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레아나의 바보 같은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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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레아나의 바보 같은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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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레아나의 바보 같은 파티
2023.01.30.
“이자벨 부인으로부터 회신입니다.”
훈련을 멈춘 크리스틴은 짐머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로드웰 가문의 붉은 밀랍 인장이 찍혀 있었다.
봉투를 열어 읽어보던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단장님?”
짐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봉투를 닫으며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엔 파티를 열어야겠군.”
짐머는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소식이었습니까?”
대답 대신 그는 다시 봉투를 건네고 연무장을 나갔다.
의아해하며 봉투 안의 서신을 꺼내 읽던 짐머는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
“정말 최고예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레아나가 신나서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파티 준비를 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훈련소 정원에는 근사한 파티장이 마련되었다.
평소 제멋대로 보이던 기사단원들이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매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라면 무인도에 난파되어도 배 한 척을 뚝딱 만들어 낼 것만 같았다.
아델은 부엌에서 한참 정신이 없었다.
기사단 내에 조리사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메인 요리를 담당했고, 그녀는 후식에 쓸 디저트를 준비 중이었다. 레아나는 그녀를 보조했다.
“레아나, 이 그라탱 좀 갖다 놔 줄래? 그릇이 뜨거우니까…….”
말하는 순간 조리대에 있던 그라탱 그릇이 사라져 버렸다.
“마법이죠.”
레아나는 눈을 찡긋하며 그라탱이 놓여 있던 조리대 위에 사뿐 올라앉았다.
그리고 막 구워져 나온 머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래, 네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걸 깜빡했구나.”
“하지만 이런 건 못 만들어요. 이거야말로 정말 마법이네요!”
눈 깜짝할 사이에 머핀 하나를 다 먹어치운 레아나는 다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레아나, 그만.”
아델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안해요. 파티 음식을 내가 다 먹어치울 뻔했네.”
혀를 날름 내밀며 레아나가 귀엽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진짜 맛있는 음식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머핀으로 배를 채우면 억울하잖아.”
아델은 이번엔 오븐에서 애플파이를 꺼냈다.
“꺅! 침이 줄줄 흐를 거 같은 비주얼과 냄새예요!”
조리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레아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지금까지 내 애플파이를 본 사람 중 제일 열렬한 반응이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아델이 돌아보자 어느새 크리스틴이 부엌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파티를 준비하다가 온 모양이었다. 조끼를 입고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차림이 수수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면 결코 수수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당신은 내 애플파이를 좋아하지만 레아나처럼 열광한 기억은 없는데.”
“그럼 여기서 보여줄까? 저 꼬맹이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는데.”
크리스틴이 성큼성큼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델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던 조리사들은 음흉하게 웃더니 하나둘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조리사가 어리둥절해 하는 레아나를 끌고 나갔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단장!”
쾅!
“둘뿐이네.”
그가 붉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그러게.”
둘만 있었던 게 처음도 아닌데 아델은 왠지 긴장되었다.
그녀에게 바싹 다가든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긴장된 표정인데?”
귀신 같으니.
“응, 긴장돼. 애플파이에 격렬하게 열광하는 당신의 반응을 기대하느라.”
그의 얼굴이 키스할 듯 가까워졌다.
“어떻게 열광해줄까? 발가벗고 춤이라도 춰?”
“나쁘진 않은데 좀 더 참신한 건 없어?”
“아쉽게도 부엌이라서. 침실이었다면 훨씬 더 참신하게 당신을 감동시켰을텐데.”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고, 코끝에 익숙한 체향이 흘러들자 아델은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럼 침실로 갈까?”
뜻밖의 대담한 발언에 아델은 스스로도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미쳤어, 무슨 소릴!
그런 아델이 귀엽다는 듯 크리스틴이 코끝을 살며시 비볐다.
“대담한 유혹이네.”
“유혹은 당신이 먼저 했어!”
“그렇군. 난 한계거든.”
크리스틴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묻으며 입술을 내렸다.
“크리…….”
그의 이름을 부르던 아델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갗이 겹치고, 서로의 호흡이 뒤섞였다.
달아오른 체온이 이성을 녹여버렸나 보다.
이곳이 부엌이라는 것도, 지금 한창 파티 준비 중이라는 것도, 밖에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상관없어졌다.
뜨겁게 달궈진 숨소리와 함께 그들의 키스가 더 깊고, 더 농밀하게 짙어졌다.
“거, 조용히 좀 해 봐!”
“마법으로 들리게 해준다니까요!”
“윽! 그만 밀라고!”
하지만 문밖에서 들리는 저 소리에는 도저히 멈추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젠장! 잠시만, 아델.”
키스를 멈춘 그는 아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동시에,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식칼을 힘껏 뽑아 들었다.
“염려 마, 1분 안에 저놈들 다 죽여버리고 돌아올게.”
벌컥!
“으아아악!”
문이 열리자 밖에서 엿듣던 조리사들이 와르르 앞으로 쏟아졌다.
그러다 번쩍이는 식칼을 들고 잔뜩 인상을 쓴 크리스틴을 보자 기겁했다.
“저, 저흰 음식을 내가려고…….”
“예, 곧 파티가 시작이라…… 헤헤…….”
덩치 큰 조리사들이 쭈뼛거리는 가운데, 레아나가 당당하게 나서며 소리쳤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린 건 엄연히 두 분 잘못이죠!”
황당한 크리스틴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마법으로 도망친 곳이 겨우 여기니?”
“아델!”
레아나의 방으로 들어오는 아델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다.
얼른 뛰어가 그 상자를 받아들며 레아나가 사과했다.
“두 분의 키스를 망쳐서 죄송해요. 백작님, 화 많이 나셨어요?”
“칼은 내려놨으니까 안심해.”
“정말 화 많이 나신 얼굴이었는데.”
“그 뒤에 내 얼굴은 안 보였나 보네. 그가 안 그랬으면 내가 칼을 들었을 텐데.”
레아나가 깜짝 놀라자 아델이 픽 웃었다.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네요. 아델도 키스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키스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이 좋은 거야. 물론 네 말대로 때와 장소를 못 가린 건 실수였지만.”
“죄송해요. 아깐 사실 너무 당황해서 버릇없게 말했어요.”
“사과는 충분히 했으니, 그 상자부터 열어볼래?”
침대 위에 내려놓은 상자를 열어보던 레아나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꺅!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상자 안에는 연보라색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이 저택 옷장에서 발견한 거야. 데뷔탕트는 아니지만, 첫 파티라니까 예쁘게 해주고 싶어서.”
교황청에서 지내는 동안 레아나의 옷은 항상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낡고 검은 원피스였다. 게다가 파티도, 사교계 모임도 초대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예쁜 드레스만으로도 감동 하기에 충분했다.
“아델! 정말 고마워요!”
와락 달려들며 레아나가 아델을 끌어안았다.
***
하지만 난생처음 입어보는 드레스는 소매와 치마가 너무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아델이 발라준 립스틱은 너무 진한 것 같았고, 잔뜩 웨이브를 넣어 풀어 내린 머리는 너무 치렁치렁해 보였다.
레아나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자신이 너무너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델 이건 너무…….”
“한 번만 더 ‘너무’라는 말을 하면 애플파이 못 먹게 할 거야.”
“너무해…… 앗, 취소요!”
레아나는 용기를 내어 파티가 열리는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레아나를 본 기사단원들은 놀리듯 야유와 함성을 질러댔다.
“거봐요. 내가 너무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레아나는 울상이 되어 뒤따라오는 아델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아델은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내 귀엔 예쁘다는 환호로 들리는데.”
“아델, 은근히 잔인한 거 알아요?”
“응, 알아.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거 너답지 않다는 건 알지?”
“하긴. 그러네요.”
씁!
깊게 심호흡을 한 레아나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더니 성큼성큼 정원의 파티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멈칫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수많은 사람과 섞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
날 선 콧날과 완벽한 그림 같은 옆모습.
“백작님,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으면 어쩌죠?”
뒤따라 오는 아델에게 살며시 물었다.
전전긍긍하는 레아나를 보자 아델은 웃음이 나왔다.
당돌하고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이럴 때는 영락없는 아이였다.
“날 믿고 용기 내서 말 걸어 봐.”
레아나는 다시 씁, 숨을 들이켜고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흠흠, 죄송해요. 아까 버릇없이 군 거.”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목소리에 그가 돌아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레아나는 고개를 떨궜다.
잠시 후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워.”
레아나의 양 볼이 확 달아올랐다.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크리스틴은 눈부시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레아나를 지나쳐 뒤에 서 있는 아델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델 양?”
레아나의 볼이 더 새빨개졌다. 금방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신과 아델은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아델은 수수한 베이지색 드레스에 머리에 초록 리본을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기품있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무엇보다 크리스틴이 가장 사랑하는 연인.
그 순간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꼬맹이, 너도 오늘은 예쁘다.”
“……!”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가 픽 웃었다.
여전히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커다란 손으로 레아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두근.
아델과 크리스틴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난 뒤, 레아나는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져 보았다.
크리스틴이 쓰다듬어 준 그 느낌을 계속 떠올리면서.
진짜 아빠 같았어.
“뭐해, 얼른 오지 않고?”
돌아보자 제니퍼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와 눈을 찡긋했다.
“저도요?”
“얼른 안 오면 재미있는 구경을 놓친다고!”
정원에 흐르는 음악은 제멋대로였고, 다들 춤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이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사과로 저글링을 하며 개다리춤을 추기도 했다.
다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매우 흥겨워 보였다.
“전부 다 바보 같아…….”
그러면서도 레아나는 웃고 있었다.
“원래 바보 같은 거야, 파티는. 컴온.”
제니퍼의 손을 잡고 레아나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레아나와 한바탕 춤을 추고 난 제니퍼는 한 컵 가득 채운 과일 펀치를 단숨에 비웠다.
그러다 꽃이 만발한 화단에 홀로 서 있는 짐머를 보자 목청껏 소리쳤다.
“이봐, 거기서 뭐 해?”
그를 한번 흘끔 쳐다봤을 뿐 짐머는 별말이 없었다.
제니퍼는 과일 펀치를 가득 채운 컵을 들고 다가갔다.
“여기서 청승맞게 혼자 뭐 해?”
“황혼이 지고 있군.”
“풉!”
제니퍼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글거려서 못 참겠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꽃밭에 앉아서 황혼 타령이라니.”
“꺼져줄래, 제니퍼.”
“좋아. 대신 쭉 들이켜.”
제니퍼가 내민 컵을 짐머는 단숨에 비워 버렸다.
“자, 됐지?”
하지만 제니퍼는 씩 웃으며 팔짱을 끼고 화단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리면 좋은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무슨 헛소리…….”
“자넨 취하면 노래하는 버릇이 있잖아.”
“미안하지만 고작 펀치 한 잔에 안 취해.”
“이것저것 있는 술을 다 때려 넣었거든. 그래선지 이 펀치가 꽤 독해. 자넨 주량이 약한 편이고.”
펀치는 과일과 술을 섞어 만드는 칵테일 음료였다. 향긋하고 달짝지근했지만 배합에 따라서는 독한 술이 되기도 했다.
제니퍼의 말을 증명하듯 짐머의 얼굴이 금방 불그레해졌다.
“자, 슬슬 노래하고 싶지?”
“꺼져.”
“그럼 하는 수 없지.”
포기한 듯 돌아서던 제니퍼는 손나팔을 만들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짐머 부관님이 노래하신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뜩 흥에 취해 있던 사람들이 ‘우워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바보 놈.”
짐머의 핀잔에 제니퍼가 인상을 썼다.
“말이 좀 심하잖아. 눈치는 파티장에서 청승을 떨고 있는 네놈이 없는 거지.”
그러자 짐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빨개졌다.
“단장님과 아델 양…… 곧 헤어지게 될 거야.”
“뭐?”
“송별파티라고,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