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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늑대 일족의 아이는 태어나선 안 되니까 (99/155)


99화. 늑대 일족의 아이는 태어나선 안 되니까
2023.01.13.



 
로드웰 공작의 장례는 매우 조용히 치러졌다.

공작가의 가족 묘지에는 이자벨을 포함한 열 명 남짓의 귀족들이 둘러서 있을 뿐이었다.

외손자인 러스티스 대공조차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며칠 후에나 도착한다고 했다.

이자벨은 갑작스러운 공작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날까 봐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걸.


“그래도 귀족회에서 한 명도 오지 않았다니 놀랐어요.”

“전부 폐하의 만찬장에 갔겠죠.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청 조사관을 환영하는 자리니까요.”

“폐하께선 일부러 오늘로 날을 잡으신 거겠죠? 둘 중 한 곳을 택하라는 뜻으로.”

“너무 하신 처사죠. 명색이 귀족회의 수장이었는데 이렇게 초라한 장례를 치르게 하다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랍니다. 우리도 서둘러 돌아가요.”

묘한 일이다. 소리를 죽인 말일수록 귀에 더 잘 들려왔으니.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자벨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았는데도 마치 제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처럼 잘 들렸다.

하기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남편이었던 선황제를 땅에 묻던 날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의 눈치를 보았으니까.

그래도 그때는 아버지와 귀족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언젠가는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선황 시해의 진실만 밝혀낼 수 있다면, 변방으로 쫓겨난 아들을 다시 황좌에 앉힐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얀은 생각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했다.

결국 이렇게 아버지까지…….

얀 발렌시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주마!


“그 정도 살기라면 당장 전쟁터에 나가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이자벨은 얼른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공원묘지 안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뒤에 키가 큰 남자만 홀로 서 있을 뿐.

머리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그는 이자벨을 향해 간단히 묵례했다.


“레아나를 만나야겠습니다.”

“내 편이 되어 주기로 했나요?”

“편 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스울프로 가기 전에 정리는 좀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자벨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루스울프로 가겠다고 고집 피우던 크리스틴은 결국 다시 그린힐로 돌아왔다.

레아나를 데려가자는 아델의 설득도 있었지만,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 아이의 태생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그 아이의 아버지 얘기가.

그리고 얀을 더이상 살려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귀족회가 너무 쉽게 이자벨을 등 돌렸고, 교황청에서 조사관까지 파견된 마당에 놈을 이대로 두는 건 위험했다.

그래, 이건 결코 로드웰 공작가를 돕겠다는 것도, 레아나를 돕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

그러나 공작가로 돌아온 두 사람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뭐라, 황실에서 왔었다고?”

이자벨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시종장과 하인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저희가 아무리 막아도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자벨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맞춰 만찬을 연 것으로도 모자라, 저택을 비운 사이에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미리 어떤 기별도 없이!

아무리 황제라도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그게…… 갑자기 저희 모두 잠이 들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눈을 떴을 땐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그 아이도…….”

시종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자벨은 2층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레아나가 묵고 있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치자 뒤쫓아온 시종장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저희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잠들어 버렸다고밖엔. 얼굴 절반에 화상이 있는 자였습니다. 눈도 사람의 것 같지 않았고…….”

“마법에 당한 거네.”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이자벨이 돌아보았다.


“마법이라고요?”

“케니. 황제의 마법사입니다. 황제는 지금 최상급 마법사가 필요한 상황이라 레아나를 데려간 것 같군요.”

문가에 기대서 있던 크리스틴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물건들이 정돈된 그대로인 걸 보면 레아나가 순순히 따라간 것 같았다.


“황제에게 왜 최상급 마법사가 필요한 거죠?”

“그건 그 아이를 데리고 온 후에 얘기하죠.”

대답 대신 그는 다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방을 나갔다.

***

황실의 만찬장.

초저녁이 되기도 전에 황제의 만찬은 끝났다.

교황청에서 조사관으로 파견된 최상급 사제가 노골적으로 만찬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에 일절 손대지 않았고, 다가와 말을 거는 귀족들에게 무안을 주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는 금방 얼어붙었고, 귀족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칼라임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다들 여유가 넘치는군요.”

“그리 봐주니 감사하오.”

비꼬는 게 분명했지만 얀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과 친절한 태도로 대꾸했다.

모리스라는 이름의 조사관은 스무 살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였다.

하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이 앳된 소년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교황의 홀이 놓여 있었다. 교황의 대리인이라는 뜻으로 교황청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그럼 이제 제 용건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요.”

이곳은 소연회장이었다. 만찬장의 분위기가 식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모두 나가게.”

얀은 시종들을 시켜 사람들을 내보내게 했다.

북적이던 소연회장 안에는 이제 단둘뿐이었다.


“며칠 전 폐하의 병사들이 블루게일의 숲을 휩쓸고 갔다더군요.”

“반역자를 잡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그곳에서 늑대 일족이 발견되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갈색 늑대였죠.”

결국 스톤이 그들에게 발각되어 버린 것인가?


“사실은 그 반역자가 늑대 일족이었소. 그래서 우리도 체포해 교황청에 넘길 생각이었고.”

모리스는 테이블 위의 음료 잔을 들어 조용히 입가에 가져다 댔다.

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얀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대체 교황청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갈색 늑대의 몸에서 문신이 나왔습니다. S.T. 스톤 오스월드는 그 머리글자를 새겨넣는 버릇이 있다던데.”

젠장!


“그리고 그는 부마 예정자로 알고 있습니다만.”

모리스의 눈빛은 얀의 생각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진땀이 흘렀다.


“늑대 일족이라는 걸 알기 전의 일이오. 그래서 우리도 체포하려 했고.”

“다행이군요. 황녀님과 혼인 전이라서.”

“그러게 말이오.”

그는 음료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찰랑 흔들리며 기포가 올라왔다. 재미있다는 듯 들여다보던 그가 잔을 멈추며 물었다.


“황녀님께서 임신하신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얀은 펄쩍 뛰었다.


“절대 아니오! 대체 어떤 놈이 그딴 소문을!”

모리스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녀님은 당분간 저희가 모셔가겠습니다.”

“그 아이를 왜?”

탁!

단호하게 잔을 내려놓으며 모리스가 말했다.


“늑대 일족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아니라고 했잖소! 그저 혼인의 말이 오갔을 뿐이오! 결코 불미스러운 일 따윈…….”

그러다 얀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이 많아질수록 모리스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니까.

앳된 얼굴에 이토록 소름 끼치는 서늘함이라니.


“불미스러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교황청에 인도 해주십시오. 문제가 없다면 곧 돌려 보내드릴 것입니다. 교황 성하의 결정이니 따르시지요.”

이건 교황청의 명령이라는 뜻.

따르지 않는다면 교황청과 대적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

한 나라의 황제였음에도 얀은 도저히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늑대 일족을 찾으십시오.”

얀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또 한 명의 늑대 일족?”

“갈색 늑대는 일족에게 공격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숲에 분명히 또 다른 늑대 일족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폐하께서 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너구리 같은 자식!

얀은 속으로 욕설을 날렸지만 한편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지금 그가 가장 우려하는 일은 크리스틴이 이자벨과 손잡는 것이다.

그런데 교황청이 그를 제거해준다면…….


“힘닿는 데까지 찾아보겠소.”

하지만 섣불리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협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레아나를 태운 마차가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황궁인가요?”

끝없이 펼쳐진 화려한 정원과 거대한 대리석 건물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원 곳곳에 불이 밝혀지고, 수백 개의 화려한 창문도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교황청이 웅장하면서도 엄숙한 남성이라면, 황궁은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 같았다.


“그래, 폐하께서 널 몹시 만나고 싶어 하신다.”

“왜요?”

레아나가 빤히 쳐다보자 맞은편에 있던 케니는 저도 모르게 후드를 깊이 내렸다.

지금껏 자신의 흉한 몰골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본 사람은 없었으니까.

특히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일쑤였다.


“네 능력이 필요하시니까. 폐하를 돕는다면 교황청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마.”

레아나의 예쁜 얼굴에 가느다란 조소가 스쳤다.


“폐하께선 교황청을 이길 수 없는걸요.”

“무례하구나!”

가뜩이나 무시무시한 얼굴의 케니가 소리쳤지만, 레아나는 조금도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례는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나를 납치한 당신이 저지른 거죠.”

케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네가 순순히 따라온 걸 잊었나?”

“그러지 않았으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쳤을지 모르니까. 뭐, 그렇다고요.”

레아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널 찾으신다.

그 한마디에 레아나는 순순히 케니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가 공작가의 하인들을 모두 잠재울 수 있는 상급 마법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레아나는 지금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안 가겠다고 버티며 실랑이를 했다면 공작가의 하인들까지 다치게 할지도 몰랐다.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끔찍했다.


“어?”

창밖을 바라보던 레아나가 의아해하며 케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본궁을 지나, 어두컴컴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밝힌 불빛도 거의 없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북쪽 검은 성으로 간다.”

케니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고 높은 성채 하나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폐하를 만나는 거 아니었나요?”

“그쪽으로 오실 거다. 지금 교황청의 사제들이 와 있으니까.”

“……!”

“그들과 만나면 곤란하겠지?”

 

***



“이 아이인가?”

마차에서 내리던 레아나는 묵직한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는 만찬을 즐기다 온 것처럼 매우 화려한 차림이었다.


“예를 갖춰라. 폐하시다.”

케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레아나는 얀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당돌한 눈빛에 얀은 미간을 모았다.

이 오만해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뭣 하느냐, 고개를 숙이래도!”

케니의 호통에 얀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네가 교황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게 사실이냐?”

“소문일 뿐이에요.”

“상관없다. 네 능력으로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황궁에도 잡일꾼이 필요하세요?”

“뭐?”

“저는 교황청의 잡일꾼이었어요. 그러다 일이 싫어져서 몰래 도망쳤고요. 폐하께서 그런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하니까.”

얀은 어떻게 된 거냐는 얼굴로 케니를 바라보았다.


“최상급 마법사가 맞습니다, 폐하.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인 곳에 이 아이가 있었습니다.”

레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상급 마법사요? 제가 어딜 봐서요?”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케니가 소리쳤다.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레아나는 깜찍하게도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난 또 황궁에 취직하는 줄 알고 괜히 좋아했네. 그럼 잡일꾼이 필요 없으시면 전 그만 가봐야 할 거 같네요.”

두 사람을 뒤로하며 레아나가 돌아설 때였다.

슈욱!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 순간 레아나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퍼엉!

케니가 날린 불꽃은 레아나의 앞으로 떨어졌고, 그 자리에 더 이상 그녀는 없었다.

스스스…….

레아나가 다시 나타난 곳은 100미터쯤 떨어진, 검은 성으로 들어오는 길목.


“……!”

그리고 그녀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낯이 익은, 그러나 결코 만나고 싶지 않던 얼굴.


“뜻밖의 만남이란 이런 건가?”

“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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