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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오직 행복해지는 것만 생각하려 해 (93/155)


93화. 오직 행복해지는 것만 생각하려 해
2022.12.23.



 


“백작 아저씨?”

세 사람이 배부르게 식사를 끝낼 무렵이었다.

눈을 비비며 식당으로 들어오던 제이드는 크리스틴을 보자 다시 눈을 비볐다.


“진짜 아저씨다.”

“잘 지냈어, 꼬맹이?”

아이는 짧은 다리로 와다다다 달려오더니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진짜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왜 안 왔어요?”

은빛 늑대를 치료하는 동안 아이들은 절대 진료실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었다. 덕분에 제이드와 폴린은 은빛 늑대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제이드는 그가 지금 막 온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빴거든.”

“맞다! 아저씨는 근위대장이고 또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도 훈련 시켜야 하니까. 그쵸?”

아이는 또랑또랑하게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크리스틴은 제이드의 갈색 곱슬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그새 더 똑똑해졌는데?”

“당연하죠. 나 칼싸움도 이제 진짜 잘해요. 아저씨, 나랑 또 결투해요. 네?”

제이드의 간절한 파란 눈을 보면 누구라도 거절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자 마크가 나섰다.


“제이드. 백작 아저씨는 조금 전 먼 길을 오느라 몹시 피곤하단다. 그러니 쉬게 해드려야지.”

“그럼 내일은 돼요?”

결국 아델이 웃으며 아이의 관심사를 돌렸다.


“제이드, 그럼 나랑 같이 낚시하기로 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참! 아줌마랑 낚시도 하기로 했지.”

“아침 식사 후에 폴린이랑 같이 갈까?”

“폴린 형한테 물어볼게요. 근데 아직 자고 있는데.”

“그럼 같이 깨우러 가자.”

“응.”

아이는 생글거리며 아델이 내민 손을 얼른 잡았다. 손을 잡고 함께 식당을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마치 엄마와 아이처럼.

***



“꼬맹이가 아델을 많이 좋아하는군.”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틴이 중얼거렸다.


“제이드는 백작도 좋아한답니다.”

마크의 대답에 그가 픽 웃었다.


“제 아비보단 마음에 들어.”

그러더니 맞은편 식탁에 앉은 마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뭡니까, 이 부담스러운 시선은?”

“그린힐에 내 이름으로 된 저택이 몇 채 있네.”

“네, 백작이 부자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마크는 빈정이 상한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재정관리인에게 말해 놓을 테니 자네가 알아서 처분하도록 해.”

“그게 무슨 말인지……?”

크리스틴은 대답 없이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며칠 만에 깨어났을 뿐인데 그 사이 연분홍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자 여린 꽃잎들이 하늘거리며 휘날렸다.


“루스울프에 가르덴 호수라고 있네. 그곳의 벚꽃이 지기 전에 아델과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야.”

“…….”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걸 알았으면서도 마크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졌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고.”

“그렇군요.”

“그러니 그린힐의 저택은 진료비라고 생각해. 약속했잖나. 진료비와 식비는 두둑하게 내겠다고.”

그제야 마크는 크리스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설마 그 저택을 제게 준다는 겁니까?”

창밖의 벚꽃을 감상하던 크리스틴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옮겨졌다.


“제이드와 폴린을 키우는 데 써도 좋고, 제대로 된 진료 센터 같은 걸 지어도 좋고.”

“아뇨. 이런 건 찜찜해서 싫습니다.”

마크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크리스틴의 느슨하던 표정도 차가워졌다.


“진료비엔 내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네. 그러니 이 정도면 적당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살벌한 그의 표정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받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처럼 느껴졌다.

마크가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는 동안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혼식에 자네를 부르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축복은 받고 싶군. 우리의 결혼 축복해주겠나?”

“제게 준 진료비에 그것도 포함입니까?”

“대가가 있다면 그건 진정한 축복이 아니겠지.”

“그렇다면 축하해주지 않아도 상관없겠군요.”

“음.”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틴은 식당을 나갔다.

곧 등 뒤에서 마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행복 하십시오. 두 분.”

잠시 머뭇거리던 마크는 다시 덧붙였다.


“아델이 불행하단 소식이 들리면 루스울프까지 쫓아갈 겁니다.”

대답 대신 크리스틴은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입매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오직 행복해지는 것만 생각하고 싶었다. 아델과 함께.


 

***

오후가 되자 아델과 아이들은 낚시터에서 돌아왔다.

해가 기울며 기온이 쌀쌀해졌지만 소매와 바지를 둘둘 걷어 올린 아이들의 뺨은 발그레했다.

양옆에 두 아이를 거느린 아델도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스커트 아래가 맨발이었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차림의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서 세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눈부신지 몰랐다.

크리스틴은 2층 응접실 창가에서 차를 마시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어둡게 가라앉았다.


“질투해 본 적 있나?”

옆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제니퍼가 뚱하게 쳐다보았다.


“됐다. 네놈에게 물을 게 따로 있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는 차를 홀짝였다.


“어떤 여자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게 막 신경 쓰이는 거. 그게 질투 아닙니까?”

호오.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제니퍼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무시하지 마십시오. 저도 질투가 뭔지 다 압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건가?”

크리스틴은 무심한 말투였지만 정곡을 찔린 듯 제니퍼는 뜨끔했다. 게다가 얼굴이 불그레해지기까지…….


“아닙……!”

“의사 선생의 조수지?”

“으, 따가워!”

결국 제니퍼는 바늘에 찔리고 말았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을 빨며 쳐다보자 크리스틴이 혀를 찼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 여자를 볼 때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들키고 나자 제니퍼는 속이 후련했다.


“그러는 단장님은 아델 양과 의사 선생 사이를 질투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다 눈치챘습니다.”

“아니.”

“아니긴요! 아까부터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더구먼.”

바느질하던 걸 집어던진 그는 창문 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마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델의 곁에 있는 남자들은 제이드와 폴린이었다.


“설마 저 꼬맹이들…… 아니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꽤 진지한 크리스틴의 대답에 제니퍼가 입을 떡 벌렸다.


“헐…….”

“나 말고 내 여자를 웃게 하는 건 전부 경계의 대상이다.”

제니퍼는 얼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아델 양. 어쩌다 이런 미친 남(男)에게 걸려서…….”

“다 들린다.”

“들리라고 한 말입니다! 어떻게 저 귀여운 꼬맹이들을 질투할 생각을 합니까?”

“됐고. 짐머의 소식은?”

더는 말싸움하기 귀찮다는 듯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제니퍼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저녁쯤 도착할 거라는 연통이 왔습니다.”

“결국 로드웰 공작은 사망했겠지?”

“그렇겠죠.”

그러니 짐머가 돌아오는 것이리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스울프로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이제 곧 칼라임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리라.

그 소용돌이는 크리스틴마저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그러기 전에 루스울프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성문을 잠그고 이 바람을 피해가리라.

다시 창밖을 보자, 아델은 여전히 두 아이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저렇게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건.

이런 걸 질투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런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한 감정이었다.

곧 마크가 세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제이드가 와다다다 제 아비에게 뛰어가며 소리쳤다.


“아빠, 우리가 고기 진짜 많이 잡았어!”

아이의 목소리는 햇살만큼이나 밝았다.


“어이쿠, 잘했네!”

마크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며 칭찬을 하자, 폴린도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전에 잡은 고기보다 훨씬 커요!”

“오, 정말?”

“아줌마, 얼른 보여줘요. 얼른!”

마크에게 안긴 제이드가 어리광부리며 아델을 졸라댔다.

그러자 맨발의 아델은 들고 있던 유리병을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짠!


“풉!”

2층 창가에서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뭐예요? 뭔데요?”

크리스틴이 웃는 걸 본 제니퍼도 다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저거 빈 통 아닙니까?”

그랬다. 2층에선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피라미들 대여섯 마리가 병 안에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놓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들이라니.


“우와, 진짜 많이 잡았구나!”

하지만 마크는 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려는 듯 감탄했다.


“아빠, 우리 이걸로 다 같이 저녁 먹자! 응?”

“그, 그래…… 다 같이 먹자.”

그러면서 마크가 난처하게 아델을 바라보았다.


“가능할까요, 아델? 아무리 당신이라도…….”

아이들이 들을세라 입 모양으로 묻자, 아델은 피라미들이 헤엄치는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당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오늘 저녁은 기대해도 좋아요!”

“우와, 아줌마 최고!”

두 아이가 신나서 함성을 지르자 아델도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옆에서 어이없어하던 마크도 이내 같이 웃어버렸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귀가 밝은 크리스틴에게 고스란히 들려왔다.

창밖의 풍경은 마치 단란한 가족의 한때 같았다.


‘몇 년 후 그녀와 나의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때를 대비해서 낚시라도 좀 배워둘까?’

그런 생각을 하자 크리스틴은 흐뭇해졌다. 그러다 문득,


‘정말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다.


‘우리가 아무 탈 없이 루스울프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까?’

‘저토록 눈부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행복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따라왔다.

그래, 이 이상한 기분은 질투가 아니었다.

그건…… 불안이었다.

본능적인 불안.

***

저녁의 메인 메뉴는 피라미 수프였다.

물론 온갖 채소들로 맛을 낸 수프에 물고기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의기양양한 표정이란 맨손으로 멧돼지라도 잡아 온 것 같았다.


“귀여운 녀석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며 아델은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놀아주다 보니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은 유쾌했다.


“이젠 나도 좀 봐주지.”

돌아보자, 크리스틴이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어머 당신, 질투하는 거야?”

“응, 질투해.”

아델이 까르르 웃었다.


“무서워라. 같이 마시려고 차를 끓이는 중이었는데 그걸로는 어떻게 안 될까?”

“쳇, 인심 썼다.”

“그럼 포치에 있어. 금방 챙겨서 나갈게.”

 

잠시 후 아델은 트레이에 간단한 다과를 차려서 포치로 나왔다.

넓은 데크에는 마크가 만들었다는 투박한 모양의 벤치가 놓여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곳에 앉아 날이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가도 모를 만큼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아서 아델은 섣불리 부를 수가 없었다.

이럴 때의 그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낯설게 느껴졌다.

해는 이미 산등성이 뒤로 숨어버리고, 서녘 하늘만 흐릿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그락.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는데 그가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 잔을 그의 앞에 놓아주며 아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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