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크리스틴의 숨겨둔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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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크리스틴의 숨겨둔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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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크리스틴의 숨겨둔 딸?
2023.01.09.
여관의 객실 안.
“진짜 놀랐습니다. 저렇게 다 큰딸을 숨기고 계셨다니!”
제니퍼가 놀리듯 큭큭 거리자, 짐머도 조용히 한마디 했다.
“저 나이의 딸이라면 도대체 몇 살 때 사고를…….”
스르릉!
결국 크리스틴이 험악하게 레이피어를 빼 들자,
철썩!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델이 그의 등짝을 때렸다.
그 엄청난 행동에 제니퍼와 짐머는 깜짝 놀랐지만, 아델은 한술 더 떠서 그를 나무라기까지 했다.
“다쳐, 장난 그만 쳐!”
제니퍼와 짐머는 웃음이 터질까 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크리스틴에게 다칠까 봐 칼을 못 들게 한다니.
“쳇!”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칼을 집어넣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구경났나?”
“아뇨, 구경이라기보단 저희도 단장님이 걱정되어서 그렇죠.”
제니퍼가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짐머도 한마디 했다.
“숨겨둔 따님을 들키셨으니 단장님이 무사할까 싶기도 하고.”
“아주 판박이였습니다.”
제니퍼와 짐머는 죽이 맞아 크리스틴을 놀려댔다.
“제 눈엔 굉장히 재미있어 하는 걸로 보이네요.”
두 사람이 아델을 돌아보자 그녀가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어렸을 때부터 크리스를 놀리던 녀석들을 어떻게 혼내줬는지.”
그러자 크리스틴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고,
아델은 허벅지의 가터링에 꽂혀 있는 피스톨을 뽑았다.
“나라면 당장 도망치겠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니퍼는 방문을 부술 듯 뛰쳐나갔고,
짐머는 어느새 창문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당신 부하들 말이야, 갈수록 귀여워지는 거 같아.”
피스톨을 다시 집어넣으며 그녀가 픽 웃었다.
“나는?”
“당신은 원래 귀염둥이지.”
“별말을 다 듣는군.”
그러면서도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붕대 갈아줄 테니까 옷 벗어봐.”
아델은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떠나기 전 마크가 이것저것 의료용품들을 담아서 챙겨준 것이다.
“환자니까 당신이 벗겨줘.”
“귀여운 데다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아델은 그의 셔츠를 벗기고, 상처를 감은 붕대도 풀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화살에 맞았던 상처는 거의 다 나았지만, 스톤에게 물어뜯긴 상처는 피와 진물이 엉켜있었다.
무리하면 상처가 다시 벌어질 거라던 마크의 말대로였다.
아침에 붕대를 갈 때보다 좀 더 심각해 보였다.
“왜?”
“너무 무리해서 움직였나 봐.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는 게 좋겠어.”
“괜찮아. 이러다 금방 나을 거야.”
옷을 벗겨달라던 크리스틴은 어느새 스스로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아델이 해준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걸 알기에 아델도 모른 척했다.
“그런데 그 레아나라는 아이 말이야. 어떻게 된 걸까?”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아델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얘기를 꺼냈다.
조금 전 크리스틴을 아빠라고 불렀던 레아나는 그 뒤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런 레아나를 이자벨이 데리고 가버렸다.
결심이 서면 다시 얘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한 열다섯? 열여섯쯤 됐을까? 당신이랑 많이 닮았던데. 그 아이도, 그 펜던트 속의 인물도.”
“음.”
“그럼 당신 혈육일지도 모르잖아. 궁금하지 않아? 어딘가에 당신 일족이 더 살아 있을지…….”
“그랬다면 교황청에 쫓기고 있겠지. 그 아이처럼.”
크리스틴은 셔츠를 다시 챙겨 입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레아나에 관한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뜻.
“난 당신이 그 아이를 보호해줬으면 좋겠어. 교황청에 쫓기고 있다잖아. 많이 아파 보이던데.”
아델을 내려다보며 그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모았다.
“아델. 우린 예정대로 루스울프로 갈 거야. 거기서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면 돼. 그린힐은 곧 내란으로 위험해질 거고.”
“응, 나도 루스울프로 갈 거야. 타냐도 핸리도 지금쯤 그곳으로 가고 있을 거고, 다들 보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내란까지 안 가게 선황후를 도울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함께 루스울프로 가면 더 좋겠어.”
“됐어. 이 얘기는 끝.”
크리스틴의 선언에 아델은 더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자신들의 행복만 생각하기로 했던 결심.
***
에이프릴의 침실.
“핫, 폐하!”
얀을 본 시녀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식사는?”
음식이 잔뜩 차려진 왜건을 보며 시녀들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통 안 드시네요.”
“알겠으니 모두 나가거라.”
그녀들이 얼른 인사를 하고 나가자 침실 안에는 에이프릴과 얀, 둘만 남았다.
“죽을 작정인 게냐?”
얀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에이프릴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요 며칠 먹지도 않고 누워 있기만 했다.
스톤이 늑대 일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얀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놈이 그런 짐승이라는 걸 몰랐다. 그랬으면 네 짝으로 어림도 없었을 거다.”
등을 돌리고 누운 에이프릴에게선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뇨. 아바마마는 황좌를 얻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절 먹잇감처럼 던져주려 하셨겠죠.”
에이프릴의 말에 얀은 분노가 치밀었다.
수치스러움 때문이었다. 딸아이에게 자신의 추악한 밑바닥까지 모두 들켰으니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너였다! 잊었느냐? 바이스 백작의 아이를 밴 척해서 날 망신시키더니, 이젠 그런 짐승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대체 어디까지 아비를 부끄럽게 만들 생각이야!”
얀의 고함에 에이프릴도 발끈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건 아바마마를 도우려고 한 거예요! 임신은 거짓…….”
“시끄럽다! 놈의 감옥까지 찾아가서 함부로 몸을 굴리고. 매춘부들이나 할 법한 그런 짓을…….”
쨍그랑!
에이프릴은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물잔을 집어 던졌다.
“그래요, 아바마마의 딸은 매춘부예요.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얀은 울먹이는 딸을 보며 얼른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콰앙!
“젠장!”
복도로 나온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사실 그는 지금 몹시 불안했다.
크리스틴과 로드웰 공작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크리스틴과 스톤은 지금 행방조차 묘연했다.
그것도 하필 교황청이 있는 블루게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교황청에서 조사관이 파견 나온다는 연통을 받은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얀은 벌써부터 긴장으로 숨이 막혔다.
교황청에서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큰일이었다.
둘 다 부마로 거론될 정도로 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었다.
몰랐다고 발뺌한다고 먹힐까?
젠장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군!
“폐하…….”
그때 조심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얀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복도 그림자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마법사 케니였다.
“무슨 일인가?”
“최상급 마법사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
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오래전부터 최상급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마법으로 봉인된 ‘백지 문서’를 태워버려야 했으니까.
교황청의 조사관이 파견을 나온다는 소식에 제일 꺼림칙한 것도 그거였다.
사실 크리스틴이나 스톤이 늑대 일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숨겨줬다면 처벌만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백지 문서를 들키는 날엔…….
“그래, 마법사는 지금 어디 있지?”
“찾는 중입니다. 얼마 전 교황청의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는데, 그 힘이 조금씩 그린힐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나의 흐름에 다시 이상이 느껴진다면 금방 알아낼 겁니다.”
마나는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초자연적인 힘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찾게!”
“예, 폐하.”
케니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얀은 겨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군.”
***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사람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까지…….
붉은 불꽃에 삼켜지면서도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는 줄곧 레아나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
크르르르……! 크르르!
그러다 불꽃은 어느새 갈색 늑대로 변해 그르렁댔다.
갈색 늑대는 그녀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더니 침이 뚝뚝 떨어지는 아가리를 쩍 벌렸다.
너무 놀란 레아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서늘한 푸른 빛이 눈앞으로 날아들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꺅!”
쨍그랑!
레아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푸른 빛도, 갈색 늑대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온통 땀으로 범벅 된 채 화려한 침대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하아, 꿈이었구나…….”
레아나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교황청의 기도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오한이 밀려왔다.
짐승에게 물어뜯긴 사제들의 비명과 잔인하고 참혹한 광경들.
그리고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들던 갈색 늑대.
‘그때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함께 데려가 달라는 거였을까?’
하지만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으니 알 길이 없었다.
우습게도 그때 레아나를 구해준 것은 모리스였다.
물론 일부러 구해준 건 아니었겠지만.
레아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내 탓이야. 내가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금기를 저질러서…….”
그 일 이후 힘을 모두 소진했는지 마법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힘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침대 옆의 발코니 창이 산산조각 깨져 있는 걸 보면.
악몽을 꾸다가 공격 마법을 쓴 것이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밤하늘과 파르스름한 달빛이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대로 정말 다 괜찮아진 것처럼.
“깨어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검은 옷에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이자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엉망이 된 발코니 창을 본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마법도 깨어난 것 같고.”
“여긴 어디죠?”
“로드웰 공작가란다. 넌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었어.”
교황청에서 도망친 이후 줄곧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힘을 전부 끌어올려 마법을 쓰고 난 후유증인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와 너무나 닮았던 그 남자…….
“그…… 여관에서 본 남자는 누구죠?”
“바이스 백작 말이니?”
“바이스 백작…….”
“많이 닮았지? 펜던트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와.”
“…….”
크리스틴을 보는 순간 정말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섣불리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만일 늑대 일족이라고 해도 꼭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교황청에 잡혀 와 처형당한 늑대 일족 대부분은 동족의 배신으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 늑대 일족일걸.”
역시.
“너도 늑대 일족이니?”
“아뇨.”
“뭐, 난 상관없어.”
그러더니 이자벨은 레아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떨어진 것 같네.”
“……왜 내게 잘 해주세요? 쫓기는 걸 알면서도 숨겨주고.”
레아나가 청회색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럴 때는 정말 어린 소녀처럼 천진한 얼굴이었다.
저 커다란 창문을 산산조각내고, 교황청 사제들이 기를 쓰고 찾는 살인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럴수록 이자벨에겐 이 아이가 매우 중요해졌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불신 가득한 레아나의 표정을 보며 이자벨이 웃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면 네 도움이 필요할지 몰라서. 나는 곧 큰 싸움을 앞두고 있거든.”
“바이스 백작도 같은 편인가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만나고 싶니?”
“조금 궁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