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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뜻밖에 찾아온 선물 (107/155)


107화. 뜻밖에 찾아온 선물
2023.02.10.



 


“정말 엄청난 여정이었군요.”

다리를 건넌 이자벨은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을 착잡하게 응시했다.

그 사이 아델은 길옆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을 꺾어 강물 위에 던져주었다.

에이프릴.

이름 그대로 4월에 떠난 그녀를 잠시 추모했다.

그리고 돌아서며 이자벨에게 당부했다.


“백작을 잘 부탁드려요.”

“염려 말아요. 칼라임을 위해서라도 교황청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게 두진 않을 거예요.”

“선황후 폐하만 믿겠습니다.”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숲에 난 작은 길을 가리켰다.


“이 길에서 붉은 리본을 묶어둔 나뭇가지를 따라가도록 해요. 마차를 숨겨놓은 장소가 나올 거예요. 그럼 행운을 빌어요.”

“선황후 폐하도요.”

아델과 제니퍼는 이자벨이 가리킨 곳으로 말을 몰았다.

이자벨 일행이 사라진 후에도 모리스는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찜찜함 때문이었다.

에이프릴의 죽음으로 뭔가 은폐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왠지 더 중요한 걸 놓친 것만 같았다.


“저들 일행 중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습니까?”

그의 물음에 매부리코의 사제가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다만 원래 신고된 인원보다 2명이 추가되었습니다.”

“2명이 갑자기?”

“예, 하지만 바이스 백작은 없었습니다. 레아나라면 금방 알아봤을 것이고.”

“아델 그릴스가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시녀들은 모두 푸른 눈에 금발이었습니다.”

“남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그러자 검문을 했던 사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난히 예쁘장하던 기사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금발에 초록 눈이었는데…….”

“당장 찾으세요!”

 

***



“여기 찾았습니다!”

아델과 제니퍼는 숲에 숨겨진 마차를 찾았다.

나무 덤불로 가려진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먹을 음식, 갈아입을 옷, 모포 등이 꼼꼼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칼라임 제국 최북단에 있는 루스울프까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열흘 이상 걸렸다. 이자벨은 그동안 쓸 물품들을 준비한 것이다.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 분이시네.”

제니퍼는 수통 하나를 집어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그 역시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던 것이다.


“제니퍼, 옷부터 좀 갈아입고 싶은데…….”

아델이 어렵게 말을 꺼내자 그는 수통을 들고 마차를 나갔다.


“망을 볼 테니 천천히 갈아입으십시오.”

“고마워요.”

혼자 남겨진 아델은 기사단의 갑옷부터 벗었다.

그동안 아무리 훈련을 했어도 철로 된 갑옷을 입기엔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금방이라도 온몸이 짓눌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을 단단히 압박한 붕대도 풀어버렸다. 그제야 겨우 숨을 쉴 것 같았다.


“휴우, 이제 살겠네.”

하나로 묶은 머리에는 초록 리본을 두르고, 빼놓았던 약혼반지도 다시 손가락에 꼈다.

이렇게라도 해야 크리스틴과 조금이라도 이어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는 무사하겠지?


“아아!”

순간 아랫배에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하지만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어느새 온몸에 땀이 흥건해졌다.

그 무렵 마차 밖에서 제니퍼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델, 시간을 충분히 주고 싶지만 사제들이 오고 있어요.”

왜 하필 지금…….

아델이 배를 움켜쥔 채 마차의 문을 여는데,

퍼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 흔들렸다.


“꺅! 제니퍼, 괜찮아요?”

“글쎄요…… 상황이 좀 엿 같아졌네요.”

아델이 마차 밖으로 나가자, 좁은 숲길 사이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흰옷을 입은 사제들이 세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아델은 재빨리 퇴로를 살폈다.

말을 타고 나무가 많은 숲길로 달리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몸 상태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하지만 제니퍼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먼저 가요. 여긴 내게 맡기고.”

“무슨 소리예요. 혼자 가라고요?”

“위급상황에 부상병은 두고 가는 법이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다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아델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사제들이 날린 공격 마법에 그의 다리가 심하게 다친 것이다. 이런 다리로 말을 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동안 사제들은 불과 다섯 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젠 도망치기에도 늦은 것 같네요.”

아델은 제니퍼의 옆에 서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게 보내줄 때 갔어야죠.”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죠.”

그 무렵 아델과 마주 선 사제가 물었다.


“네가 아델 그릴스인가? 바이스 백작의 여자?”

“통성명하려거든 자신부터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지.”

“맹랑한 계집!”

사제들은 양손을 모아 나직하게 기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에 푸른 빛의 구슬이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델과 제니퍼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타앙!

타앙!

천둥 같은 소리가 숲을 뒤흔들고, 놀란 새들이 까맣게 날아올랐다.

아델과 제니퍼 앞에 두 명의 사제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칼은 다리를 건널 때 반납 했지만 피스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무슨 짓……!”

남은 사제 한 명이 당황해서 재빨리 푸른 구슬을 쏘았다.


“이야아아얍!”

하지만 제니퍼가 우람한 몸집을 날려 온몸으로 덮친 것이 더 빨랐다.

사제를 끌어안고 위에 올라탄 그는 바위 같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아델, 어서 도망쳐요! 총성을 듣고 곧 사제들이 몰려올 거예요.”

“제니퍼! 당신도요!”

“동료의 발목을 잡는 부상병은 절대 안 할 겁니다!”

“멍청한 소리 그만 해요.”

“더 멍청한 짓 좀 해볼까요?”

주먹질을 멈춘 그는 아델을 향해 씩 웃었다.

철컥!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피스톨을 겨눴다.


“어서 가요, 아델.”

“제니퍼…….”

“내 별명이 금발의 제니 말고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머리에 꽃 단 제니죠. 그러니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지도 몰라요.”

제니퍼는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정신 나간 표정이었다.

그를 노려보는 아델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다시 올게요. 제발 어디에라도 숨어 있어요!”

아델은 말에 올라타며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아니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 자리를 계속 맴도는지도 몰랐다.

시야가 혼탁해져서 하늘과 땅이 전부 뒤죽박죽이었다. 팔과 다리는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겁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쿠웅!

온몸이 그대로 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더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혼미한 시야 안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흰옷의 사제복…….

***



“아델. 아델…….”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였더라……?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부드러운 푸른 눈동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마크? 아……!”

일어나려던 아델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깨질 것 같은 통증으로 금방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대로 누워 있어.”

마크는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죠?”

“숲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수도원장님이 마차에 싣고 오셨어요. 난 수도원에 왕진을 왔다가 마침 당신을 본 거고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흰옷의 사제가 들어왔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에 온화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아델이 보았던 사제가 이 사람이었나보다.


“부인의 몸은 좀 어떤가요?”

“덕분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참으로 다행이군요. 수프와 마실 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수도원장은 갖고 온 트레이를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갔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마크는 의자를 끌어다가 아델의 옆에 앉았다.


“좀 먹겠어요?”

“그보다 구해줄 사람이 있어요.”

“제니퍼라면 이미 여기 있어요.”

아델은 그제야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고마워요. 당신에게 이렇게 또 신세를 지네요.”

“이럴 줄 알고 백작이 진료비를 두둑하게 냈나 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아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아델,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묻는 건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잠시 말을 끊자 아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제야 아델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마크는 나직하게 숨을 고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습니까?”

“……?”

아델은 잠시 동안 정신이 멍했다.


“임신이라니…… 제가요?”

“백작도 당신도 건강한 성인이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는 늑대 일족인 걸 숨기기 위해 아이를 안 낳으려고 했어요. 밝혀진 후엔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고…….”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을 나눴다면 완벽하게 임신을 피하는 방법은 없답니다, 아델.”

“그럼 정말 그의 아이를…… 내가…….”

아델은 믿어지지 않아서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달거리가 없었다. 요 며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느라 미처 날짜를 헤아려보지도 못했다.

내 몸에 정말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건가?


“기뻐하기엔 아직 일러요.”

“네……?”

“숲에서 발견됐을 때 당신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응급처치했지만 유산될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그토록 몸이 아팠었나 보다. 그런 것도 전혀 모르고 무리하게 움직인 것이다.

알았다고 해도 그 상황에 다른 방법은 없었겠지만.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당분간 움직이면 태아에게 위험해요. 그래도 안심할 순 없지만.”

“그건 안 돼요! 루스울프까지 가야만 해요!”

마크는 한숨을 쉬며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아기는 포기해요. 그리고 루스울프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

“겁주는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아델.”

 


***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크리스틴과 W.G 제 1기사단이였다.

그들은 며칠 전 급습을 당해 붙잡혀간 동료들을 구하러 온 것이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공개 처형한다고 했으니 오늘 구해야 했다.

다행히 이자벨이 돕기로 했다. 러스티스 대공의 환영 만찬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황궁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써준 것이다.

그때라면 다들 만찬에 관심을 쏟느라 경계가 허술해질 테니까.


“이자벨 부인이 정말 약속을 지킬까요?”

뒤따라오며 짐머가 우려를 내비쳤다.


“의심스러운가?”

“이미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요.”

그랬다. 이제 얀은 죽었고, 그녀의 아들이 곧 칼라임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교황청에 쫓기는 크리스틴을 굳이 도울 이유가 없을지도.


“글쎄, 얻는 건 어려워도 빼앗기는 건 아주 쉽지. 그녀가 어리석지 않길 바라야지.”

이자벨이 배신한다고 해도 크리스틴은 여기에 왔을 것이다. 그는 절대 동료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삐이익-!”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나무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로드웰 가문의 기사단장이었다.


“선황후께선 지금 만찬장에 계십니다. 제가 후문으로 안내할 테니 따라오십시오.”

기사단장은 황궁의 후문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 순순히 열어주었다.


“포로들은 검은 성 지하에 갇혀 있습니다.”

기사 단장은 검은 성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여기까지가 좋겠군.”

말없이 그를 따라가던 크리스틴은 결국 검은 성 입구에서 멈춰 섰다.

스릉!

동시에 그의 레이피어가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스릉! 스릉!

그를 따라온 기사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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