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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이자벨의 웃음 (97/155)


97화. 이자벨의 웃음
2023.01.06.



 


“선황후 폐하? 무슨 일이라도…….”

마차 밖에서 시종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천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열 대여섯 살의 소녀였다.

소녀의 얼굴은 피에 젖어 있었고, 깊은 청회색 눈동자가 어딘가 크리스틴을 생각나게 했다.

그가 잔뜩 겁을 먹으면 저런 얼굴일까?

나이도 성별도 달랐는데 묘하게 닮은 것 같았다.

게다가 살인범이라기엔 가련할 정도로 지쳐 보였다.


“선황후 폐하, 교황청 사제들이 잠시 마차를 수색해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 말에 소녀의 겁먹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망설이던 이자벨은 곧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마차 밖을 향해 말했다.


“내 아버님, 로드웰 공작께서 잠드신 마차네. 교황청은 부디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춰달라고 전하게.”

“예, 선황후 폐하.”

곧 마차 밖에서 시종과 다른 사람들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니? 저들이 쫓고 있다는 살인범이?”

이자벨은 소녀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이자벨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감정에 호소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차라리 내가 널 숨겨주도록 설득해보렴.”

소녀는 금방 애처로운 표정을 버리고 당돌하게 말했다.


“선황후 폐하의 마법사가 되어드릴게요.”

“설마 그 마법으로 사람을 죽인 거니?”

이자벨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으로 얀을 죽여버리면 제일 깔끔할 테니까.


“말도 안 돼요. 누명을 쓴 거예요.”

“아쉽네. 난 강한 마법사가 필요했는데.”

소녀가 얼른 대답했다.


“노력해볼게요!”

하지만 이자벨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 정도 마법을 쓸 줄 안다면 왜 여기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있지?”

“…….”

소녀는 대답 대신 흘러내리는 코피를 소매로 닦아낼 뿐이었다.

이자벨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름?”

“레아나요.”

“그 펜던트는 중요한 건가 보구나?”

레아나는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모리스가 갈색 늑대를 공격하면서 떨어뜨린 걸 재빨리 주워서 도망친 것이다.


“아빠의 유품이에요.”

“잘됐네. 숨겨 줄 테니 그걸 맡기렴.”

레아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 펜던트를 더 꼭 움켜쥐었다.


“살인범이라는 널 뭘 믿고 숨겨주겠니? 중간에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할 줄 알고. 그러니 최소한의 담보는 있어야지.”

그때 마차 밖에서 시종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선황후 폐하, 아무래도 나오셔서 말씀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들었지?”

이자벨은 레아나를 재촉하듯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이 레아나가 펜던트를 넘겨주었다.


“꼭 돌려주신다고 선황후 폐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세요.”

이자벨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하러 맹세까지 해야지?”

“그럼 제가 맹세할게요. 만일 그걸 안 돌려주시면 평생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뭐?”

이자벨은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이 남루한 아이가 선황후인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당돌하고 진지하게.

그런데 이자벨은 그게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쓸모있는 아이일지도.


“행운을 빈다, 레아나.”

 

이자벨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 사제들 두 명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죠?”

“마차 안을 잠시 살펴봤으면 합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저기엔 고인이 되신 내 아버님이 잠들어 계시다고. 더이상 고인과 유족을 괴롭히려고 든다면 정식으로 교황 성하께 항의하겠어요.”

이자벨이 완강하게 나오자 사제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송구했습니다. 그럼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들이 물러나자 이자벨은 한숨을 돌리며 펜던트를 살펴보았다.

독특한 재질에 세공이 매우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부모님의 유품이라면 레아나도 평범한 소녀는 아니라는 얘기.


‘하기야 교황청에서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게 분명하겠지.’

톡!

그러다 펜던트의 단추를 누르던 이자벨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이스 백작?’

펜던트 안에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는데 크리스틴과 너무 닮았다.

이자가 설마 저 아이의 아버지라는 건가?

그제야 레아나를 보는 순간 크리스틴이 떠올랐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 얽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혈연관계인 걸까?

로드웰 공작이 임종 직전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능하면 황제와의 싸움은 피하거라. 그러나 해야만 한다면 반드시…… 바이스 백작을 우리 편으로 만들 거라. 그러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다.”

 
이런 상황에 크리스틴과 혈육일지 모를 레아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하늘이 아직은 우리 편인 모양이군.’

마차에 올라타며 그녀는 마부에게 말했다.


“속히 그린힐로. 바이스 백작을 만나야 하네.”

“예, 선황후 폐하!”

 

***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

푸른 어둠이 깔린 마크의 저택은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로 가득했다.

부엌의 오븐에선 한창 케이크가 구워지는 중이었고, 넓은 조리대의 오븐 팬엔 동물 모양의 쿠키가 줄 맞춰 놓여 있었다.

그 한쪽에 앉아서 아델은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그녀는 곧 크리스틴 일행과 함께 떠날 예정이었다.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 할 것 같아서 대신 편지와 간식을 챙겨놓는 중이었다.

자신을 잘 따르던 제이드와 폴린이 아쉬워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일찍 떠나는군요.”

묵직한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마크가 잠을 설친 푸석한 얼굴로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됐네요. 쿠키는 폴린에게, 당근 케이크는 제이드에게 이 편지와 함께 전해주세요. 얼굴을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고도 전해주시고요.”

“내 선물은 없는 건가요? 난 당신이 만든 애플파이가 제일 좋던데.”

“아아…….”

아델은 미처 생각 못 한 일이라 조금 당황했다.

마크가 조용히 웃었다.


“농담입니다.”

“당연히 농담이겠지. 평생 애플파이를 사 먹고도 남을 진료비를 지급했는데.”

어느새 마크의 뒤에 온 크리스틴이 거만하게 말했다.

아델이 그런 크리스틴을 나무랐다.


“크리스, 그건 아니지…….”

마크도 보란 듯 아델과 합세했다.


“아델, 당신의 약혼자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배금주의자로군요.”

“미안해요, 제가 잘 못 가르친 탓이에요.”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지금 2대 1로 싸우는 기분인데.”

“기분 탓만은 아닐걸요.”

마크는 살벌한 그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할 말을 다 하며 놀렸다.


“하, 내 생명의 은인인 걸 다행으로 알게.”

“그러게요. 백작이 은혜를 아는 짐승이라 참 다행입니다.”

크리스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신세 많았네. 살면서 갚을 날이 올 거라 믿지.”

마크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 무리하면 상처가 벌어질 테니 주의하십시오.”

“음.”

그동안 아델은 케이크와 쿠키를 포장해서 마크에게 가져왔다.


“정말 고마웠어요, 마크. 평생 잊지 않을게요.”

“영광이군요. 당신에게 평생 잊지 못할 남자가 되다니.”

마크는 들으라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크리스틴이 발끈한 표정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가만 보면 마크는 그가 저렇게 발끈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점잖은 얼굴에 묘한 악취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델도 발끈하는 크리스틴을 놀리는 게 솔직히 재미있었다.


“이별의 포옹 정도는 괜찮겠죠?”

마크의 물음에,


“물론이죠.”

흔쾌히 대답했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크리스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하고 하지.”

“예?”

마크가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아델은 내 약혼녀니까 내가 대리인의 자격으로 대신 포옹해주지.”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백작.”

마크가 질겁하며 물러나자 크리스틴은 더 짓궂게 다가들었다.


“사양하지 말게. 작별의 키스도 대신 해줄 수 있어.”

“돼, 됐습니다, 백작.”

“아델이 섭섭해할 거야. 사양은 사양하지.”

어느새 전세가 역전되어 크리스틴이 마크를 놀리는 재미에 빠진 것 같았다.

아이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아델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이럴 때 보면 덩치만 컸지, 제이드와 폴린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두 남자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아델이 먼저 저택을 나왔다.



“지금 떠나시는 건가요?”

돌아보니 쥬디가 다가오고 있었다. 쌀쌀한 새벽이라 잠옷 차림에 커다란 숄을 걸친 모습이었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잠을 깨웠나 보네요.”

“아뇨, 오늘따라 일찍 눈이 떠지더라고요.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랬나 봐요.”

아델은 쥬디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얼굴을 보고 떠나게 되니까 좋네요. 고마웠어요, 쥬디.”

“죄송했어요, 아가씨.”

“뭐가요?”

쥬디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멋쩍게 말했다.


“좀 미워했거든요. 질투도 했고. 하지만 두 분의 행복을 빌어요. 진심으로.”

“나도 쥬디를 응원하게요. 꼭 잘 될 거예요.”

놀란 듯 쥬디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고…… 계셨어요?”

아델이 눈을 찡긋했다.


“아마 본인 빼곤 다 알걸요?”

“헉, 난 몰라!”

울상이 되어 뺨을 감싼 쥬디를 뒤로하고, 아델은 정원 한가운데 서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며 저택이 고즈넉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뽀얗게 내려앉은 안개와 만개한 봄꽃들, 나무들에 둘러싸인 것이 그림 같았다.

쾌청하게 들려오는 새소리에도 아이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으리라.

평온한 그 풍경에 아델의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오랫동안 평온, 행복, 여유, 웃음…….

그런 단어를 들으면 이 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

마크의 저택을 나온 크리스틴 일행은 점심 무렵 마차를 멈췄다.

작은 시골 마을의 허름한 여관 앞이었다.

크리스틴은 아델과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짐머와 제니퍼가 그들을 호위하듯 뒤따랐다.

여관의 홀 한가운데는 검은 옷의 이자벨이 앉아 있었다. 그녀 주위를 검을 찬 기사들 서너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어서 와요, 백작. 아델 양.”

크리스틴과 아델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공작님의 일은 안됐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이자벨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며칠 사이 얼굴이 많이 초췌해졌지만 그래도 표정이 밝았다.


“덕분에 임종을 지킬 수 있었어요. 고맙게 생각해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

이자벨의 상냥한 물음에 크리스틴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황제와 공작가의 싸움을 관망할까 합니다. 제겐 그편이 더 이득이라.”

“무책임하군요!”

힐난하는 이자벨을 향해 크리스틴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 루스울프로 돌아갈 거고 누가 이기든 상관없습니다. 이 의미 없는 싸움에 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 사람이 내게 있다면요?”

“그게 무슨?”

“열어봐요.”

이자벨은 그에게 작은 펜던트를 내밀었다. 가볍고 정교하게 세공된 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딸깍!

무심하게 작은 단추를 누르던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

같이 펜던트 안을 들여다보던 아델도 깜짝 놀랐다.

펜던트 안의 초상화 속에 있는 것은 크리스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매우 닮은 얼굴.


“아…… 빠?”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돌렸다.

파리한 얼굴의 소녀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그렁해진 두 눈은 크리스틴과 똑같은 청회색이었다.


“이 정도면 당신의 사람이 분명하겠죠?”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이자벨은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상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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