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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거짓말의 종말 (106/155)


106화. 거짓말의 종말
2023.02.06.



 


“멈춰라!”

닉서스 다리에 도착하자 선두의 기사단장이 명령했다.

아델을 포함해 로드웰 공작가의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말을 멈췄다.


“교황청의 사제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기사단장은 이자벨이 탄 마차로 가서 보고했다.

마차의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본 그녀는 긴장했다.

닉서스 다리 앞에 흰옷의 사제들 수십 명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매부리코에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사제였다.


“마차에서 내리셔야겠습니다, 부인.”

“나는 칼라임 제국의 선황후, 이자벨 로드웰입니다. 황제 즉위식을 위해 이곳으로 오는 내 아들 러스티스 대공을 마중 가는 길입니다.”

“부인께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는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교황청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교황청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칼라임의 황제를…….”

매부리코의 사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무력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인.”

“뭐라! 감히 사제 따위가!”

기사단장이 발끈하며 말에서 뛰어내리자, 매부리코의 사제도 손바닥 위에 푸른 빛의 구슬을 띄워 올렸다.

우우웅…….

그것이 신호인 듯 저만치 줄지어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똑같은 빛을 만들어냈다.

스릉! 스릉!

이쪽의 기사단과 근위대도 질 수 없다는 듯 사납게 칼을 뽑았다.

잔뜩 끌어당긴 활시위처럼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마차에서 내리면 되는 건가요?”

결국 이자벨이 한발 물러났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인.”

“천만에요.”

이자벨을 따라 시녀들도 마차 안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기사단과 근위대도 모두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이미 각오했음에도 아델은 손안에 땀이 촉촉해졌다.

그린힐을 나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는 동안 곳곳에 수배자들의 몽타주가 붙어 있었다. 교황청의 1급 수배자인 크리스틴과 레아나, 그리고 최근에 그녀까지 추가된 것이다.

그때였다. 마차에서 까만 고양이를 안고 내리던 이자벨의 시녀 한 명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매우 낯이 익은 얼굴…….


‘에이프릴?’

에이프릴도 남장한 아델을 알아봤는지 두 눈이 동그래졌다.

***

에이프릴은 사제들과 뭔가 얘기 중이었다.


“안심해요. 저 애 역시 도망치는 중이라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거예요.”

아델의 걱정을 알아챈 듯 이자벨이 다가와 속삭였다.


“황녀가 왜 도망치는 거죠?”

“스톤의 아이를 임신했거든요. 잡히면 교황청에 끌려갈 테니.”

“끌려간 여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이자벨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녀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저 애는 이제 황녀도 아니니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죠.”

아델의 얼굴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런데 에이프릴 황녀가 정말 스톤의 아이를 임신했나요?”

“본인은 아니라더군요. 하지만 황후와 황제가 왜 세이라와 바꿔치기해가며 저 애를 황궁 밖으로 빼돌렸겠어요. 난 죽은 황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 애를 그린힐 밖으로 내보내 줄 거예요.”

얀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다.

이자벨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 약속만은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델의 생각은 달랐다.


“아뇨, 에이프릴은 임신하지 않았어요. 늑대 일족은 평생 한 명의 반려와 잠자리를 하니까요.”

“정말인가요?”

“네, 스톤은 이미 한번 결혼했었죠.”

그러니 그는 에이프릴을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프릴이 그린힐에서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굳이 사제들로부터 아델을 숨겨줄 이유 또한 없다는 뜻…….

아델과 이자벨이 긴장하며 바라보는데, 에이프릴과 사제들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등 뒤에서 제니퍼가 칼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아델 양.”

“잠시 말씀 좀 나눠야겠습니다, 부인.”

다행히 사제들은 아델이 아닌 이자벨에게 용건이 있었던 것이다.



“사제들이 우리 인원과 이동 목적을 확인하더군요. 당신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아델 양.”

에이프릴은 아델이 서 있는 나무 아래로 다가오며 말했다.


“왜 도와준 거죠?”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당신은 곧 잡힐 테니까요.”

“쉽게 잡히진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델은 호기를 부리며 대답했다. 그래야 덜 겁이 날 것 같았으니까.

그런 아델을 흘끗 쳐다보다가 에이프릴이 중얼거렸다.


“늘 부러웠어요. 모든 걸 다 갖고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늘 당당했으니까.”

에이프릴의 진심이 느껴져서 아델도 마음을 조금 내보였다.


“누구나 마음속엔 겁 많고 약한 아이가 살고 있죠. 그 아이를 얼마나 잘 숨기느냐의 차이일 뿐.”

에이프릴은 쓰게 웃었다.


“난 겁 많고 약할 뿐 아니라 쓸모없는 멍청이 같아요. 아바마마를 도우려고 했던 것뿐인데…….”

“그래서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했나요?”

“그래요. 덕분에 결국 아바마마는 자결하셨죠. 난 임종도 못 본 채 이렇게 쫓겨나는 신세가 됐고.”

“그뿐 아니라 스톤을 풀려나게 만들어 교황청을 불러들이는 구실이 되었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에이프릴을 보며 아델은 약간 짜증이 밀려왔다.

그녀가 차라리 악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연민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그저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녀였기에, 그 어리석음이 너무나 큰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에이프릴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폐하는 황녀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분이셨죠. 고작 황녀님 때문에 자결을 택한 건 아닐 거예요.”

여기까지가 아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그 말에 위로를 받다니 난 정말 구제 불능이네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에이프릴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요?”

한편 사제들과 대화를 나누던 이자벨이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사제들은 그녀 일행의 모든 무기를 전부 두고 가라고 한 것이다.


“무기를 소지한 채로 그린힐을 나갈 수 없습니다.”

“무기도 없이 어떻게 호위하란 말이죠?”

“러스티스 대공을 전쟁터에서 맞이하는 게 아니라면 왜 무기가 필요합니까?”

이자벨은 매부리코의 사제를 노려보았다.

크리스틴과 레아나를 찾는다는 구실로 교황청에서 지나친 간섭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황제의 자리도 비어 있는 상황…….

겨우 황제를 몰아냈더니 생각지도 않은 날파리가 그 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이다.


“교황 성하께 전해주세요. 칼라임 제국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사제들을 노려보며 그녀는 뒤에 있는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젠장! 내 저것들을 그냥……!”

기사단장이 다시 한번 발끈했지만 이자벨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 탈 검 하라!”

 

***

닉서스 다리는 길이가 대략 100미터 정도였다.

그린힐 외곽을 흐르는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라 수심이 깊고 유속도 빨랐다.

검을 모두 내려놓은 이자벨 일행은 말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기 위해 줄을 섰다.

사제들은 미리 제출한 명단과 인적사항을 일일이 비교하며 한 명씩 통과시켰다.

마침내 아델의 차례가 되어 다리 앞으로 걸어갈 때였다.


“뭐, 백작을 급습했다고?”

등 뒤에서 들려온 대화에 그녀가 멈칫했다.


“그래, 백작과 그 일당이 숨어지내던 저택을 급습했다더군. 백작은 놓쳤지만 붙잡힌 사람들은 곧 공개 처형할 거래.”

“꼴 좋군. 짐승을 따르더니.”

아델은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누가 어떻게 잡혔는지 걱정이 되었다.

어제저녁만 해도 다 함께 웃고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었는데.


“아델.”

뒤에서 제니퍼가 속삭였다.

검문하던 사제가 넋이 나간 그녀를 의아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숨을 고르며 아델은 얼른 사제들의 검문에 응했다.


“통과!”

다행히 어렵지 않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단장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포로로 잡힌 녀석들은 입이 무거워서 끝까지 비밀을 지킬 거고요.”

곧 뒤따라온 제니퍼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공개 처형한다는 건 그를 유인하겠다는 뜻이잖아요. 알면서도 그는 그곳에 갈 거고요.”

“짐이 된다면 녀석들이 먼저 자결할 겁니다.”

“제니퍼…….”

아델은 결국 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제니퍼는 정면을 주시한 채 계속 걸었다.


“멈추지 말고 가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평소의 유쾌함 따윈 없었다.

그제야 아델은 지금 자신보다 더 애가 탈 사람은 제니퍼라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요, 제니퍼. 포로로 잡힌 대부분이 당신의 단원들일 텐데…….”

제니퍼는 감정을 삭이듯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졌다. 어느새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서 갑시다, 아델.”

아델은 제니퍼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다리를 반 이상 건넜을 때였다.


“선황후의 일행은 멈추십시오!”

말을 탄 한 무리의 사제들이 다리를 달려오며 소리쳤다.

사제들은 곧 다리의 양쪽 끝을 막아선 채 위협하듯 푸른 빛의 구슬을 만들어냈다.

반면에 이자벨 일행은 무기도 모두 빼앗긴 상태.

만일 여기서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무슨 일이죠?”

이자벨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왔다.

젊고 수려한 얼굴의 사제가 말을 몰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자벨 선황후 폐하.”

“모리스 사제님.”

침착하던 이자벨의 표정이 가늘게 떨렸다.

교황의 대리인이라는 그가 괜히 여기에 왔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표정만 봐서는 무슨 속셈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모리스는 온화하면서도 얼음장처럼 싸늘한 분위기였다.


“조금 전 로드웰 공작가의 하인에게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부인께서 도망자를 숨겨주고 계시다고요.”

“뭔가 착오가 있었겠죠. 도망자라니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역시 황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없군요. 도망자를 찾아내기 전까지 선황후 폐하 일행은 이 다리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찾아낸 후에는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실 겁니다.”

모리스의 선언이 끝나자, 사제들은 빛의 구슬을 허공에 띄운 채 양 끝에서 점점 좁혀 들어왔다.

제니퍼가 아델에게 속삭였다.


“수영 잘하십니까?”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물놀이 하기엔 좀 이르지만 해보죠.”

두 사람은 다리 아래의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겁 많고 약한 아이 말이에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아델이 돌아보았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그녀도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숨길 수 없다면, 죽일 순 있겠죠?”

“그게 무슨?”

“조금 전 당신이 그랬잖아요. 누구나 마음속엔 겁 많고 약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이제 더는 그 아이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네요.”

에이프릴은 엷게 웃더니 아델과 이자벨을 지나쳐 사제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어느 때보다 당당해서 왠지 모르게 비장해 보였다.

모리스의 앞으로 나온 에이프릴은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에이프릴 황녀……?”

모리스는 그녀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죽은 얀의 책상 위에서 황녀의 초상화를 보았으니까.


“알아보시니 얘기가 쉽겠네요.”

“역시 늑대 일족의 아이를 잉태 중이라 도망친 거였군요.”

“아니라고 하면 믿을까요? 뭐,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에이프릴은 품에 안고 있던 까만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다리의 난간으로 올라섰다.

강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물결쳤다.


“아바마마께선 늘 그러셨죠. 황녀의 책임을 다하라고. 마지막은 황녀답게 기억됐으면 좋겠네요.”

 

 
다시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그녀는 깊은 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럼 이제 다리를 건너도 되는 건가요?”

이자벨은 모리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죄인을 숨겨준 처벌을 받게 되실 겁니다.”

“그렇다면 황녀를 건져내서 늑대 일족의 아이를 잉태 중이라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처분은 그때 받도록 하죠.”

말을 끝낸 이자벨은 몸을 돌려 다리를 건너갔다.

모리스와 사제들도 더는 그녀 일행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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