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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스톤은 정말 죽었을까? (94/155)


94화. 스톤은 정말 죽었을까?
2022.12.26.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 잔을 그의 앞에 놓아주며 아델이 물었다.


“앞으로의 일들. 미안하지만 곧 떠나야 할 것 같아.”

“응, 그러자.”

아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앉았다.


“떠나면 다시는 그린힐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아…….”

“아이들을 못 봐서 서운하겠군.”

“서운하지만 대신 앞으로 계속 당신이랑 함께 있을 거니까 괜찮아.”

그의 팔짱을 끼며 아델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환한 미소에 크리스틴은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제 어깨에 기대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앞으로 우린 계속 함께할 거야. 그리고 하루빨리 귀여운 아이도 낳고.”

“응, 우리도 귀여운 아이를 낳자.”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하지만 크리스, 아직 잠자리는 좀 힘들지 않을까? 당신이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고…….”

얼굴을 붉힌 아델이 귀여워서 크리스틴은 일부러 장난을 쳤다.


“아델, 내가 아무리 짐승이라도 이 몸으로는 당신을 안지 못해.”

“알아. 누가 뭐래?”

크리스틴은 입을 삐죽거리는 그녀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몹시 아쉬운 얼굴이네.”

“아쉽긴 누가?”

“게다가 당신을 만족시키려면 어중간하게 회복된 걸로 불가능…….”

아델이 얼른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애들이라도 들으면 어쩌려고.”

그럴수록 더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


“사실대로 말해봐. 아쉽다고. 혹시 알아? 만족은 못 시키더라도 우리의 아이는 만들 수 있을지.”

“진짜, 환자를 때릴 수도 없고…….”

아델은 그의 양쪽 뺨을 쭉 잡아 흔들었다. 어렸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아, 아아! 이거 금지랬지!”

“어머, 난 동의한 기억 없는데.”

약 올리듯 혀를 쏙 내밀며 도망치던 그녀가 멈칫했다.


“짐머 경……!”

며칠 만에 본 짐머는 먼 길을 다녀온 여행자처럼 보였다.

늘 단정하던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진 데다가 정리하지 못한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턱을 덮고 있었다.

그러다 건강한 모습으로 포치에 앉아있는 크리스틴을 발견하곤 눈가가 촉촉해졌다.


“젠장, 너무…… 멀쩡하신 거 아닙니까?”

“날 보내버리고 싶었나 보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리스틴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동안 걱정한 게 억울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결국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며 짐머가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새 제니퍼도 나타나서 큰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 혼자서도 단장님과 아델 양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니까!”

짐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에게 속삭였다.


“단장님도 모자라 저 천방지축까지 돌보느라 힘드셨겠군요.”

“뭐 약간요.”

아델은 부인하지 않았다.

***

짐머는 보고부터 하겠다고 했지만, 아델은 식사부터 하라고 했다.

그는 한눈에 봐도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몰골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상황들이 급박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크리스틴과 짐머는 단둘이 응접실로 올라갔다. 아델에게 차를 내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둘이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나눌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긴장이 되었다.

오늘 하루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불안했던 이유가 이거였을까?

이유 없이 불안을 느꼈던 건 크리스틴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로드웰 공작이 사망했습니다.”

응접실로 들어와 둘만 있게 되자 짐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은 낮게 침음했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지만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자벨 부인이 공작의 임종을 지켰나?”

“예, 다행히 제가 늦지 않게 부인을 데려갔습니다. 임종 직전 공작은 황제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걸 알렸고요.”

“다행이군.”

덕분에 크리스틴이 공작을 살해했다는 누명은 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내란.

오랜 전쟁을 치르느라 수많은 병사가 죽고,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또한 국고는 바닥나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이 상황까지 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만일 로드웰 공작이 살아있었다면 선황제를 시해했다는 증거만으로 얀을 황좌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는 원로 귀족회의 수장이었고, 따르는 귀족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자벨은 달랐다. 젊은 귀족들은 호전적인 얀을 더 따랐고, 귀족회가 온전히 그녀의 편을 들어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황제와의 싸울 것이다.

얀의 다음 타겟은 황위 서열 2위인 러스티스 대공이 분명했으니까.

남편에 이어 부친까지 잃은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만은 지키려고 할 테니까.

게다가 로드웰 가문의 기사단은 웬만한 왕국의 군대에 버금갔다.

그걸 아는 얀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역대 황제 중 가장 강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황후는 기사 가문의 출신이니 하급 기사들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란이 시작된다면 한동안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패는 크리스틴이 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가.


“역시 이자벨 부인과 손잡을 생각이시죠?”

“글쎄.”

“그럼 로드웰 공작을 왜 도운 겁니까?”

“로드웰 공작이 얀을 몰아세우면 그사이에 루스울프로 가려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렸으니.”

“그래도 이대로 황제를 놓아둘 생각은 아니시죠?”

“글쎄…… 내가 워낙 평화주의자라…….”

짐머는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는 크리스틴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헐. 언제부터 자기가…….

물론 크리스틴도 당장 황궁으로 쳐들어가 얀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가장 최악의 방법이었다. 그는 다시는 짐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얀은 로드웰 공작가에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아델과 함께 루스울프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두 사람을 닮은 아이도 낳고, 함께 낚시도 하고, 마크처럼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보다 스톤의 시체는 확인했나?”

갑자기 짐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사단에게 스톤의 시체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졌답니다.”

“……뭐?”

크리스틴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끌고 간 흔적과 대량의 혈흔이 숲 안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놈을 누군가 끌고 간 게 틀림없습니다.”

“젠장, 누가……!”

“추격 중이니 조만간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역시 황제의 짓일까요? 만일 놈을 다시 회복시키기라도 한다면…….”

“그건 불가능할 거다.”

크리스틴은 심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델이 읽어준 책에 의하면 같은 일족끼리 입힌 상처는 회복이 더디다고 했다.

그는 사실 혼수상태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마치 꿈결처럼 들려오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책의 내용대로 스톤에게 물어뜯긴 크리스틴의 상처 역시 낫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는 스톤에게 더 많은 치명상을 입혔다. 아델도 정확하게 놈의 머리를 쏜 것이다.

그 정도 데미지라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 찜찜함은 대체 뭘까?

모든 칼자루는 이쪽에서 쥐고 있었는데…….

***

같은 시각 교황청.


“서탑 기도실 얘기 들었어?”

“밤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

“울음소리라기보단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어.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서탑 근처를 산책하다가 깜짝 놀라 주저앉을 뻔했지 뭐야.”

“헛, 정말?”

“대체 뭘 숨기는 걸까? 요즘 서탑 경비도 엄청 살벌하던데.”

장서관을 정리하던 수련 사제들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이곳은 블루게일 안에 있는 교황청이었다.

교황청 내에서 수련 사제들은 늘 기도와 독서, 사색을 강요받았다. 그 외에 불필요한 행동, 특히 쓸데없이 말을 옮기는 건 죄악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 남짓의 수련 사제들에게 금지된 이야기는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레아나 넌 들어봤어?”

누군가 물었고, 수련 사제들은 짓궂은 표정으로 일제히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걸레질하고 있었다.

소녀는 작고 너덜너덜해진 검은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앞치마는 낡은 잿빛이었다.


“레아나!”

수련 사제들이 그녀 앞에서 쿵! 하고 발을 구르자 소녀가 겨우 걸레질을 멈췄다.

손등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는 그녀는 남루한 차림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투명하고 하얀 피부에 발그레해진 볼,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인형 같았다. 그런 얼굴과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이 어우러져 어딘가 신비스러웠다.


 


“예, 시키실 일 있으세요?”

레아나가 멍한 얼굴로 되묻자 수련 사제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놔둬. 쟤 귀가 안 들리잖아.”

“그래, 쟤가 뭘 들었겠어.”

레아나는 그 소리도 안 들리는지 생글 웃었다.

수련 사제들도 그녀에게 됐다는 듯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넌 그냥 하던 걸레질이나 해.”

레아나는 여전히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아나는 교황청에서 후원하는 고아원 출신이었다. 귀는 어두웠지만 총명한 그녀를 교황청에서 데려다 간단한 심부름이나 잡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5년쯤 지나자 레아나는 교황청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소문의 서탑 기도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레아나는 낑낑대며 걸레가 든 자루와 커다란 물통을 들고 복도를 걸어갔다.


“레아나, 오늘도 고생하는구나.”

“레아나, 힘내!”

사제들과 수련 사제들이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응원했다. 아무도 이 작은 소녀의 짐을 나눠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일 뿐이었다.


“쟨 힘든 줄도 모르나 봐.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어?”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겠지.”

“모자라서 그런 거 아냐?”

그녀는 자신을 응원하던 사람들이 뒤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복도를 가로지른 레아나는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 청소 용품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었다. 음침하고 퀴퀴한 냄
새가 나는 곳이라 당연히 인적이 드물었다.

동시에 생글거리던 레아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지워졌다.


“휴우, 여기서는 괜찮겠지?”

청소 용품을 정리한 레아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내 작고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

스스스…….

레아나가 나타난 곳은 어두컴컴한 지하실 안이었다.

조금 전에 있던 지하실보다 더 끔찍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바닥은 물기로 축축했고, 벽은 곰팡이가 뽀얗게 뒤덮고 있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서탑의 기도실이었다.

말이 기도실이었지 사실은 교황청 내에서 가장 최악의 감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은 갈색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


“안녕, 갈색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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