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크리스틴의 앙숙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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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크리스틴의 앙숙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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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크리스틴의 앙숙 출현
2023.01.20.
크리스틴과 아델을 보자 레아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바이스 백작님.”
요 며칠 많은 일을 겪은 레아나는 안쓰러울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에 입술은 갈라지고 부르튼 채로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이렇게 작고 어린 소녀가 교황청 사제들을 상대로 싸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몸은 좀 어때?”
크리스틴과 꼭 닮은 청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가 대답했다.
“당장 백작님과 싸울 수 있을 정도예요.”
“지금 나랑 싸우겠다고?”
“농담이 안 통하는 분이시네요.”
크리스틴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농담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아이로 인해 루스울프로 돌아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교황청에 쫓기게 되었고, 얀을 죽이는 것도 쉽게 않게 되었다.
이 아이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엉망으로 꼬여버린 것이다.
그의 속도 모르고 레아나는 천연덕스럽게 혀를 찼다.
“유머 감각이 없는 남자는 여자들이 싫어해요.”
결국 크리스틴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모리스가 왜 널 그렇게 죽이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
“뭐라고요?”
이번엔 레아나의 눈썹도 치켜 올라갔다.
옆에서 불안하게 지켜보던 아델은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두 사람이 어쩜 이렇게 거울처럼 닮았는지 몰랐다.
오만한 표정에 인상을 쓰는 모습과 괴팍한 성격까지도.
“그만. 이러다 싸우겠어.”
아델이 만류하자,
“내가 이런 꼬맹이랑 싸운다고?”
“내가 이런 아저씨랑 뭐 하러 싸우겠어요?”
“둘 다 그만 안 해!”
합창하는 그들을 향해 아델이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두 사람이 움찔하며 상황이 진정되었다.
아델은 다시 상냥한 모드로 돌아와 나긋하게 웃었다.
“자, 그러니까 이제 둘이 얘기를 나누라고. 싸우지 말고. 알았지?”
“역시 백작님의 연인이시네요.”
중얼거리는 레아나를 보며 아델이 살벌하게 웃었다.
“그거 칭찬 맞지?”
“그, 그럼요.”
그러는 동안 크리스틴은 드르륵 의자를 끌어다가 레아나의 앞에 앉았다.
“그 펜던트 속의 인물에 대해서 말해봐. 지금 살아 있나?”
불쑥 들어오는 질문.
그토록 당돌하던 레아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크리스…… 취조하는 것 같잖아.”
아델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는데 대답이 들려왔다.
“아빠는 화형당하셨어요. 교황청에 붙잡혀서.”
“늑대 일족이라서?”
레아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일족들의 행방이나 연락처 같은 건 알고 있나?”
“전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크리스틴은 왠지 기운이 빠졌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레아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델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설마 이 아이가 조카라는 건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사람은 거울처럼 너무 닮았다.
특히 크리스틴은 소년이었을 때 계집애라며 놀림을 받곤 했었다. 그때 모습이 지금 레아나의 얼굴과 흡사했다.
그와 똑같은 청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레아나가 덧붙였다.
“아빠가 어렸을 때 교황청의 습격을 피해 도망치면서 임신한 어머니와 헤어졌다고……. 그래서 늑대 일족이 붙잡혔다는 소식만 들리면 교황청에 달려가곤 하셨어요. 혈육을 만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며.”
크리스틴은 혼란스러웠다.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혈육이었으니까.
그럼 어머니는 자신을 임신한 채로 교황청을 피해 도망쳤다는 건가?
그 과정에서 어린 아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참혹한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너희 어머니는? 그녀도 늑대 일족이라서 죽임당했나?”
“엄마는 최상급 마법사였어요. 10년 전쯤 어떤 귀족에게 살해당했고요.”
“안됐군.”
“오스월드 후작이라는 사람이 그랬다고 들었어요.”
“……!”
뜻밖의 이름에 크리스틴과 아델은 서로 쳐다보았다.
10년 전에 오스월드 후작이라면 죽은 전대 후작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습격을 받아 산송장이 된 것도 10년 전.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연관된 걸지도 몰랐다.
“혹시 오스월드 후작이 왜 그랬는지 아니?”
아델이 조심스럽게 묻자 레아나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너무 어렸을 때라 잘은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그 무렵 아빠와 엄마가 무슨 문서에 대해 자주 얘기하셨던 거 같아요. 굉장히 위험한 거라고…….”
크리스틴과 아델은 똑같이 중얼거렸다.
“백지 문서……!”
***
크리스틴은 저택의 야외 계단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멀리 기사단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해?”
아델이 다가가 옆에 앉자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냥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당신에게도 다른 가족이 있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예전에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지. 그때 듣긴 했어. 임신한 어머니를 아버지가 거둬준 거라고. 그리고 나를 낳자마자 사라져 버렸다고. 소문처럼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간 게 아니니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지.”
그는 먼 곳을 아련하게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아델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늑대 일족이라는 게 밝혀지면 아이까지 위험해질까 봐 사라진 것이리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시지 않을까? 레아나의 말대로라면 아직 교황청에 잡히시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어딘가…….”
“됐어. 평생 그리워한 적도 없던 사람이야. 이제 와서 새삼.”
조금의 기대도 하고 싶지 않은 얼굴. 그건 실망할 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거짓말.”
아델의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은 그립잖아. 얼굴도 모르지만 피를 나눈 혈육이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살리신 분이니까.”
“그런가?”
픽 웃더니 그는 옆에 놓아둔 술병을 들이켰다.
“그럴 거야. 특히 당신처럼 계속 이방인으로 살아왔다면.”
아무리 아델이라도 그 허기는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소외감은.
“…….”
아델은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당신 어머니를 대신해서야. 이렇게 잘 살아줘서, 멋진 사람이 되어줘서 기특하고 고맙다고.”
“하.”
“분명 당신을 만나면 그렇게 말씀하실 테니까.”
그는 미간을 잔뜩 모았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어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실망하게 될까봐 기대하지 않는 건 당신답지 않아. 우리,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백지 문서가 뭔지 밝혀내고, 어머니도 찾고.”
그동안 크리스틴은 유순한 강아지처럼 아델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고 있었다.
“저, 단장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등 뒤에서 짐머가 모기 만한 소리로 부르자 아델이 얼른 돌아보았다.
“뭔가?”
크리스틴은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매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죠셉이란 자가 급히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동생의 일기장을 찾았다고.”
죠셉의 동생은 스톤의 죽은 아내였다.
크리스틴과 죠셉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오스월드가의 비밀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다. 숨겨둔 일기장에 그걸 적어 놓았을지도 몰랐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계단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는 걱정스러워하는 아델을 보았다.
“염려 마. 당신에게서 위로받았으니 이제 힘내서 움직여야지. 백지 문서에 대한 비밀도 알아내고.”
“응. 몸조심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내 걱정이야.”
“자만하지마. 환자 주제에.”
그러자 크리스틴은 몸을 숙여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환자지만 오늘 밤은 만족시켜줄 수 있는데.”
“뭐래…….”
씩 웃으며 돌아서는 그는 언제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바쁘게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델은 한숨을 쉬었다.
백지 문서.
그것 때문에 레아나의 부모님과 오스월드 후작이 잘못된 걸까?
그렇다면 더이상 파고들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델이 오스월드가에서 그것을 갖고 나온 것부터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은 일들이 이렇게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
에이프릴의 화려한 침대는 사방에 커튼이 내려와 있었다.
잠시 후 흰옷의 여사제가 커튼이 쳐진 침대에서 나왔다. 교황청 소속의 의료 사제였다. 황녀의 임신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온 것이다.
의료 사제는 침실 옆, 응접실에 앉아있는 모리스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와 마주 앉아있던 황제 부부는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모리스의 예리한 눈빛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확실히 해둘 할 문제라서 결례를 저질렀으니 양해하십시오. 황녀님께도 그리 전해주시고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치켜든 채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아니요. 이렇게 우리 에이프릴의 불명예가 씻겨진다면 얼마든 협조하겠소.”
얀은 너그럽게 말했지만, 황후는 모리스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이제 오해가 풀리셨다면 어서 딸 아이의 방에서 나가주시지요.”
하지만 모리스는 오히려 찻잔을 조용히 입에 가져다 댔다.
“양해하십시오. 제가 거동이 불편한 환자라서.”
그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크리스틴에게 다친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던 것이다. 의료 사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팔 한쪽을 잘라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모리스의 한 마디에 황제 부부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얀은 불안이 깃든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뭐가 말이오?”
“듣기로 황녀님은 앳되고 귀여운 외모라던데…….”
“그럼 제 외모가 어떻게 보이시죠?”
그때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세이라가 다가왔다.
에이프릴을 몰래 빼돌린 황제 부부는 그 자리에 세이라를 앉혀놓은 것이다.
세이라가 요염하게 쳐다보며 눈웃음치자, 모리스는 뺨을 붉히며 괜히 헛기침했다.
“흠흠!”
그의 표정이 흔들린 걸 세이라는 금방 알아챘다. 자신을 본 대부분 남자와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으니까.
“뭐, 외모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인 거니까요.”
모리스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녀는 자신의 하얀 목덜미를 괜히 한 번 쓸어내렸다.
“앳되고 귀여운 외모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가슴 떨리도록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죠. 제 눈엔 사제님이 그러신걸요.”
그 표정과 말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다들 당황했다.
드레스는 심하게 패여서 가슴골이 보이기까지 했다.
“모리스 사제님.”
보다 못한 의료 사제가 정신 차리라며 주의를 환기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세이라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특히 그녀의 풍만한 가슴 언저리에 노골적으로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군요. 황녀님은 제가 본 여인 중 가장 매력적입니다. 황제 부부께서 따님을 애지중지하실 만합니다.”
황제 부부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그가 세이라에게 반한 분위기였다.
사제들의 결혼은 금지였지만 애인을 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혼외 자식들 얘기까지 공공연하게 들리곤 했다.
그러니 모리스가 세이라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이건 매우 좋은 기회였다.
“그럼 모리스 사제께서 딸 아이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 우린 이만…….”
얀과 황후는 서둘러 일어나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른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이었다.
딸칵!
모리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용건은 아직 안 끝났으니 앉으시지요.”
사람들이 멈칫하자 그는 문 앞에 있는 시종을 향해 말했다.
“밖에 있는 손님을 모셔오게.”
“밖에 있는 손님이라니?”
얀의 물음에 모리스는 조용히 웃었다.
“모처럼 마련한 자리이니 이자벨 선황후를 초대했습니다.”
동시에 응접실 문이 활짝 열렸다.
또각또각.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이자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상복 차림이었다. 얼굴까지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서 어딘가 음산하기까지 했다.
얀에게 로드웰 공작의 죽음을 항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