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반갑군, 레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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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반갑군, 레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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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반갑군, 레아나
2023.01.16.
“뜻밖의 만남이란 이런 건가?”
“모리스…….”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레아나.”
모리스는 희고 예쁘장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두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채로.
“모리스 사제님!”
잠시 후 모리스의 뒤로 서너 명의 사제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레아나를 알아보더니 금방 경계하며 공격 대형을 갖췄다.
지금 레아나는 교황청의 1급 수배자였다.
기도실에서의 일은 철저히 함구 되었고, 사제들은 그녀가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놀라운데. 블루게일을 벗어났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황실까지 왔을 줄은.”
“교황청을 나오니까 내 힘이 필요한 곳이 꽤 많더라고.”
모리스의 웃는 얼굴을 향해 레아나도 방긋 웃어 주었다. 그의 차가운 눈을 노려보면서.
“어쩌지? 이제 다시 교황청으로 끌려가야 할 텐데.”
“가능할까?”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며 노려보는 동안 나머지 사제들은 기도로 신성 능력을 끌어올렸다.
잠시 후 사제들의 몸에 엷은 푸른 빛이 감돌았다.
그들을 돌아보며 레아나가 코웃음 쳤다.
“저들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들에게도 할 일을 줘야지.”
모리스는 사제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사제들을 감싼 푸른빛이 레아나를 향해 길게 쏘아지더니 친친 휘감기 시작했다.
파앗!
“গয়ৌঝ আ !”
하지만 레아나의 주문에 금방 바스러졌고, 사제들은 멀리 나가떨어졌다.
“하아, 하아!”
레아나에게도 타격이 있었는지 숨이 찬 듯 어깨를 가쁘게 들썩였다.
“닦아.”
그녀에게 다가온 모리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느새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렸나 보다.
“내가 그랬지. 넌 무식하게 힘을 낭비한다고.”
“닥쳐.”
레아나는 그의 손수건 대신 손등으로 피를 닦아냈다.
“근성은 정말 마음에 들어.”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으며 모리스가 엷게 웃었다.
“그래도 죄인을 봐 줄 수는 없지.”
그는 곧 엄숙한 표정으로 교황의 홀을 들어 올리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신을 염원하는 이들의 구원자여 부디 청하옵니다…….”
그가 나직하게 기도를 영창 하기 시작하자,
휘오오오…….
공기가 회오리처럼 휘돌더니 순식간에 레아나를 휘감았다.
“꺅!”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레아나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주문을 외자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회오리에 모두 흩어져버려서 소용없었다.
“발버둥치지마 레아나. 그럴수록 네 고통만 커질 테니.”
“개자식!”
모리스는 소리를 더욱 높여서 주문을 영창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이 당신을 통해 이곳에 증거 되오니…….”
그 힘에 저항하느라 레아나는 이제 코뿐만 아니라 입가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지듯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다른 사제들은 두 사람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모리스가 교황을 능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잔인한 거 아닌가? 이대로라면 저 아이의 생명까지…….”
“뭐가 잔인해. 저 애가 사제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죽였는지 몰라? 똑같이 해줘야지.”
모리스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서서히 눈을 뜬 그는 쓰러진 레아나를 노려보며 마지막 기도 주문을 마감했다.
“멸하소서!”
슈카악!
그 순간 엄청난 힘이 모리스를 향해 날아왔다.
눈앞을 스치는 날카로운 칼날.
“윽!”
그는 재빨리 피했으나 어깨에 뜨거운 통증을 느끼며 교황의 홀을 떨어트렸다.
새하얀 사제복이 어느새 피로 젖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슈카악! 슈칵!
사나운 공격이 다시 목으로, 허리로 이어지며 그를 몰아붙였으니까.
사제들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기도를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둠 속에서 모리스를 공격하는 그림자는 너무 빨라서 대상을 특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방어진을 펼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는 동안 모리스는 주위의 나무와 조각상들 사이로 허겁지겁 피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결국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모리스 사제님!”
사제들의 비명을 들으며 그는 눈을 감고 나직하게 기도 주문을 외웠다.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구하소서!”
이제 칼날이 제 몸을 베려고 한다면 불길에 휩싸이게 되리라.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서 죽일 듯 공격해오던 칼날은 사라지고, 키가 큰 남자가 레아나를 말에 태우고 있었다.
“젠장, 막아!”
그의 외침에 사제들이 우르르 달려갔지만 소용없었다.
말에 훌쩍 올라탄 남자는 고삐를 흔들며 바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
모리스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인 남자의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다.
“……!”
어두운 밤하늘에 나부끼는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
날렵한 옆모습과 서늘한 청회색 눈동자.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이오.”
황제의 목소리에 모리스가 돌아보았다.
“저자가 말이오……?”
모리스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시인과 기자들이 끊임없이 칼라임의 전쟁 영웅에 대해 떠들어댔으니까.
“그리고 사제께서 찾던 또 다른 늑대 일족이기도 하고.”
“그런 것 같군요.”
그는 레아나의 펜던트 속에 있던 그녀의 아버지와 매우 흡사했으니까.
크리스틴 바이스!
오늘의 이 치욕은 몇 배로 갚아주마!
모리스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며 다짐했다.
***
“뭐, 주치의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조금 전 시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에이프릴은 깜짝 놀랐다.
“네, 조금 전 댁에서 자살하셨다고.”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주치의는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운 에이프릴에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며 웃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자살이라니.
“얼른 외출준비를 해 줘. 조문을 다녀와야겠어.”
장례식장에 가기 전엔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황후가 들어왔다.
“어마마마!”
시녀들은 얼른 치마를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둘이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나가도록.”
“예, 황후 폐하.”
둘만 남게 되자 황후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마마마, 제 주치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지금 당장 황궁을 나가거라.”
“예, 그게 무슨?”
“짐은 대충 꾸려서 마차에 실어놨으니 넌 옷만 갈아입고 나와. 수수하고 눈에 안 띄는 옷으로, 머리도 올리는 편이 좋겠다. 누가 묻거든 레온 남작 부인이라 말하고.”
황후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에 에이프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더러 지금 어딜 가라고……?”
“이쪽에 경험이 많은 의사라고 하니 너무 걱정 말아라. 여긴 당분간 세이라가 대신 있을 거다.”
“의사라니요?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기겁하는 에이프릴을 황후가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교황청에서 이미 다 알아버렸으니 어쩌겠어! 네가 스톤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당장 끌고 가려는 걸 폐하께서 겨우 시간을 벌었다.”
그제야 에이프릴은 자신의 주치의가 자살이 아닌 타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는 딸이 늑대 일족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감춰야 했다.
그러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주치의를 죽인 것이다.
“아바마마께서 묻거든 제가 임신했다고 해주세요. 이게 다 폐하를 위한 일이니 절 믿어주세요. 나중에 경의 공은 잊지 않을게요!”
전부 나 때문이야.
내 거짓말 때문에!
에이프릴은 주치의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니에요, 어마마마. 전…… 오스월드 후작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어요. 아바마마를 도우려고…….”
짜악!
황후의 매서운 손찌검이 날아왔다.
“정신 차려! 놈은 늑대 일족이야. 네가 놈의 아이를 임신한 게 알려지면 아바마마와 네 동생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어. 빨리 나오거라.”
“어마마마……!”
결국 황후는 문밖에 대고 시녀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에이프릴의 옷을 갈아입히고 후문으로 데리고 나오너라.”
늦은 밤, 마차 한 대가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갔다.
술병을 든 채 창가에 서 있는 얀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크리스틴에게 어깨를 베인 모리스는 지금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교황의 대리인을 상하게 한 건 교황청과 전쟁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감히 늑대 일족이.
이런 상황에 에이프릴이 늑대 일족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들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이틀 후.
인적이 드문 숲에 위치한 이 저택은 견고한 요새 같았다.
높은 담장과 육중한 철문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풍겼다.
그르르릉.
크리스틴이 말을 몰아 저택 앞으로 다가오자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곳은 제니퍼와 W.G 제 1기사단이 비밀 훈련을 하던 저택이었다. 아델이 사격 연습을 하던 곳이기도 했고.
이틀 전 레아나를 황궁에서 데려온 일로 그린힐 전체에 두 사람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황제가 아닌 교황청의 명령.
이제 칼라임은 물론 주변국까지 크리스틴이 늑대 일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가 사악한 마법사와 손잡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수도 그린힐은 이미 봉쇄되었고, 교황청 소속 기사단이 속속히 그린힐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자벨과 손잡을 것을 우려해서인지 황제는 로드웰 공작가 주변에 자신의 군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조만간 이 저택도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어디 갔었어?”
크리스틴을 태운 말이 정원으로 들어오자 아델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녀는 요사이 사격 연습에 검술 연습까지 하고 있었다.
머리도 질끈 묶고 셔츠에 바지 차림이 예쁘장한 소년 같았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당신이 있었을까봐 그러지.”
크리스틴은 걱정하는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아델, 잠시만 가까이.”
“응?”
초옥!
말에 올라탄 채로 상체를 숙여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뭐야. 사람들이 보잖아…….”
발그레해진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살며시 눈을 흘겼다.
“누가 보는데?”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아이고 하늘 한번 참 좋다!”
“무슨. 먹구름이 잔뜩 꼈는데.”
제니퍼와 짐머는 오늘의 날씨에 관심을 기울이며 딴청을 부렸다.
훈련 중이던 다른 기사들도 모른 척 슬그머니 물러났다.
“키스할 걸 너무 약했나?”
“미쳤어.”
눈을 흘기던 아델은,
초옥!
재빨리 그의 목을 끌어당기며 입맞춤했다.
“저기…… 지금 내가 당한 거……?”
“무슨 소리야. 장난 그만치고 얼른 와봐. 레아나가 깨어났어.”
아델은 언제 무슨 짓을 했냐는 듯 그를 재촉했다.
그날 황궁에서 구해온 레아나는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해하며 말에서 내리는 크리스틴의 뒤에서,
“당한 거 맞으십니다.”
“모르면 바보죠.”
짐머와 제니퍼의 속삭이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심각하게 흐르는 것과 상관없이 이곳의 시간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다들 정해진 시간에 훈련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가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서.
그래서 아델은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몰랐다.
레아나와 크리스틴이 교황청과 황제에게 쫓기는 중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델에게 상황을 알리지 말라고 그가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