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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펜던트 속의 남자는? (96/155)


96화. 펜던트 속의 남자는?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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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스…….

어두운 지하 기도실.

흐릿한 빛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그것은 곧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검은 원피스의 소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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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 크르르르……. 크으……!”

레아나를 보자 쇠사슬에 묶인 갈색 늑대가 갑자기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금방이라도 쇠사슬이 풀리고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소생의 주문으로 갈색 늑대를 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짐승의 영혼까지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갈색 늑대는 지금 언데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벌레가 몸을 파먹는, 움직이는 시체.

생각보다 끔찍한 결과에 레아나는 원상태로 되돌려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황하는 사이 짐승 소리를 듣고 사제들과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놀란 그녀는 얼른 자신의 몸만 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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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많이 기다렸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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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 크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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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인데, 아빠가 남겨주신 유품이거든. 너 혹시 봤니?”

레아나는 손바닥 위에서 작은 빛무리를 만들어 어두운 지하실 안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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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없으면 큰일인데. 그 안에 아빠의 초상화가 들어 있거든. 우리 아빠 말이야 진짜 잘 생겼어. 사냥도 엄청 잘하고, 무척 자상한 분이셨지.”

펜던트를 찾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레아나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슬픈 눈으로 갈색 늑대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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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죽었는지 알아? 우리 아빠도 늑대 일족이었거든. 너와 같은.”

그래서 레아나는 이 갈색 늑대가 자꾸 신경 쓰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교황청에서 처참하게 화형당한 걸 봤지만 어딘가에 이렇게 살아 있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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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를 찾으면 우리 여기서 같이 나갈래? 널 꼭 되살려 줄게. 이런 언데드 따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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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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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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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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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부터 우린 한 편이다. 알았지?”

레아나는 이 끔찍한 몰골의 짐승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순간 그녀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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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찾았다!”

그녀의 펜던트가 갈색 늑대를 묶은 쇠사슬 아래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그대로 손을 뻗었다.

철컹! 철컹!

동시에 그녀를 향해 네모난 철창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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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나, 이걸 찾으러 온 거니?”

철창 안에 갇힌 레아나의 앞에 모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반짝이는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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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놔!”

레아나는 손을 뻗어 펜던트를 잡아채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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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꺅!”

하지만 철창의 창살과 닿는 순간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에 주저앉았다.

모리스가 안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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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해, 꼬맹이. 이 철창은 사제들의 신성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야. 네 재주가 뛰어난 건 인정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와 싸워서 이길 순 없어.”

레아나를 가둔 철창 주위로 어느새 최상급 사제들과 그의 제자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 철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리스의 말대로였다.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는 있었지만, 이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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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자식, 모리스!”

레아나의 욕설에 사제들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모자라 보일 정도로 항상 웃고 다니던 아이였으니까. 지금 보니 모리스의 말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모리스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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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레아나 넌, 볼수록 재미있는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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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면 너부터 죽여버릴 거야, 모리스!”

레아나의 청회색 눈은 마치 푸른 불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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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넌 죽기 전엔 거기서 나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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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 나보다 약한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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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보다 약한 게 아니라, 너처럼 무식하게 힘을 낭비하지 않는 거다.”

그녀를 한심스럽게 보며 모리스가 쯧쯧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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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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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저 짐승을 언데드로 소생시키는 데 꽤 많은 힘을 썼겠지. 그러니 지금은 중급 사제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걸? 물론 내 상대는 절대 못 되고.”

레아나도 자신의 몸 안에 남아 있는 힘이 얼마 없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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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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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누가 교황청 놈들에게 목숨을 구걸할까 봐?”

레아나는 사실 교황청을 증오했다.

그럼에도 귀가 안 들리는 척하면서 일해왔던 건 복수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교황은 예로부터 귀가 안 들리는 눈치 빠른 아이들을 시동으로 두곤 했다. 자신이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걸 아는 레아나는 노력 끝에 교황의 눈에 들었고, 덕분에 역대 교황들만 알고 있는 기도 주문이나 정보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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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럴 만도 해.”

딸칵!

모리스는 레아나의 펜던트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은빛 머리카락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수려한 남자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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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자의 딸이었다니. 기억나. 우리에게 잡혔던 늑대 일족 전사. 오랫동안 추격했는데 마지막엔 어이없이 잡혀서 의아했었지. 이제 보니 딸을 지키려고 그랬던 모양이군.”

아버지의 얘기에 레이나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8살 무렵 성홍열에 걸려 생사를 오갈 때였다.

숲에 숨어 살던 아버지는 죽어가는 딸을 안고 제 발로 교황청으로 들어갔다.

성홍열이 유행할 때라 교황청에서 임시 진료실을 지어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청에 발을 디딘 아버지는 금방 발각되고 말았다. 별다른 저항 없이 붙잡힌 그는 곧 공개 화형 되었고.

그 모든 걸 레아나는 진료실 창을 통해 보았다.

꿈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열이 높아서 악몽을 꾸는 거라고.

아버지는 결코 저렇게 쉽게 잡힐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레아나가 발각되지 않도록 순순히 잡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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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 나는 네 아버지를 그렇게 죽이는 걸 반대했어. 하지만 늑대 일족은 화형에 처하는 게 교황청 꼰대들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었지.”

모리스의 말을 레아나는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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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네놈도 다른 사제들과 다를 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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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데. 난 네 아버지를 언데드로 만들고 싶었거든. 그러면 교황청 최고의 병기가 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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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아나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설마 그래서 갈색 늑대도 저렇게 살려둔 건가?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해서 병기로 쓰려고?

어쩌면 아버지가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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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짐승은 네놈이야…….”

레아나의 목소리가 잠겨서 갈라졌다.

그녀는 경멸과 증오, 환멸…… 모든 걸 담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리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쿨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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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을 이루려면 좋은 사람 소리만 들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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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자식, 모리스! 죽여버릴 거야!”

레아나는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온몸이 금방 하얀 불꽃에 휩싸였다.

그것은 그녀를 가둔 철창을 향해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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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집중하라!”

신성 능력으로 철창을 방어하던 사제들의 기도 소리도 높아졌다.

파팟! 팟!

두 개의 힘이 부딪치며 여기저기에서 강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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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 정도일 줄은……!’

지켜보던 모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힘이 강하다는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최상급 사제들 몇 명이 매달려도 레아나 하나를 상대하기가 버거워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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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ভպমਔਈঊ !”

퍽!

결국 사제 한 명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방어진이 깨진 틈으로 레아나의 하얀 불꽃이 창살을 뚫고 날아갔다.

그것은 그대로 갈색 늑대를 결박한 쇠사슬에 꽂혔다.

카라랑!

쇠사슬은 금방 금이 가고 곧 비스킷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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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르! 크아아아!”

풀려난 갈색 늑대는 길게 포효하며 높이 날아올랐다. 이내 허옇게 이를 드러내며 거대한 몸집으로 사제들을 덮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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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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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억!”

사제들은 레아나를 막아야 할지, 갈색 늑대를 공격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했다.

그동안 갈색 늑대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물어뜯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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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늑대를 공격해라!”

지하 기도실 안은 금방 끔찍한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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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레이나는 그 한복판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느새 그녀를 가뒀던 철창은 사라졌고, 그녀가 뿜어내던 하얀 불꽃도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르륵.

대신 레이나의 코와 입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리스의 말대로 무식하게 힘을 써버린 탓인가보다. 지금은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마치 그때와 같았다. 아버지가 화형에 처해지던 걸 보았을 때처럼 모든 게 몽롱했다.

갈색 늑대가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이는 장면도 꿈처럼 흐릿하고 비현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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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

그 순간 허연 이빨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갈색 늑대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레이나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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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이 나가자. 내가 널 원래대로 되돌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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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아!”

퍼엉!

그 순간 레이나의 얼굴로 살점과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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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갈색 늑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대신 눈앞에 있는 것은 까맣게 타버린 돌덩어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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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모리스 사제님!”

쓰러질 듯 휘청이는 모리스를 사제들이 얼른 붙잡아 주었다.

모리스의 힘으로 갈색 늑대를 저렇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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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으니 레아나를…… 잡아…… 어서…….”

하지만 어느새 레아나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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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레아나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가며 계속 달렸다.

빨리 교황청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있는 힘을 짜내 마법을 펼쳤지만 벽 사이를 겨우 이동할 수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교황청의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힘이 풀린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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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조금만 더……!’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은 어두운 밤이었고, 그녀는 누구보다 이 교황청의 지리에 익숙하다는 것.

서탑 뒤의 숲으로 가면 밖으로 연결된 길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파면당한 사제가 몰래 매춘부들을 만나러 다니던 개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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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라! 멀리 못 갔을 것이다!”

모리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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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다음엔 기필코 죽여버리겠어!’

이를 갈던 레이나는 숨겨진 길을 찾아 겨우 밖으로 나갔다.

***

블루게일의 대형 진료소.

진료소를 나오는 이자벨은 검은 머리에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표정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뒤를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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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는 게 어떠실지…….”

사람들의 만류에도 이자벨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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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버님을 하루라도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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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선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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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착하는 대로 원로 귀족회를 소집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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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선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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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러스티스 대공에게서 소식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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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직…….”

시종의 말에 이자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 그녀의 아버지 로드웰 공작이 임종했다. 온몸이 반쯤 으스러진 채로 며칠 동안 괴로워하다가 참혹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황제가 보낸 갈색 늑대의 공격을 받아서라고 했다.

그녀는 이미 블루게일에 오기 전 아들인 러스티스 대공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남편에 이어 아버지를 죽인 황제의 다음 타깃은 아들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들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황제와의 싸움은 곧 내란을 의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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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

그 아이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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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네.”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진료소 정원에 교황청의 문장이 새겨진 흰옷의 남자들이 곳곳에 보였다.

여기저기를 뒤지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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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에서 살인범을 쫓고 있답니다.”

시종이 얼른 귀띔을 해주었다.

그러나 황제와의 전쟁을 앞둔 이자벨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염려에 자신의 마차 뒤에 있는 또 한 대의 마차를 향해 갔다.

로드웰 공작의 관을 운반하기 위한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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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아버님의 마차를 확인 좀 해야겠네.”

시종은 얼른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 안은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검은 천으로 덮은 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촛불을 비춰보던 이자벨은 검은 천의 형태가 조금 이상한 걸 느꼈다. 마치 관 뒤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설마 교황청에서 찾고 있다는 살인범이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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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황후 폐하? 무슨 일이라도…….”

마차 밖에서 시종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천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열 대여섯 살의 소녀였다.

소녀의 얼굴은 피에 젖어 있었고, 깊은 청회색 눈동자가 어딘가 크리스틴을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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