모습이더니, 지금은 피곤해 보였음에도 발그레한 뺨과 두 눈에 초롱초롱 생기가 넘쳤다.
크리스틴이 회복된 것만으로 이렇게 변한 것이다.
이건 자신이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마크는 씁쓸해졌다.
하지만 묘한 오기도 생겼다.
“음, 파이 냄새 죽이는데요. 내 몫도 있는 거죠, 아델?”
“물론이죠. 같이 드시겠어요?”
“그러죠. 아델, 당신이 정 원한다면.”
그러면서 마크가 식탁 의자를 빼내자,
“예의상 권한 거잖아. 딱 보면 모르겠나?”
크리스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마크가 아니었다.
“정말 예의상이었나요, 아델?”
“아뇨. 이른 시간이라서 못 깨웠어요. 함께해주시면 더 즐겁죠.”
“들었습니까, 백작?”
“됐으니, 앉도록 해.”
“이런 잊었나 본데, 여긴 내 집이고,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걸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마크를 보며 크리스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두 남자의 신경전을 눈치챈 아델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미안해요, 마크. 바이스 백작이 다른 건 몰라도 예의가 조금 모자라요.”
“아델.”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으며 경고했지만,
“예의뿐 아니라 참을성도 모자라는 것 같군요, 아델.”
마크는 한술 더 떠서 덧붙였다.
“하, 모자란다고? 내가?”
아델은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크에게 동조하며 웃었다.
“정확하게 봤네요, 마크.”
이 사람들이 점점……!
크리스틴이 심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관찰력이 좀 예리하거든요.”
“역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은 다르시네요.”
콰앙!
결국 크리스틴은 식탁을 내려쳤다.
그는 놀라서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 물론 아주 살벌하게.
“그래 인정하지. 내가 예의도 참을성도 모자라는 거. 그러니 거기까지만 하고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앉지. 난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하고 싶거든. 이건 부탁을 가장한 경고야.”
마크와 아델은 서로 눈을 찡긋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 빼고 둘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이건 협박이고.”
식탁의 나이프를 움켜쥐며 그는 더욱 살벌하게 웃었다.
그러나 아델에겐 전혀 협박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능청스럽게 그의 앞에 애플파이를 내려놓았다.
“칼 든 김에 예쁘게 잘라줘, 크리스.”
크리스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재촉하듯 생글거렸다.
“어서, 크리쮸~.”
생각지도 못한 애교에 크리스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소름 돋았어.”
“뭐라고!”
그러면서도 그는 들고 있던 나이프로 순순히 파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마크는 혀를 내둘렀다. 그 악명높은 은빛 늑대, 바이스 백작이 아델의 앞에서는 순한 양, 아니 순간 강아지가 되었으니까.
아델은 유능한 조련사가 틀림없었다.
“자, 받게.”
그러다 제 앞에 내민 파이 조각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크리스틴이 자른 파이의 첫 번째 조각을 준 것이다.
“저기…… 지금 인지능력에 이상은 없는 거죠, 백작?”
크리스틴의 눈매가 사나워지자,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혹시 아델에게 주려던 걸 헷갈린 건가 해서.”
“아무래도 이 파이가 자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설마요.”
마크가 얼른 파이를 받아들자,
“고맙다는 뜻이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는 마크를 외면하며 그가 덧붙였다.
“물론 진료비도 두둑하게 낼 생각이고.”
“두둑한 식비도 청구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굶주렸던 걸 보충하려고 했는지, 몸이 회복되기 위해 많은 영양소가 많이 필요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크리스틴은 순식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고, 그 증거로 식탁 위에 빈 접시가 수북했던 것이다.
“얼마든지.”
말을 마친 크리스틴은 파이 한 조각을 한입에 다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자 아델이 얼른 찻잔을 채워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이것도 자신은 해줄 수 없는 일.
알면서도 자꾸 확인하며 상처받는 스스로가 마크는 못마땅해졌다.
하지만 알면서도 자꾸 확인하며 상처받는 사람은 마크만이 아니었다.
***
“어, 아침부터 무슨 일 있었수?”
음식 냄새에 홀린 듯 식당으로 가던 제니퍼는 복도에서 쥬디와 마주쳤다.
눈치가 둔한 그가 알아볼 정도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다. 눈가가 촉촉한 것도 같고…….
“일은 무슨 일이요.”
쥬디는 고개를 숙인 채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다 생각난 듯 말했다.
“참, 그쪽 단장님 일어나셨어요. 축하해요.”
“핫! 정말이오?”
크리스틴의 쾌차 소식에 활짝 웃던 제니퍼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며칠 동안 마크와 함께 정성껏 그의 진료를 돕던 쥬디가 아니던가? 그런데 저 어두운 표정은 왠지 크리스틴의 쾌유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우리 단장님께 혼난 건……?”
“뭐래…….”
“아님 말고.”
제니퍼가 다시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쥬디가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나중에 가는 게 좋겠어요.”
“아니, 왜?”
“그냥. 지금은 분위기가 좀 그래서.”
그럴수록 제니퍼는 더 궁금해졌다.
식당에서 뭔가 은밀하고 오묘한 어른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걸까?
이를테면 키스라던가, 키스라던가…….
‘하긴 오래 굶주리셨을 테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데 크리스틴과 아델, 그리고 마크 세 사람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나오라니까요!”
쥬디가 그런 제니퍼의 팔을 얼른 끌고 복도를 벗어났다. 마른 오이처럼 여리여리한 여자가 생각보다 힘이 굉장히 세서 제니퍼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아, 대체 왜 그러는 거요!”
결국 저택 정원까지 끌려 나온 제니퍼는 그녀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쥬디가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였다.
울먹이는 여자를 본 그는 몹시 당황했다.
“아니, 그러니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자초지종이 궁금해서…….”
“아델 아가씨가 미워요. 진짜 미워.”
대뜸 들려온 말에 제니퍼는 도저히 대화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델 양이 왜요? 둘이 잘만 지내더니.”
사실이었다. 크리스틴을 간호하면서 아델과 쥬디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우리 선생님을 아프게 하니까요.”
“아델 양이 의사 선생 어디를 아프게 했는데요……?”
황당해하며 쥬디가 눈을 흘겼다.
“아, 됐어요. 이런 근육 바보랑 무슨 말을 하겠어.”
“그……, 근육 바보?”
제니퍼가 뒷목을 잡으며 인상을 쓰는데 쥬디는 어느새 저만치 쌩하고 가버렸다.
그 뒤통수에 대고 제니퍼가 한마디 했다.
“설마 의사 선생 좋아하우?”
“……!”
쥬디의 걸음이 멈칫하자, 그는 어려운 숙제라도 해결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훗, 내가 또 눈치 하나는 귀신이거든.”
물론 본인 피셜이었지만.
결국 제니퍼가 그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래요. 나 우리 선생님 좋아해요! 그게 왜요!”
“아니, 누가 뭐라 그랬나…….”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세상에 여자가 아델 아가씨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직도 못 잊고. 게다가 그 여잔 죽어가는 연인을 왜 하필 우리 선생님께 데려오는 건데요? 그리고 둘이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으면 우리 선생님은 또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진짜 둘 다 빨리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어!”
숨겨왔던 마음을 털어놓던 쥬디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결국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으흐흑! 흐흑!”
양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우는 여자를 보며 제니퍼는 난감해졌다.
우는 여자는 달래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기…… 뚝……!”
“와아앙! 아아앙!”
쥬디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져 버렸다.
당황한 제니퍼는 등줄기에 식은땀까지 났다.
“내, 내가 잘못했수. 그러니까 이제 울음을 그쳐요! 아, 제발…….”
그는 사정하며 빌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만 할 수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기분은 왜 또 싱숭생숭해지는지 몰랐다.
그녀가 마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마크를 좋아한다며 울 때부터였던가?
아니,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역시 어른들의 세계는 복잡하고 오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