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벚꽃은 지고 여름 장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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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벚꽃은 지고 여름 장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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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벚꽃은 지고 여름 장미가
2023.02.03.
“눈치 없는 바보 놈.”
짐머의 핀잔에 제니퍼가 인상을 썼다.
“말이 좀 심하잖아. 눈치는 파티장에서 청승을 떨고 있는 네놈이 없는 거지.”
그러자 짐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빨개졌다.
“단장님과 아델 양…… 곧 헤어지게 될 거야.”
“뭐?”
“송별파티라고, 이건.”
“그게 지금 무슨……?”
하지만 어느새 개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짐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데려가 버렸다.
사실 짐머는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공식 가수나 다름없었다.
언제가 술에 취한 그가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귀족이고 어머니는 가수였다고.
어머니의 공연을 본 아버지가 한눈에 반해 두 사람은 불타는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몇 달 못 가서 꺼져버린 것이다.
자신은 짧게 타오른 불꽃의 잔재라며 자조적으로 웃던 그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아픈 성장 과정 때문인지, 짐머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영혼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취하지 않았을 때는 절대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었다.
혼자 남겨진 제니퍼는 크리스틴과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넝쿨 식물이 드리워진 파고라 안에 앉아있었다.
주위에는 여전히 오묘한 핑크빛 무드가 흘렀다.
다른 사람 따윈 끼어들 수조차 없는.
짐머가 괜한 소리를 한 걸까?
‘그래, 워낙 걱정이 많은 놈이라 넘겨짚은 거겠지.’
***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머리 위로 옮겨진 짐머는 결국 테이블 위에 세워졌다.
술기운이 오른 그의 얼굴이 장밋빛으로 발그레했다.
그의 뒤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어서 유난히 더 붉어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짐머가 노래 부를 건가 봐.”
파고라에 앉아있던 아델은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녀석의 어머니가 가수였대. 노래를 꽤 잘해.”
크리스틴의 말을 증명하듯 어느새 아수라장이던 파티장이 고요해졌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떠들던 사람들도 그의 주위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내 짐머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노래를 시작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성이 석양으로 물든 하늘에 퍼져 나갔다.
붉은 태양이 머리 위에 빛나던 그 날
당신은 약속했죠
장미가 피는 계절에 돌아오겠노라
칼라임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였다.
전쟁터로 떠난 연인에 관한 내용이라 병사들이 자주 부르곤 했다.
“크리스, 우리도 앞에 가서 듣자.”
아델이 환하게 웃으며 크리스틴의 손을 잡아끌었다.
취했는지 그녀는 평소보다 좀 더 들뜬 것처럼 보였다.
“아델, 얼굴이 빨개.”
아델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키득거렸다.
“펀치를 몇 잔 마시긴 했지만, 정신은 말짱해. 춤을 춰도 될 만큼.”
“그거 좋은 생각이군.”
크리스틴은 파고라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바이스 백작 부인?”
한 손을 내민 그는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춤을 신청했다.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아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바이스 백작 부인. 듣기 좋네.”
그의 손을 잡고 아델은 사뿐히 일어났다.
“결혼하면 부르려고 아껴뒀었는데.”
“그럼 그때 부르지 왜……?”
대답 대신 그는 잘록한 허리를 한 팔로 끌어당겨 안았다. 다른 한 손을 맞잡으며 귓가에 달큼하게 속삭였다.
“자, 왼발부터 가는 거야. 아델.”
“응.”
하나둘, 하나둘…….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두 사람은 파고라 안을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다들 짐머의 노래에 매료되어 두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늘은 어느새 어스름하게 어두워졌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그들이 있는 곳은 오래된 낡은 헛간이 되었고, 황궁의 연회장이 되기도 했다.
“이제 정말 춤을 잘 추는 남자가 됐네.”
어린 시절을 떠올라서 아델이 웃었다.
“원래 내가 습득이 빨라. 몸으로 하는 건 특히.”
“거짓말. 계속 내 발을 밟았으면서.”
“그야 선생에게 딴마음이 있었으니까.”
“당신 설마…….”
“그래. 못 추는 척 일부러 발을 밟았던 거야. 그래야 계속 가르쳐 줄 테니까. 헛간에서 단둘이 있는 게 좋았거든. 스릴도 있고, 은밀한 기분도 들고.”
아델이 어이없어했다.
“음흉한 사기꾼이었네.”
“사랑꾼이었지. 그때부터 쭉 그 선생만 가슴에 담고 살았으니까.”
천천히 춤을 멈춘 그는,
“그리고 앞으로도.”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 역시 그를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부드러웠고, 사방은 고요했다.
언제부터인지 짐머의 노랫소리도 아득하게 사라져서 들리지 않았다.
오직 둘만의 견고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 이제 짐머의 노래 들으러 갈까?”
그 시간을 먼저 깨트린 건 아델이었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어진 것이다.
“할 얘기가 있어, 아델.”
“지금까지 실컷 얘기해놓고, 갑자기 또 무슨 얘기?”
아델은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팔목을 꽉 움켜쥐며 놔주지 않았다.
“하나는 간단한 거고, 또 하나는 심각한 얘기야.”
“심각한 얘기가…… 뭔데?”
“내가 끔찍한 음치라는 거.”
“……뭐야!”
긴장이 풀린 아델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는 정말 심각한 표정이었다.
“날 닮았다면 우리 아이도 끔찍한 음치가 될 테니 이만저만 심각한 사안이 아니지.”
“그러게. 아이가 태어나면 짐머를 음악 선생으로 둬야겠네.”
“좋은 생각이군.”
“그럼 간단한 얘기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면처럼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스울프는 당신 혼자 가게 될 거야.”
쿵!
아델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미 그의 눈빛으로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
“……무슨 소리야? 레아나도 이제 괜찮아졌잖아. 두 사람이 쫓기는 건 알지만 따돌릴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당신은 숱한 전쟁터에서도 살아 돌아왔고, 또 레아나는 뛰어난 마법사잖아. 대체 왜?”
아델은 제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라는 듯 다그쳤다. 초록빛 눈동자를 애원하듯 글썽거리면서.
그러나 크리스틴은 이미 결심을 굳힌 완강한 표정이었다.
“아델, 사실 지금 그린힐은 완전히 봉쇄됐어. 교황청의 사제들이 마법 진을 펼쳐서 그들 몰래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해.”
“선황후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래,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어. 당신이 루스울프로 가게 도와달라고. 그리고 회신을 받았지. 내일 러스티스 대공을 맞이하는 일행들 속에 섞여서 그린힐을 나가게 해주겠다고.”
“싫어. 왜 나 혼자만……?”
“나와 레아나는 이미 교황청에 얼굴이 알려졌어. 우리가 함께 움직이면 당신까지 위험해.”
“그래서 혼자 살 길을 찾아 도망치라고?”
아델이 싸늘하게 노려보자, 크리스틴은 달래듯 두 손을 잡아주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야. 루스울프에 있는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을 불러와달라는 거지. 거기엔 1만 명이 넘는 내 군사들도 있으니까.”
“결국 교황청과 전쟁을 벌이기로 한 거야?”
“걱정 마. 이곳에선 이자벨 부인이 도울 거야. 그리고 루스울프의 지원군이 교황청을 습격한다면 승산이 있어.”
“다른 사람을 보내면 되잖아. 왜 내가…….”
크리스틴은 안 주머니에서 봉인된 서신을 꺼냈다.
“이건 내 명령서야. 당신이 가야만 그들이 움직일 거야.”
아델은 더 이상 곁에 있겠다고 떼를 쓸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그를 도울 수 없을 테니까.
“루스울프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는 거야?”
그는 걱정 없다는 듯 웃었다.
“염려 마.”
여전히 울 것 같은 아델을 보며 그가 뺨을 어루만졌다.
“미안. 가르덴 호숫가의 벚꽃이 필 때 결혼식은 힘들겠다. 대신 그곳의 장미가 필 때 결혼하자. 그때까지 꼭 돌아갈게.”
“꽃은…… 꽃 따윈…… 상관없어. 무사히 오기만 해.”
내 꽃은 당신이니까.
아델은 어떤 격정에 떠밀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크리스틴 역시 가느다란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며 보드라운 입술을 삼켰다.
얇은 살갗 너머로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가쁜 숨결이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짐머의 노랫소리가 멀리 아득하게 들려오고,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우리의 장미는 희미하게 빛바래져 가는데
그대의 명성은 여전히 먼 곳에서 빛나네요
먼 훗날 많은 사람이 당신을 기억하겠죠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칠 거예요
그러니 나는 그만 잊을게요
당신과 했던 그 약속을 5월의 붉은 장미를
그 푸르고 빛나던 시간을…….
***
파티가 끝나고 다들 잠이 들 무렵 아델은 간단한 짐을 챙겨 훈련소의 저택을 나왔다.
루스울프로 갈 때까지 그녀의 호위는 제니퍼가 맡기로 했다.
크리스틴과 짐머가 조용히 그들을 배웅하며 따라왔다.
“떠나시는 거예요?”
레아나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높은 담장 위에 올라앉아 있던 그녀는 바닥으로 사뿐 내려왔다.
“그렇게 됐어, 레아나. 얘기 못 하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 모든 상황이 다 저 때문이죠?”
레아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굉장한 착각을 하는군. 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저만치에서 싸늘하게 비웃는 크리스틴에게 레아나가 발끈했다.
“그러게요. 이게 다 대단하신 백작님 계획이란 걸 몰랐네요.”
“레아나.”
아델이 부르자 레아나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미안해요, 아델. 그리고 오늘 파티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맛있는 음식과 예쁜 드레스, 꿈만 같은 하루였어요.”
아델은 레아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나도 네 덕분에 행복했어. 그리고 나 없는 동안 크리스를 부탁해.”
그리고 작게 소곤거렸다.
“겉은 저렇게 보여도 알고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거든.”
인상을 쓰고 있는 크리스틴을 흘끗 보며 레아나도 작게 대꾸했다.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다른 여자는 얼씬도 못 하게 막을게요.”
“든든하네.”
두 여자는 눈짓으로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아델은 마지막으로 크리스틴의 앞에 섰다.
“무사히 돌아와, 크리스. 조금이라도 다치면…… 가만 안 둘 거야.”
“음.”
그는 무심히 대꾸했지만 아델은 그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참고 있는지 알았다.
그녀 역시 더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가요, 제니퍼.”
***
로드엘 공작가에 도착한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자벨은 아델에게 작은 약병을 건넸다.
“이걸 물에 타서 머리를 감도록 해요. 금발처럼 보일 테니.”
“금발로 위장해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남장도요.”
“하루 만에 금발의 남자가 되다니, 멋지네요.”
자조적으로 웃는 아델에게 이자벨이 대략 설명했다.
“내일 러스티스 대공을 마중 가는 일행들과 함께 닉서스 다리에 가게 될 거예요. 현재 그린힐을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죠. 다리를 건너면 준비해 놓은 마차를 타고 루스울프로 가요. 필요한 짐들은 전부 실어놓았어요.”
“말씀만 들으면 간단한 일이네요.”
“부디 간단히 일이 되길 빌어야겠죠.”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화려한 마차 한 대와, 말을 탄 열두 명의 기사들이 로드웰 공작가를 나왔다.
러스티스 대공을 맞이하러 가는 일행이었다.
마차 안에는 이자벨과 시녀들이 있었고, 아델과 제니퍼는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단으로 위장했다.
금발의 미남자가 된 아델은 지금 로드웰 기사단 옷을 입고 있었다.
체인 메일 위에 판금으로 된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검을 찬 모습이 기사로 손색없었다. 그동안 틈틈이 승마연습과 검술을 배워 온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남장이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이러다 여인들에게 프러포즈 받을까 봐 겁나네요.”
긴장을 풀기 위해 아델과 제니퍼는 작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황궁에서 수십 명의 근위대가 합류할 때는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장을 했더라도 그들 중에 아델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을지 몰랐으니까.
“젠장, 근위대가 합류할 걸 예상 못 했습니다.”
“러스티스 대공이 이제 황제라는 걸 잊고 있었어요.”
아델은 얼른 근위대들을 등지며 돌아섰다.
하지만 문제는 근위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