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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배신자는 거짓말에 속는다 (102/155)


102화. 배신자는 거짓말에 속는다
2023.01.23.



 
또각또각.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이자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상복 차림이었다. 얼굴까지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서 어딘가 음산하기까지 했다.

얀에게 로드웰 공작의 죽음을 항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얀이 얼른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모리스에게 다가갔다.


“모리스 사제님이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리스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히 인사했다.


“공작님의 일은 안됐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감금되어 있던 저택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드려요.”

황제의 병사들이 로드웰 공작가를 둘러싼 걸 비꼬는 것이다.


“감금이라니요!”

황후가 발끈했지만 이자벨은 그녀의 말도 무시했다.


“미력한 힘이지만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모리스 사제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교황청의 일은 교황청에서 해결할 것입니다. 오늘은 두 분께서 풀어야 할 일이 있으실 것 같아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내란이나 전쟁을 중재하는 것도 교황청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말로 해서 풀릴만한 사안이 아니랍니다. 안 그런가요, 폐하?”

이자벨이 얀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사제님이 계신 자리니 말씀을 가려 하십시오. 형수님.”

“왜요, 내 남편과 내 아버지를 죽인 게 폐하라고 말할까 봐?”

“형수님!”

콰앙!

얀이 테이블을 사납게 내리쳤다.

그러자 이자벨은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베일을 천천히 걷으며 웃었다.


“더 얘기하면 저도 소리소문없이 죽일 건가요?”

얀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이자벨에게 달려들어 목을 내려칠 기세였다.

하지만 모리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얀은 한껏 슬픈 얼굴로 모리스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선황제인 형님이 돌아가신 후로 형수님은 제정신이 아니오. 게다가 최근엔 부친의 상까지 치렀으니……. 그만 형수님을 쉬게 하는 게 좋겠소.”

그리고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얼른 끌고 나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이자벨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멈칫하는데 웃음을 그친 그녀가 세이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에이프릴.”

그녀의 반응에 황제 부부는 오히려 당황했다.

정말 몰라본 건가?

조금 전까지 모리스의 옆에 있던 세이라는 구석 장식장으로 가서 찻잔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자벨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위해서였다.

에이프릴의 옷을 입고, 똑같은 금발 머리였으니 몰라본 걸지도…….


“예, 안녕하세요, 큰어머님.”

세이라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시 장식장을 향해 돌아섰다.

이자벨이 그런 세이라의 뒷모습을 매섭게 응시했다.


“그런데 넌 갈수록 세이라를 닮아가는구나.”

멈칫!

세이라는 하마터면 정리하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너는 세이라가 될 수 없단다. 세이라가 네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이자벨은 다시 황제 부부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 웃음은 협박이었다.


“사제님께서 모처럼 마련해주신 자리이니 폐하와 단둘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괜찮겠죠, 폐하?”

찻주전자를 들어 우아하게 찻잔을 채우며 이자벨이 말했다.

***

황제는 모리스와 사제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보냈다.

응접실엔 얀과 이자벨 둘만 남았다.


“속셈을 말해보시지요, 황녀가 가짜라는 걸 모른 척 한 이유.”

얀의 말에 이자벨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예전에 내 딸애가 쓰던 방이었지요. 뭐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었지만.”

“그 애가 병에 걸려 죽은 것도 내 탓이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 애는 많은 사람의 사랑 속에 떠났답니다. 작별 인사도 하고.”

이자벨은 쓰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 아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보내게 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

“내겐 이제 그 애 하나뿐이거든요.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려고요.”

얀을 응시하는 이자벨의 갈색 눈동자는 유난히 어두웠다.

증오, 원망, 결의, 각오…….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 늪처럼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얀은 그 선전포고를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능청스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러스티스 대공은 아주 건강하게 잘 있지 않습니까.”

“그럼요. 에이프릴도 아주 건강하게 잘 있죠.”

의미심장한 말에 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이자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은 베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에이프릴은 지금 내가 데리고 있어요.”

콰당!

황제가 급하게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이자벨도 자리에서 일어나 얀을 노려보았다.


“당장 내 집을 둘러싼 병사들부터 철수시켜요. 그리고 차근차근 협상해보죠.”

또각또각.

응접실을 나가는 이자벨의 뒤에서 섬뜩한 얀의 음성이 들려왔다.


“형수님이 지금 데리고 있는 그 애는 내 딸이 아닙니다. 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리고 감히 황제에게 맞선 대가는 피눈물을 흘리며 치르게 될 겁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천천히 돌아서는 이자벨은 베일 속에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백지 문서.”

 

 
순간 오만하던 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아아…… 딸보다 더 중요한 거였군요. 그럼 이만.”

이자벨은 양손으로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이제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

깊은 밤, 얀은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 안의 시종들과 교황청의 사제들도 대부분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그는 커튼을 닫고, 책상 위에 작은 촛불 하나만 켰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행동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러고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었다.

묵직한 서랍 안에는 온통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서랍을 닫았다가 열자, 마법처럼 잡동사니가 사라지고 붉은 두루마리 하나가 나타났다.

비밀스러운 장치로 서랍의 공간을 나눠 놓은 것이다.

붉은 두루마리를 확인한 얀은 그제야 나직하게 안도했다.


“그래, 여기 이렇게 있는데. 괜한 소리!”

낮에 이자벨이 백지 문서를 언급했을 때부터 계속 불안했다.

혹시 그녀의 손에 들어간 게 아닐까?

하지만 사제들이 조사한다며 황궁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감히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자벨은 백지 문서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걸까?’

‘아니, 크리스틴 그놈의 얘기를 듣고 괜히 한번 떠본 게 분명해.’

자칫했으면 꼼짝없이 걸려들 뻔했다.

그가 다시 붉은 두루마리를 집어넣으려고 할 때였다.

휘오오오.

한 줄기 바람이 불며 커튼 자락이 팔락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켜둔 촛불이 스르르 꺼졌다.

분명 창문을 닫아두었는데…….


“누구냐!”

섬뜩한 기분에 얀은 재빨리 벽에 걸린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서늘한 감촉이 손목에 닿았다.

조금만 더 손을 움직이면 베어버리겠다는 살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의 살기로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크리스틴 바이스?”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얀은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늦은 시간 찾아온 걸 양해 바라네, 오붓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감히 여길 어떻게……!”

그러면서도 얀은 재빨리 붉은 두루마리를 소매 속으로 감추려고 했다.


“그렇게 감추려고 애쓸 필요 없어. 가짜거든, 그건.”

“가짜라니 무슨……!”

크리스틴은 칼을 거두고 얀의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촛불이 꺼진 상태라 얀에게는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밤눈이 밝은 크리스틴은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아, 깜빡 잊고 말을 안 했군. 이미 예전에 바꿔치기했거든. 백지 문서를.”

“뭐?”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짐승이라서 말이야. 아델이 오랫동안 보관해 온 덕에 그 문서에서 그녀의 체취가 나거든.”

“거짓말. 그래도 황궁 경비가 그렇게 허술할 리…….”

“지금 교황청 기사들까지 쫙 깔렸는데도 이렇게 들어왔잖나.”

그리고 크리스틴은 얀의 책상 위에 올려진 액자들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려 쓰러트렸다.

황후와 에이프릴, 그리고 황자가 차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근위대장을 하다 보니 황궁의 비밀통로까지 손바닥처럼 훤히 알게 됐거든. 게다가 황제들만 다닐 수 있는 비밀통로까지 이자벨 부인이 가르쳐줬고. 덕분에 여기 들어오는 건 아주 쉬웠지. 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배신자! 결국 이자벨과 손잡았나?”

드르륵.

크리스틴이 일어나자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려왔다.


“얀, 발렌시아. 나는 지금껏 네놈에게 수많은 기회를 줬다. 네놈은 그때마다 내 뒤통수칠 궁리만 했지. 과연 누가 배신자일까?”

“내 판단이 옳지 못했던 건 인정하네. 칼라임을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그렇다면 더욱 당신이 나라를 다스리면 안 되지. 제 사람도 믿지 못하는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칠 신하는 없으니.”

“이봐, 다시 한번 기회를! 제발!”

얀은 애원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한번 돌아선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백지 문서는 이자벨에게 넘겼다. 마법사도, 에이프릴도, 그녀에게 있고. 그 문서가 세상에 드러나는 날엔 어떻게 될까?”

“아아……!”

어둠 속에서 얀이 비탄에 젖은 신음을 내며 책상을 움켜잡았다.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책상 위에 피스톨을 내려놓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다, 얀.”

달빛 아래에 은색 피스톨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 때문에 가족들마저 끔찍한 일을 겪겠지.”

“하아……! 하!”

얀은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은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 앞에 놓인 연약한 짐승처럼.

제국의 황제라며 영원히 오만할 것만 같던 그 남자가 말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모두 지켜보는 크리스틴의 표정에 자비라고는 없었다.


“하아…… 젠장…….”

하는 수 없이 피스톨을 집어 드는 얀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내 가족은…… 하아…… 지켜준다고…… 하아, 하아…… 약속해주게.”

“노력하지.”

크리스틴이 집무실을 빠져나오고 얼마 후,

타앙!

어둠 속에서 고요하고 자욱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

크리스틴이 훈련소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새벽하늘이 밝기도 전이었다.


“백지 문서야.”

그는 레아나의 방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붉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레아나는 눈을 비비며 그를 쳐다보았다. 짜증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예, 백지 문서죠.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숙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가만, 백지 문서라고요?”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서 소리쳤다.


“그래.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너라면 읽을 수 있겠지?”

사실 백지 문서를 바꿔치기해서 이자벨에게 줬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얀이 갖고 있던 것은 원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심리적 압박감에서 밀려 자결한 것이다.

크리스틴의 충성을 줄곧 믿지 못하던 얀은 결국 그의 거짓말을 믿고 죽음을 택한 것이다.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갔던 일은?”

그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던 아델도 레아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다 잘 됐어. 곧 황제의 부고 나팔이 울릴 거야.”

“그래, 고생했어.”

그를 끌어안는 아델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내 걱정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랬잖아.”

그는 아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응, 이제 걱정 안 할게.”

그들만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던 두 사람을 현실로 소환한 건 레아나였다.


“근데 좀 이상해요.”

“뭐가?”

“백지 문서라면서 왜 빨간색이에요?”

크리스틴은 미간을 모았다.


“그 안에 아무 내용도 없잖아.”

레아나는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그의 말대로 아무 내용도 없었다. 있는 건 얀 발렌시아의 자필 서명뿐.


“그걸 마법으로 봉인한 게 아마 너희 어머니일 거야.”

“아아…….”

레아나는 붉은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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