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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백지 문서의 비밀 (103/155)


103화. 백지 문서의 비밀
2023.01.27.



 
뿌우우우……! 뿌우우……!

황궁에서 들려온 묵직한 나팔소리가 그린힐 시내로 울려 퍼졌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러나 황궁 안은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교황청에 연통을 보냈습니다.”

사제 한 명이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음.”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리한 눈으로 집무실 안을 살폈다.

황제가 사망했다.

피스톨로 자신의 머리를 쏜 것이다.

시신은 옮겨졌지만 책상에서 흘러내린 피가 카펫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 옆에 반쯤 피에 젖은 자필 유서도 발견되었다.

늑대 일족인 줄도 모르고 측근으로 삼은 못난 자신을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이 죽음으로 용서받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러스티스 대공을 지목했다.

황제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던 황후는 그 유서를 읽자마자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시녀들은 황후가 깊은 시름에 잠겨서 아프다고 전했다.

이제 겨우 소년이 된 황태자 역시 어머니를 보살핀다며 황후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집무실에는 모리스와 사제들뿐이었다. 다른 대신과 시종들 몇 명은 그저 문밖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새 주인인 러스티스 대공을 맞이하기 위해 바빠 보였다. 이를테면 창고에 먼지가 켜켜이 앉아있는 선황제의 물건을 꺼내온다거나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모리스의 말에 옆에 있던 보조 사제가 물었다.


“죄책감으로 자살할 부류가 아니거든.”

선황과 로드웰 공작을 암살했다는 숱한 소문에도 꿈쩍 않던 자였다. 아니 물증만 없을 뿐 다들 그렇게 믿고 있었음에도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동감입니다.”

“어제 이자벨 부인을 만나고부터였어.”

기억을 떠올리며 모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것도 같네요. 갑자기 로드웰 공작가에 있던 병사들을 철수시켰을 때도 의아했습니다.”

“게다가 러스티스 대공을 후계자로 지목할 건 생각지도 못했지.”

“둘 중 하네요. 참회의 뜻이거나, 협박받았거나.”

“협박일 거야.”

집무실 책상 서랍을 뒤지던 모리스는 제일 아래 서랍을 열었다.

처음엔 잡동사니 가득하던 서랍은 다시 닫았다가 열었더니 텅 빈 공간이 되었다.


“사제님의 마법입니까?”

“마법처럼 보이는 장치지. 이런 장치를 해놓은 건 여기에 감춰야 할 게 있었다는 뜻이고.”

“지금은 비었으니 그걸 이자벨 부인이 가져간 걸까요?”

“글쎄, 직접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와서 비밀 서랍에 손댈 수는 없었을 거야. 아마 누군가 대신 가져갔겠지.”

“그자가 황제도 협박했고요?”

모리스가 다시 서랍을 닫으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바이스 백작이에요.”

여자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검은 상복을 입은 세이라가 가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모리스와 세이라는 황제의 응접실로 갔다.


“바이스 백작이라고 단정 짓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자리에 앉자마자 모리스가 물었다.


“백작은 약혼녀에게 피스톨을 선물했죠. 그리고 황제께서도 피스톨로 자살하셨고요. 피스톨은 현재 칼라임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적 없는 무기랍니다.”

“백작이 황제에게 선물한 걸 수도 있죠.”

“네, 자결을 종용하면서요. 제 말을 안 믿으시나요?”

“참고는 하죠.”

그러면서도 모리스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황제와 똑같은 총상이 갈색 늑대였던 스톤의 머리에도 있었다.

백작은 그때 늑대로 변해 스톤과 싸우고 있었을 테니 피스톨을 쓸 수 없었을 거다.

그럼 백작의 약혼녀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가?

아델 그릴스.

한때 오스월드가의 후작 부인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로 함께 수배 중이었다.

은빛 늑대의 짝.


“백작을 잡으려면 아델부터 잡으세요.”

생각에 잠겨있던 모리스가 세이라를 쳐다보았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장 늑대를 잡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암컷 늑대를 미끼로 쓰곤 하죠. 그러면 냉철함을 잃은 대장 늑대를 쉽게 잡을 수 있거든요. 암컷 늑대가 죽고 나면 대장 늑대는 실의에 빠져 따라 죽는답니다. 늑대 일족도 똑같지 않을까요?”

“아델을 죽이길 바랍니까? 그래도 한 때는 양어머니였는데?”

세이라가 깜짝 놀랐다.

지금 그녀는 황녀의 신분으로 모리스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황제의 책상에서 진짜 황녀의 초상화를 봤습니다. 황녀의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황제 부부가 바꿔치기한 거겠죠.”

더는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세이라는 겁에 질린 것처럼 떨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무슨 힘으로 폐하의 명을 거역하겠어요? 스톤 때문에 오스월드 가는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 흑!”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흐느끼는 세이라는 한없이 가련한 여인처럼 보였다.

모리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이번만은 모른 척 넘어가죠.”

세이라는 손수건을 받아들며 서럽다는 듯 더 크게 흐느꼈다. 누구라도 그녀를 위로해주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하지만 모리스는 냉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조금전 그 늑대 이야기는 시턴 경이 쓴 책에 있던 내용이죠. 물론 저도 같은 생각을 했고요.”

아델 그릴스.

바이스 백작을 잡기 위해선 그녀를 먼저 잡아야 한다!

***

백지 문서 위로 금빛 글자들이 하나씩 새겨져 갔다.


“엄마가 쓴 게 맞아요. 엄마의 마나가 느껴져요.”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조용히 쓰다듬던 레아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져 가던 어머니가 다시 곁에 돌아온 것만 같았으니까.

그녀와 함께 백지 문서를 읽던 크리스틴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군. 얀이 왜 그토록 이 문서를 없애고 싶어 했는지.”

“왜?”

아델이 물었다.


“이 백지 문서는 10년 전 늑대 일족과 맺은 협약서야.”

“늑대 일족과 협약을 맺다니?”

“그 당시 발렌시아 대공이었던 얀은 늑대 일족과 손잡고 황좌를 차지하려고 했던 거야. 교황청까지 쓸어버리고, 그야말로 세계정복을 꿈꿨던 거지.”

상상을 초월한 얘기에 아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맙소사. 만일 이 문서가 교황청에 들어갔다면…….”

“그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 어쩌면 칼라임 전체가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백지 문서가 이자벨에게 넘어갔다는 말에 얀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야망이 강한 남자였지만 그래도 가족은 진심으로 아꼈던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델이 물었다.


“그런데 이 문서대로라면 늑대 일족은 멸족된 게 아니라는 거야?”

“음.”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백지 문서를 건넸다.

지금은 움직이는 금빛 글자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빠르게 훑어 읽던 아델은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봉인을 풀어주는 대가로 늑대 일족은 오직 얀 발렌시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 이게 사실이라면 늑대 일족은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다는 얘기잖아. 정말일까?”

크리스틴은 이번에 갈색 가죽으로 된 낡은 양장본 책을 보여주었다.


“죠셉이 찾은 여동생의 일기장이야. 이 부분을 한 번 읽어봐.”

아델은 일기장에서 책갈피를 꽂아놓은 부분을 펼쳐보았다.

파란 지붕 아래

오래된 우물가에 절대 다가가지 말 것

너의 영혼이 먹힐지도 모른다

오스월드가의 하인들은 속삭이곤 했지

어린 소녀는 늘 악몽을 꾸곤 했어

끝도 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 속에 영혼이 삼켜져 사라지는

소녀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파란 지붕도 우물도 찾지 못했지

어느 날 다시 악몽이 찾아와 속삭이길

그 우물이 이미 너를 삼켜버렸어

네 몸속에 돌의 씨앗이 계속 자라고 있으니

그 뒤의 내용은 물에 젖었는지 잉크가 번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스월드가의 집사가 입양한 딸이었지. 그러다 스톤과 결혼했고. 덕분에 오스월드가의 비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파란 지붕이란 블루게일을 뜻하는 거겠지?”

“음, 실제로 그녀는 블루게일의 별장에서 화재로 죽었어. 그리고 우물은 늑대 일족이 봉인된 장소를 말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레아나도 한마디 했다.


“그럼 돌의 씨앗이란 뭐죠? 스톤이라는 사람과 결혼했으니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건가요?”

그녀는 어느 때보다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워서 크리스틴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제법 똑똑한 꼬맹이군.”

하지만 레아나는 얼른 그 손을 치워내며 반발했다.


“똑똑한 건 맞지만 꼬맹이는 아니죠.”

“꼬맹이들 대부분은 너처럼 말하더군.”

“뭐래. 그럼 자기는 아저씨인가?”

 

 
크리스틴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아델이 두 사람을 얼른 말렸다.


“둘 다 지금 논점에서 벗어나는 중이야.”

“그러니까요.”

그러더니 레아나는 아델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보란 듯 팔짱까지 꼈다.

크리스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델의 팔짱을 저렇게 서슴없이 낄 수 있는 건 자신 외에 누구도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기장에 우리 엄마 아빠에 대한 얘기는 없나요?”

레아나의 물음에 그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헐. 꼬맹이를 정말 진심으로 상대하시네요.”

“조금 전 꼬맹이가 아니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난 누구든 진심으로 대해.”

“크리스…….”

아델이 경고의 눈빛을 보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금방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 종합하면 블루게일에 있는 오스월드가의 별장에 봉인이 있을 거야. 별장의 화재로 그 봉인이 드러났고, 최상급 마법사인 레아나의 어머니는 금방 알아챘겠지. 실제로 이 협약서는 별장의 화재가 난 후 얼마 안 지나서 쓰였어.”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나의 어머니와 황제는 그 봉인을 풀어서 늑대 일족을 부르려고 했던 거구나.”

“그래. 그걸 알아챈 오스월드 후작은 막으려 했을 거고.”

“그래서 엄마를…….”

레아나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그녀와 티격태격하던 크리스틴은 안쓰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봉인이 풀리는 걸 막기 위해 오스월드 후작이 레아나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후작을 공격해서 산송장으로 만들었고.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얀은 얌전히 숨죽이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백지 문서가 사라졌으니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탔을지 알만했다.

이 문서는 일순간에 그를 무너뜨릴 약점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이 문서로 인해 자결하게 된 것이다.

 

***

안개가 내려앉는 새벽.

레아나는 훈련소 저택의 정원을 거닐었다.

연무장에는 벌써부터 검술 연습을 하는 부지런한 기사들도 있었다.

언덕 위에 서서 그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뽀얀 안개 속에서도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

검을 휘두르는 자세도 너무나 똑같았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더 나이가 들었을 텐데.

하지만 기억 속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이토록 젊은 모습에서 멈춰있었다.


“벌써 날이 밝아오네. 들어가서 잠시 눈 좀 붙이지 그러니?”

아델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그녀는 병사들처럼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차림이었다. 허리엔 피스톨과 칼을 차고 있었다.


“아델이야말로 안 자고 뭐 해요? 전쟁터에 나가세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아델이 쿡쿡 웃었다.


“좀 우스꽝스러운가? 잠이 안 와서 훈련이나 하려고.”

“백작님이라면 충분히 지켜줄 것 같은데요?”

“나도 지켜주고 싶어. 그가 힘들 때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면 좋겠어.”

레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빠는 강한 전사였지만, 엄마는 아빠를 위해 더 강한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어요.”

“아빠를 많이 사랑하셨나 보다.”

레아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사랑했다면 그런 위험한 협약서 같은 거 만들지 말았어야죠. 그러면 지금쯤 우리 가족은 함께 잘살고 있었을 텐데. 아빠도 그렇게 끔찍하게 처형당하지 않았을 거고.”

“엄마가 원망스럽니?”

“그냥 좀 화가 나요. 아무것도 몰랐을 땐 엄마가 그립기만 했는데. 왜 그런 무모한 일을…….”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아마 레아나를 위해서 그랬을 거야. 늑대 일족이 더는 핍박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었겠지.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더 좋은 곳이길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바람이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레아나가 중얼거렸다.


“아델은 정말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갑자기?”

“아델과 백작님이랑 있으면 부모님이랑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사실 아까 백작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때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왜 자꾸 싸워?”

“아빠가 생각나서 자꾸 심술을 부리게 되네요. 사실은 어리광부리고 싶은 걸지도 몰라요.”

“그에게도 사실대로 말해봐. 이해해줄 거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 레아나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헐. 됐어요. 생각만 해도 오그라들 거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지개를 크게 켜는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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